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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63화 (63/305)

<-- 27. 수련의 성과 -->

줄리앙은 하루종일 저택의 입구에 서서 제 주인을 기다렸다. 종자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시시때때로 그녀를 괴롭혔고, 그렇기에 주인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식사라도 하세요.”

시녀 마리가 다가와 소매를 잡아 끌었지만, 줄리앙은 요지부동이었다. 불성실한 종자로서 제 한 몸 안락함을 쫓기에는 스스로가 뻔뻔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의 사람들이 만류할수록 스스로를 가혹하게 내몰았다. 내리쬐는 땡볕 아래 그늘을 찾지 않았고, 자세를 흐트러트리지도 않았다.

“어리광도 정도껏 피워라.”

고집을 굽히지 않던 줄리앙의 의지를 꺾은 것은 목소리 큰 기병대의 사내들이 아니었다. 아샤 트레일, 그녀가 다가와 강제로 그늘에 주저앉힌 것이다.

“의미 없는 자학은 그저 얄팍한 자기 위안이며 책임감 없는 면피와 다르지 않음이라. 그대는 주인의 무기를 타인에게 맡긴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다시는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진저, 오늘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주인을 거뜬히 맞이할 심신을 유지하는 것이리라.”

그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는 올곧은 논리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억지로 버티며 일으키려던 몸에 힘을 풀고 여기사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 자라지도 않은 몸으로 식사도 거르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땡볕 아래 한 나절을 기다렸으니 몸 상태가 정상일 리가 없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는 머리로 이마를 짚었다.

척.

그늘에 식힌 시원한 수통이 불쑥 내밀어졌다. 잠시 멍한 눈으로 수통을 바라보던 줄리앙이 이내 고개를 들어 아샤 트레일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무심하게 자신을 내려보는 그녀의 모습에 줄리앙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수통을 받아들였다. 뚜껑을 열고 바로 목을 축이니, 청량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혹사당한 육신의 피로가 순식간에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기사의 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꾸짖듯 냉엄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다소 부드러워진 음성,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손은 검을 제대로 쥘 수 없고, 좁은 어깨와 가슴은 갑옷을 얹기에 충분하지 않다. 사내들에 비해 나약한 근력과 체력, 뭐 하나 저들보다 나은 것이 없지. 그런 여인의 몸으로 기사가 된다는 건 지난한 일이다.”

말과는 달리 줄리앙이 보기에 아샤 트레일의 육체는 다른 남성들에 비해 크게 꿇리지 않아 보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은 보이지 않았으나 균형 잡힌 근골은 충분히 강인해 보였고, 사내들의 뻣뻣함과 달리 유연하고 탄력 있어 보였다.

“저는 아샤 경이 부럽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면서도 정작 당신께서는 이미 왕도에서도 이름난 기사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모르게 다 자라지 않은 손발과 그녀의 늘씬하게 뻗은 그것을 비교해본 줄리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심코 자괴감이 들고 말았다.

“나 또한 그대와 같은 시절이 있었음이니, 그대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제가 가능하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위로에 놀라 물었다.

“나 또한 해냈으니 그대가 못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무덤덤한 어투였지만, 줄리앙에게는 평생토록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부족한 근력은 수련으로 극복할 수 있고, 여린 몸 역시 마찬가지다. 여인이라 불가능하다는 것은 나약한 자들의 핑계이자 사내들의 오만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면 저도 그렇게 될까요?”

어느새 줄리앙은 몸도 일으킨 채 아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봐야 어지간한 사내들만큼이나 커다란 그녀에 비해 한참은 올려다봐야 했지만, 또렷한 의지만큼은 전해졌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터이니, 그대는 신이 내린 축복을 허투루 사용하지 말라. 그리하면 지금의 나약함은 금세 잊을 것이다.”

덤덤하게 자신의 과거이자 어린 종자의 현재를 말하던 아샤 트레일이 문득 가슴께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음.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이 가슴만큼은 어찌 할 수가 없더군. 이것만큼은 여인의 몸으로 기사 된 자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리라.”

