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59화 (59/305)

<-- 26. 기사는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

아덴버그 왕국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체제에 가까웠지만 봉건주의적 성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강력한 집권력을 지닌 왕실 아래 여러 대영주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국가의 근간을 이루되, 왕실이 직간접적으로 여러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강력한 왕권 앞에 어지간하면 양보를 해주었고, 왕가 역시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는 선에서 귀족의 권위를 인정해주었다.

그중에서도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 변경백은 꽤나 위세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 성향이 왕실에 충성스럽고 사리사욕을 위해 움직이는 법이 없어 크게 존재가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도 서부군의 총사령관이자 국경지역을 오래도록 수호해온 그의 위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변경백이라고 해서 휘하의 소영주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맹스크의 깃발 아래 몸을 숙이고 있었지만 개개인이 오래도록 한 지역을 다스려왔던 지배자이며, 잦은 녹테인의 침입에도 끝끝내 제 땅을 지켜온 유능한 군인들이었다.

그중에 하나가 라인펄 영지에 대해 딴지를 걸고 나섰다. 라인펄과 바로 인접한 곳에 위치한 레이라크 영지의 영주가 광산의 소유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발견된 철광은 레이라크 영지의 것이다.”

하필이면 철광의 위치가 애매했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영지의 경계라는 게 경계 삼을 강이나 산맥이 있는 게 아니라면 자로 그은 듯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측정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분쟁이 될 소지가 있었다. 그리고 레이라크 영지의 지배자가 그러한 헛점을 짚고 나선 것이다.

“안타깝게도 맹스크 변경백께서도 이번 일에는 직접적으로 나서서 중재를 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이십니다. 왕실이 인가를 내린 상태라면 그나마 왕가의 권위에 기대볼 수가 있으련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왕실은 분쟁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서신을 가져온 전령의 말에 김선혁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결국은 저쪽에서 작정하고 움직였다는 말이네.”

전령은 그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원하는 거야 철광일 테고, 다만 그 방법이 궁금하군. 이런 경우 보통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자료를 찾아 영토의 정당한 소유권을 인정받아 광산을 적법하게 넘겨받거나,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아 이득을 나누기도 합니다.”

줄리앙의 대답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별로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야. 설마 방법이 그거밖에 없는 건 아니겠지?”

“위에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방법을 말씀드린 거고, 실제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귀족들이 선호하는 방식은 따로 있습니다.”

김선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났다.

“결국은 영지전인 건가!”

그의 말에 줄리앙이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

“무슨 철광 하나 때문에 영지 자체의 존폐를 위협할 생각이십니까. 그 전에 애시당초 우리 영지에 이렇다 할 병력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크고 작은 부분을 전부 드레이크 기병대에게 의존하는 상황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보통은 그렇지 않아?”

“보통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왕실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왕실은 변경의 영주들이 서로를 상잔하여 녹테인에게 빌미를 주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요.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전을 강행한다면 상대 영주의 군대가 아닌 서부군과 먼저 마주허개 될 거라 장담합니다.”

이웃 국가와도 심심치 않게 전쟁을 하는 세상이라 지레짐작을 했는데, 완전히 헛발 짚은 모양이다. 한심한 듯 바라보는 줄리앙의 시선을 피하며 그가 딴청을 피웠다.

“영지의 힘도 소모하지 않고, 각자의 정의를 증명할 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뭔데.”

무안한 마음에 심술 맞게 대답을 하니 줄리앙이 전령을 바라보았다. 전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맹스크 백작의 말을 전했다.

“맹스크 변경백께서는 재판 결투를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원하실 경우 믿을만한 이를 입회시켜 결투의 정당성과 판결의 적법함을 증언토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재판 결투?”

아직 영주로서도 귀족으로서도 소양이 부족한 김선혁을 위해 줄리앙이 설명을 해주었다.

“대표를 내세워 결투를 하는 겁니다. 결투가 끝이 나면 패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반드시 승자의 의사를 따라야 합니다.”

“그게 뭐야. 결국 강한 놈이 유리한 거잖아.”

되도 않을 방식의 재판에 그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신께서 정의로운 자의 손을 들어주시게 마련입니다. 신은 불의가 승리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니까요.”

