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61화 (61/305)

<-- 26. 기사는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

라인펄 영지와 레이라크 영지의 경계, 모든 일의 발단이 되었던 철광과 멀지 않은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의가 없도다. 어찌 이리 늦장을 부린다는 말인가.”

멋들어진 반백의 수염이 인상적인 노귀족, 레이라크 남작의 말에 아인스트 제네거가 대꾸했다.

“아직 약속 시간인 정오까지는 다소 시간이 남았습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지요.”

“끄응. 정오가 약속이지만 그 전에 이웃된 도리로 인사라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느지막히 나타나 제 볼 일만 보겠다는 태도가 몹시도 괘씸하군요.”

레이라크 남작의 말에 아인스트 제네거가 헛웃음을 쳤다. 광맥이 발견되자 득달같이 달려든 작자가 할 말이 아니었던 탓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중립을 지켜야 할 참관인의 위치를 생각해 그도 더는 뭐라 지적하지 않았다.

“라이든.”

“네. 아버지.”

“그 자가 오거들랑 반드시 본때를 보여 주거라. 혹시라도 차후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남작의 말에 레이라크가의 차남, 라이든 레이라크가 말없이 검을 들어올렸다. 자신감에 찬 눈빛이 이미 승리를 제 손에 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거만하다 여겨질 수도 있는 모습, 하지만 이곳에 모인 자들 중에 라이든 레이라크의 승리를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왕도에서도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전승의 전적을 올려, 왕녀께서 친히 벼락의 기사라는 이름까지 내린 그가 일개 이방인에게 질 리가 없다 여긴 것이다.

그나마 아인스트 제네거만이 이중에서 유일하게 드라흔 자작의 분투를 기원하는 인사였다.

“남작께서는 잊지 마시오. 벼락의 검도 드레이크 나이트도 모두 폐하께서 아끼시는 왕국을 이끌어갈 동량이라는 사실을. 오늘 과하게 손을 써 차후 폐하께서 심려하시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하지만 그런 아인스트 제네거마저도 라이든 레이라크의 승리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손을 쓸 것을 권유했다. 이 정도의 요구 정도는 재판 결투에서도 왕왕 있었던 일이라 남작도 부당하다 여기지는 않았다.

“제네거 경의 말을 들었느냐.”

“손속에 인정을 두어 폐하께 불충을 저지르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는군요.”

레이라크 남작의 얄미운 태도에 아인스트 제네거는 한숨을 쉬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시간이... 음?”

약속된 정오가 거의 되어 갈 무렵, 저 멀리서 새까만 점이 나타났다.

“드라흔 자작이 당도하신 모양입니다.”

가장 먼저 멀리서 달려오는 인마(人馬)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은 라이든 레이라크였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평원 저 끝에서부터 달려오는 인마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혼자지?”

“저건 또 뭐야.”

종자도 시중 들 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건 둘째치고라도 더욱 이상한 점은, 마치 전장의 기수(旗手)처럼 기다란 막대를 손에 들고 달려오는데 정작 나부끼는 깃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기병용 마상창?”

그게 깃대가 아닌 기형적으로 크고 기다란 창이라는 것을 깨닫는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허. 재판 결투를 기사 토너먼트로 착각한 것은 아닌가.”

장창병이 내민 창대를 밀어내는데나 소용이 있을 법한 마상창을 본 레이라크 남작이 혀를 찼다. 갑옷이며 무장이며 빈약한 것이 위엄있는 기사라기보다는 한낱 기병처럼 보일 지경이라 라이든 레이라크 역시 표정에 비웃듯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자로군요.”

하지만 비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드라흔 자작님의 종자 잭슨 해밀튼입니다! 자작님께서 오는 도중에 볼 일이 생기시는 바람에 제가 먼저 왔습니다!”

당연히 드라흔 자작일 거라 생각했던 기수가 스스로를 종자라 밝혔기 때문이었다.

“자작께서는?”

그래도 영지에 머문 연이 있어 잭슨의 정체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아인스트 제네거만이 오직 이 상황에 당황하지 않았을 뿐이다.

“해가 가장 높게 떠오르기 전에는 오실 겁니다.”

“대관절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신성한 재판 결투를 앞두고 다른 일을 우선한다는 말인가.”

잭슨의 말에 레이라크 남작이 버럭 역정을 냈다.

“약속 시간까지는 당도하실 겁니다.”

드레이크 기병대의 순둥이라 불리는 잭슨, 그런데 지금 남작의 말에 대답하는 그의 어투가 냉랭하기만 했다. 김선혁을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그의 입장에서 남작은 광산에 눈이 멀어 이웃의 재산을 탐한 후안무치한 작자였다. 당연히 말투가 고울 리가 없었다.