커다란 짐(?)을 짊어진 자의 고뇌에 줄리앙은 저도 모르게 제 판판한 가슴께를 내려다보고는 복잡한 얼굴을 해보였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순간 구분이 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인으로서의 삶보다 기사로서의 인생을 선택한 줄리앙이다. 그녀는 이내 축복(?) 받은 자신의 체형에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젠가 꼭 기사가 되어 경을 찾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다.”

아샤 트레일은 기운을 차린 줄리앙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자리를 떴다. 그리고 홀로 남은 줄리앙은 다시 제 주인의 귀환을 기다렸다.

방금 전과 똑같은 올곧은 자세였지만, 표정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조급함과 자책감이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평온하게 변해 있었다.

두두두두.

그렇게 얼마나 망부석처럼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즘이 되자 멀리서 인마 하나가 달려왔다. 낯익은 복장, 종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잭슨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 곁에 당연히 함께 있었어야 할 골드레이크와 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철렁.

싸늘하게 피가 식어 버리는 듯한 기분, 줄리앙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잭슨을 향해 달려갔다.

“급보요!”

영지가 떠나가라 외치는 잭슨을 향해 근처를 배회하던 기병대원들이 몰려들었다. 줄리앙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한 그들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잭슨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자작님께서 벼락의 검을 꺾으셨습니다!”

“그럼?”

“재판 결투는 승리했고! 레이라크 남작가는 패배를 인정하고 완전히 물러났습니다!”

잭슨의 말에 클라크를 비롯한 기병대원들이 환호했다.

“진짜 기사를 이기다니!”

“자작님 만세!”

사내들이 떠들썩하게 요란법석을 떠는 사이, 줄리앙만큼은 여전히 낯빛이 좋지 않았다.

“자작님은?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자작님은 무사하시고, 지치신 것 말고는 딱히 다친 곳도 없으십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줄리앙은 환하게 웃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식사도 거른 육신이 저도 모르게 휘청이며 주저앉을 뻔 하고 말았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뒤늦게 나타난 아샤 트레일의 부축을 받으며, 그녀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감사의 말을 몇 번이나 거듭 되뇌었다.

쾅쾅쾅.

익히 몇 번이나 들어왔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저 멀리서 낯익은 골드레이크의 모습이 나타났다.

“드라흔 자작님 만세!”

“영주님 만세!”

저택의 입구에 몰려든 사람들이 그렇게 승리한 영주를 맞아주었다.

**

“바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왕녀께서 주신 임무가 끝이 났으니,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다소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아샤 트레일의 대답에도 김선혁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말과는 달리 저택을 돌아보는 그녀의 표정에 은근한 아쉬움이 느껴진 탓이었다.

“조금 더 머무르시다 가셔도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자애로운 왕녀께서는 자작의 분투와 승리를 직접 듣지 않으시면 마음을 놓지 못하실 겁니다.”

마음 같아서야 더 붙잡고 싶었지만, 이리 말하니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트레일 경의 지도가 아니었다면, 분명 제가 졌을 겁니다. 라이든 레이라크는 분명 저보다 강한 기사였습니다.”

첫 공격에서 이어지는 밀치기로 망신을 당한 레이라크가의 차남은 다시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다. 그 신중함이 이름 난 기사의 발을 묶었고 그에게는 간격을 걱정않고 싸우게 만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샤 트레일의 지도였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라이든 레이라크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고,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여 훈련을 시켜주었다.

그 덕분에 김선혁이 자신보다 강한 기사를 거꾸러트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고맙지 않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나이트 레이라크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언제든 지금의 치욕을 설욕하려 할 테지요.”

“저는 그때도 지지 않을 겁니다.”

당부의 말을 건네는 아샤 트레일에게 다부지게 대답을 해주었더니,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드물게 미소를 내보였다.

“그럼 전 이만.”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아샤 트레일은 라인펄 영지를 떠났다. 올 때도 갑작스럽더니 과연 갈 때도 표홀한 그녀였다.

**

재판 결투의 결과는 금세 퍼져나갔다.