“그게 그거지. 이기는 쪽이 옳다는 소리구만.”

“다릅니다. 정당한 쪽이 이기는 겁니다.”

둘이 뭐가 다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김선혁은 더 토를 달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재판 과정의 공정함이 아니라, 결투의 결과였다.

“만약 재판이 이루어질 경우 저쪽에서 나올 상대가 누군지 들은 것이 있나.”

종자라지만 명백하게 귀족 출신이자 스스로도 견습 기사에 가까운 위치인 줄리앙의 질문에 전령이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레이라크 남작측에서는 중앙 기사단에서 복무중인 차남을 불러들일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레이라크가의 차남이라면...”

“중앙기사단에서 근속연수 8년을 채운 선임기사급의 기삽니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고, 스스로도 작위 계승권이 없다는 것이 동기가 되었는지 검의 수련에 평생을 바친 기사입니다. 그 결과 나름대로 검력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벼락의 검’이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유치한 호칭을 듣는 순간 그게 누구의 작품인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사나운 괴수에게 골디라는 어울리지 않는 애칭을 지어준 아데스덴 왕가의 꼬맹이, 오필리아가 분명했다.

“만만치 않은 상대로군요. 레이라크 남작이 이리 일을 크게 벌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가 잠시나마 시답지 않은 생각에 잠겨있을 동안 줄리앙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능하면 재판 결투보다는 일정 부분 이윤을 약속하고 합의를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벼락의 검’이라면 30대의 나이에 상급 기사에 비슷한 실력을 지닌 자라는 명성이 자자합니다.”

금세 태도를 달리 하는 줄리앙이었지만, 그는 그녀를 질책하지 않았다. 기사라는 족속들이 얼마나 인간같지 않은지 그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사스테인과의 일전에서 당시 선임 기사의 위치에 있던 프레드릭의 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하물며 상대가 그냥 기사도 아니고 상급 기사에 준하는 실력을 갖추었다니 그로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줄리앙의 질문에 그가 대답대신 되물었다.

“그 버럭검인지 벼락검인지 하는 양반과 레인하르트 후작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 수준이지?”

“그 말씀을 레인하르트 후작이 들었다면 모욕당했다 여겨 자작님을 가만 두려 하지 않을 겁니다.”

굳이 이 이야기가 아니어도 레인하르트 후작은 이미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였겠지만, 그는 그런 것까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럼 그 레인하르트 후작보다는 훨씬 약하다는 거지?”

“숫자 열을 셀 시간이라도 버티면, 천재라고 추켜세울 겁니다.”

희망이 생겼다. 같은 상급 기사라도 격차가 있었는지, 다행스럽게도 레이라크가의 차남은 레인하르트 후작 같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래? 그럼 하나만 더 묻지.”

“설마, 직접 나서시려는 겁니까?”

“일단 이것만 대답 마저 듣고.”

줄리앙은 새삼 자신의 영주가 상급 기사에 준하는 강자와 일전을 불사를 의지를 보이자 드물게 존경의 감정을 내비쳤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이라면 뭐든.”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며 극도의 예를 표하는 줄리앙을 보며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옆을 보자 맹스크의 전령 역시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는 먼저 하려던 질문을 던졌다.

“그 재판 결투라는 거 중도에 포기할 수 있지?”

“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인지 줄리앙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그거 결투 도중에 안 되겠다 싶으면 항복할 수도 있는 거냐고.”

뒤늦게 그의 말을 알아들은 그녀가 착, 가라앉은 얼굴로 대답했다.

“불명예가 따르겠지만, 가능합니다.”

“그럼 그 결투, 내가 나가도록 하지.”

이제 와서 비장하게 말해봐야 무리다 싶으면 중도에 항복하겠다는 얄팍한 생각이 전부 들통나고 난 뒤였다.

“내가 아니면 달리 나설 사람이 없으니까.”

**

결국 레이라크 남작가와의 문제는 재판 결투를 통해 해결을 보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맹스크의 전령은 김선혁의 결정을 맹스크 백작에게 전했고, 백작은 다시 그 소식을 레이라크 남작가에 전했다.

“왕실의 조사관이라는 신분에 걸맞는 공정한 태도로 결투에 임하겠습니다.”