“종자 따위가 어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리 고개를 꼿꼿이 드느냐! 무도한 이방인의 종자답도다! 당장 무릎을 꿇고 어디 가문의 누구인지를 밝혀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건장한 체구답게 레이라크 남작은 꽤나 다혈질이었다. 잭슨의 빳빳한 태도에 금세 화를 내며 이를 갈아댔다. 하지만 잭슨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이 달려온 평원을 바라보며 김선혁이 언제 도착하나 기다렸을 뿐이다.

“그는 왕국군 서부방면 수비대 소속,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원입니다. 사정이 있어 종자로 나섰지만, 기병대의 신분을 버린 것은 아니니 폐하와 왕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강제로 그를 무릎 꿇릴 수는 없습니다.”

아인스트 제네거가 나서서 남작을 진정시켰다. 유순하기로 유명한 잭슨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워하면서도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보라도 눈치 챌 정도로 일부러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한 잭슨을 보며 결국 라이든 레이라크가 나섰다.

“중앙 기사단 11조 소속 선임기사 레이든 라이라크다. 말에서 내려 영주께 예를 표하라.”

“앞으로! 휴가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잭슨은 만만치 않았다. 유순한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대쪽 같은 면이 있었고, 따지고 보면 같은 소속이라고 해도 좋을 라이든 레이라크의 말조차 상대가 휴가 중임을 내세워 따르지 않았다.

“끄응.”

트집을 잡자고 달려들면 얼마든지 구실을 잡아 저 건방진 기병을 무릎 꿇릴 수 있었으나 남작도 라이든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개 기병주제에 지나치게 꼿꼿한 태도가 혹시 존귀한 가문의 자제가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탓이다.

“마침 저기 오시는군요.”

타이밍 좋게 평원 저 먼 곳에 새까만 점 하나가 나타났다.

“숨 돌릴 시간도 주지 마라. 라이든.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너를 인정 없다 원망치 못할 것이다.”

“네. 아버...”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노라 대답을 하려던 라이든 레이라크가 입을 쩍 벌렸다. 남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드레이크!”

상대가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칭호를 받은 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드레이크를 타고 나타난다 한들 새삼 놀랄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 드레이크라는 게 남작과 라이든이 알고 있던 드레이크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뭐가 저렇게 커!”

야생의 드레이크라고 해봤자 말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하다. 단단한 비늘과 억센 턱이 상대하기 까다롭기는 하나 상급 기사에 준하는 실력을 지닌 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괴수이기도 하다. 중앙 기사단의 대 몬스터 전투 법에도 그리 나와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라이든 레이라크는 당시 대 몬스터 전투를 교육했던 교관을 찾아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지간한 마차보다 거대한 저 괴수를 무슨 수로 쉽게 처리한다는 말인가.

크르르르.

흉폭한 눈동자가 뒤룩뒤룩 굴러가다 딱 멈췄다. 레이라크 남작을 향해서였다. 남작은 전장에서 오래도록 종사한 지휘관답게 흉악한 괴수를 마주 노려보는 용맹함을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드레이크가 사납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안면을 다 가리는 특제 갑옷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드레이크의 턱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어지간한 단검들보다 더욱 날카롭고 커다란 송곳니에 피가 흥건했다.

포효소리에 놀라고, 그 흉물스러운 아래턱의 몰골에 또 놀랐다. 그야말로 오밤중에 만났다면 실금하며 도망쳤을 끔찍한 모습, 묶어두었던 말들이 비명을 지르는 통에 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방금 막 피를 보고 와서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때 드라흔 자작이 드레이크에서 내리며, 넉살 좋게 말했다.

일개 몬스터라 생각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드레이크에 비해 드라흔 자작 자체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그랬기에 그가 나서 입을 열기 전에는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잠시 추태를 보였던 남작이 뒤늦게 표정을 수습하고는 버럭 외쳤다.

“신성한 재판 결투를 앞두고 어찌 다른 일을 우선할 수 있는가! 그대는 이 재판 결투가 우습...”

“사정 좀 봐주십시오. 이 놈이 배가 고프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귀족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껄렁껄렁한 말투, 하지만 남작은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드라흔 자작의 뒤에 목을 늘어트린 드레이크가 크르르, 목을 울려댔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아직 배가 다 차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반갑습니다. 라인펄의 영주,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입니다.”

“레이라크가의 에노스 할테인이외다.”