기사 병과도 아닌 이방인이 상급 기사에 준하는 실력을 지닌 레이라크가의 재판관을 꺾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검력과 마법력만이 강함의 기준이었던 왕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때마침 개발이 완료된 활자 기술과 종이 제작 기술이 왕도에 보급되었고, 사람들은 신문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이 놀라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알음알음 퍼져나가던 소문이 구체적인 형체를 갖고 온 귀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였다.

[드레이크 나이트가 벼락의 검을 쓰러트리다.]

[두 기사가 재판 결투에 도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라인펄 영지의 철광이 모든 것의 발단.]

[상급 기사 아샤 트레일, '대단한 노력가'라고 드라흔 자작을 칭찬하다.]

[이방인 최강자는 누군가.]

마치 저쪽 세상의 신문들처럼 온갖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가십과 소문에 광적으로 집착하던 귀족들은 미친 듯이 이 신문이라는 것을 사들였다.

[용기병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자작은 검력을 지니지 못한 평범한 기병?]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된 것은 검력을 지니지 못한 자가 검력을 완숙하게 익힌 기사를 이겼다는 점이었다.

검력의 깨달음 앞에서 좌절하여 내내 견습 기사에 머물러야 했던 자들은 검집에 묶어두었던 검을 다시 뽑아들었고, 검력을 깨우친 기사들도 언제 자신이 라이든 레이라크와 같은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왕국에 때 아닌 수련 붐이 일어났고, 아데스덴 왕실은 그 모든 모습을 몹시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기사들이 스스로에게 엄격함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목표를 갖고 수련하는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로다.”

왕가는 수련에 몰두하느라 두문불출하는 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막대한 격려금을 풀었고, 왕도의 수련 열기는 더욱 더 깊어졌다.

그렇게 왕도가 신문이라는 신문물과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신흥 강자의 등장에 열광하고 있을 때, 김선혁은 라이든 레이라크가 설욕을 위해 장기 휴가까지 내며 제 가문의 영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끙. 그냥 가서 내가 졌다고 하면 안 될까.”

엄살을 피웠지만, 말과는 달리 그는 하루도 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굳이 소문이 아니어도 자존심 강한 기사가 그대로 패배를 넘길 리가 없었으니, 라이든 레이라크가 언제고 다시 도전해올 것이라 그 스스로도 예상했던 탓이다.

한 번의 승리를 얻어냈지만, 그게 그 스스로가 레이라크가의 차남보다 강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운과 상대의 방심에 기대 기습적으로 올린 승리였으니, 두 번씩이나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샤 트레일의 지도를 통해 얻은 성과를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 끝에 마침내 상급에 불과했던 창술 스킬의 등급이 최상급에 이르렀다.

[레벨업 했습니다.]

그간의 고련을 통해 9에 도달했던 레벨이 마침내 10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달한 레벨 10은 단지 숫자 하나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레벨 9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2차 전직에 필요한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날 써두었던 원고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 쓰느라 늦었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양해를 ㅜㅜ

*오후에 한 편 더 올라갑니다. 당분간은 계속 연참 이어집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추가로 기병에 대해 설명을 드리자면, 기병은 최고조에 오른 속도를 통해 질량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충돌 전문 병과입니다. 하지만 그게 흔히 매체에서 보듯 창을 찌르고 말을 몰아 적진에 돌격하는 형태는 아닙니다. 차징으로 생겨난 파괴력은 온전히 창끝을 통해 적에게 투사되며, 기병들은 돌격 직후 이탈을 하는 전법을 사용합니다. 말은 기본적으로 훈련을 받더라도 장애물과 마주치면 방향을 돌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량을 실을 수 있는 공격은 오직 직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찌르기 뿐입니다. 시야와 운신을 제한하는 말머리 탓에 양손으로 잡아 휘두르는 장병류는 선호되지 않았으며, 이를 선호한 것은 충돌 전술이 아닌 높이의 전투 개념으로 운용되던 동양의 기병들 뿐입니다.

그런 고로 주인공의 무기는 창, 창, 창입니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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