이미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버렸다. 당도하는 즉시 망신을 주리라 다짐했던 레이라크 남작은 자작의 소개에 저도 모르게 마주 인사하고 말았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바로 시작했으면 합니다.”

완전히 기세에서 밀려버린 제 아비를 바라보던 라이든 레이라크가 나섰다. 그 말에 아인스트 제네거가 못마땅한 얼굴을 해보이며 김선혁의 의향을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약 원한다면 정당한 입회인의 권한으로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아인스트 제네거가 다소 걱정 어린 기색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는 곧장 재판 결투의 시작을 선언했다.

“레이라크가의 에노스 할테인 남작은 라인펄 영지에 발견된 철광에 대한 소유권에 이의가 있음을 제기하였고, 이는 철광의 위치가 라인펄 영지가 아닌 레이라크에 속한 것이라 말하였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오.”

“라인펄의 지배자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자작은 이러한 레이라크가의 주장이 사실무근이라 하였고, 스스로가 철광과 그 일대의 온당한 지배자라 말했다. 맞습니까?”

“네. 더하고 뺄 것도 없이 딱 그대롭니다.”

입회인이 양측의 입장을 정리하여 확인했고, 레이라크 남작과 김선혁은 절차대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의를 제기하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정의에 한 치 의심도 없으나, 그중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리라.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모두는 신께서 정의를 가려주실 것을 믿으시매, 오직 진실된 자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양측 모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오.”

“네. 동의합니다.”

그리고 모든 확인이 끝나자 아인스트 제네거가 잠시 텀을 두고 선언했다.

“레이라크 남작과 드라흔 자작 모두 신의 공정함을 의심하지 않는 바, 재판 결투가 성립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이는 이 땅의 적법한 지배자 아데스덴 왕가가 허락을 한 것이며, 맹스크의 대영주이자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가 공증을 한 바, 결과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노라. 레이라크가의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나선 자의 이름을 말하라.”

입회인의 선포에 레이라크 라이든이 한 발 나섰다.

“라이든 레이라크. 레이라크가의 차남이며 중앙 기사단 11조 소속 선임기사입니다.”

“나이트 레이라크. 그대가 가문의 정의를 대신함을 인정한다.”

라이든이 몸을 풀며 전투 준비를 하는 동안, 아인스트 제네거가 이번에는 김선혁을 향해 물었다.

“드라흔의 정의를 증명할 자는 누구인가.”

“선혁 라인펄 김 드라흔. 자작이며 왕실 중앙군 서부방면 소속 드레이크 기병대의 중대장이자 라인펄의 영주입니다.”

“본인 스스로 정의를 증명하고자 하는 그 올곧음에 찬사를 보낸다. 그대가 적법한 결투자임을 인정한다.”

아인스트 제네거의 눈이 양측을 한 번씩 스쳐갔다.

“재판 결투(Gerichtlichen Zweikampfen)를 시작한다. 한쪽이 전투를 속행할 수 없을 때, 또는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을 때만이 결투가 끝나는 순간이리라. 승자는 패자에게 아량을 베풀고, 패자는 승자의 정의에 다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지어다.”

드디어 재판 결투의 절차가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양측이 전력을 다 해 스스로의 정의를 입증하는 것 뿐이었다.

“각자 무기를 드시오. 이 재판 결투가 훗날 양 가문의 원한으로 남지 않기를 바라겠소.”

아인스트 제네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든이 눈을 번쩍이며,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잭슨.”

“자작님.”

김선혁의 부름에 잭슨이 말에서 내려 이제껏 높게 치켜들고 있던 거창을 건네주었다.

“자, 잠깐. 그걸 지금 무기로 쓰겠다는...”

말에 탄 기병이 쥐고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 용기병 전용의 특제 창을 본 라이든이 기겁을 했다.

“문제 있나?”

김선혁이 그런 라이든을 향해 창을 겨누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게 아니라...”

무려 스무 걸음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당장에라도 목을 꿰뚫을 듯 지척까지 닿은 창끝을 본 라이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럼 시작하지.”

김선혁이 라이든의 말을 무시하고는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내렸다. 라이든도 그를 따라 마지 못해 얼굴 가리개를 내리고는 칼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럼 재판 결투를 시작하겠소! 두분 모두에게 무운이 있기를!”

========== 작품 후기 ==========

*우. 완전 기절했습니다. 일어나보니 마감시간이네요. ㅜㅜ

*걱정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뭐, 글쟁이 인생이 별 거 있겠습니까. 글노예로 살며 독자분들께서 보내주신 격려와 관심으로 연명하는 게지요. 껄껄.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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