입회인은 맹스크가의 관계자가 아닌 아인스트 제네거가 맡게 되었다. 왕실 조사관이라는 신분은 이 노마법사를 입회은으로 내세우기에 충분한 권위가 있었고, 마침 재판 결투의 이유도 조사관의 임무와 관련된 광산이었으니 어느 누구도 그 공정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삐 연락이 오가고 재판 결투의 날짜가 잡혔다.

“흠. 3주 뒤라...”

길지도 짧지도 않은 3주라는 기간은 강적을 상대로 부족한 검술을 갈고 닦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이들에게나 통하는 이야기였을 뿐, 김선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죽어라 노력하면, 레벨 하나 정도는 올릴 수 있겠지.”

그는 단시간에 성장이 가능한 이방인이었으니까.

**

“레이라크가의 차남이 어제 영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헙! 일찍 왔네? 으핫차!”

결투를 2주 남겨둔 김선혁은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줄리앙의 말을 한귀로 흘려들으며 그는 거듭 창을 내질렀다.

“으. 땀.”

쉬지 않고 움직이던 창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 탓에 잠시 멈추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줄리앙이 다가와 마른 수건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

여상스럽게 수건을 넘겨받아 땀을 닦아낸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로 할 말이 있냐는 그의 눈빛에 그녀가 무거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재판 결투가 결정된 뒤로 알아보니 레이라크가의 차남에 대한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왕도의 권세 높은 귀족들을 대신해 재판 결투에 수차례 참가해 딱 한 번 패배했을 뿐, 수도 없는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그 결과 ‘레이라크가의 재판관’이라는 별명까지 근래에 생겨났다더군요.”

“작명 센스 하고는...”

“그렇게 우습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에게 패배한 기사들 중에 상급 기사도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달리 하시는 건...”

“이미 온 동네에 소문 다 났는데 취소할 수는 있어?”

“꼴이 조금 우스워지겠지만, 결투에서 지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때는 명예고 실리고 전부 다 잃게 될 테니까요.”

줄리앙의 걱정 가득한 말에 김선혁은 문득 물었다.

“걱정해주는 거야?”

“종자가 주인을 걱정하는 게 뭔가 이상하십니까?”

“단지 그것 뿐?”

다시 창을 잡으며 물었더니, 잠시 텀을 두고 줄리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제가 누군지 들어 알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늘 사무적이었던 그녀의 음성에 담긴 복잡한 감정, 창을 바닥에 꽂은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작님께는 늘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작님께서는 아비의 원수를 갚아주셨고, 계집아이라 천대받던 저를 이리도 중임해주셨습니다. 조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자작님 덕이니 제가 그 은혜를 모른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겠지요. 그리고 저는 짐승이 되고 싶은 마음이 요만큼도 없습니다.”

드물게 속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저는 자작님께서 다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지금이라도...”

“마음은 고마워.”

다시 재고를 권하는 줄리앙의 말을 그가 허리에서 잘라냈다.

“말했잖아. 불리할 거 같으면 항복할 거라고.”

“벼락이라는 별명까지 받은 상대의 검은 그럴 틈을 주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외쳐야지. 그만, 그만하라고. 졌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모른 척 하기가 어렵지 않겠어?”

진지한 자신의 말에도 그가 여전히 장난스레 대답하자 줄리앙이 조금은 서운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근데 말이야.”

김선혁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더없이 진지한 자세로 허공에 창을 내질렀다.

팡!

그런데 그렇게 내질러진 창이 흡사 뭔가를 꿰뚫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질 것 같지 않거든..”

허공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잠시 머물다 흩어지기 시작한 속성의 힘이 걸려들었다.

지난 지휘관 교육에서 얻은 것이 있었다. 검력이라는 개념에 무지한 스스로가 기사들처럼 날붙이에 힘을 불어넣는 방법이 있을까. 마침 재판 결투를 앞두고 한동안 소홀했던 개인의 수련에 몰두했고 마침내 원하던 성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고오오오.

내지른 창의 궤적을 따라 마치 기사들의 검광과도 같은 신묘한 기운이 진하게 머물다 낮은 바람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 작품 후기 ==========

*연참본입니다. 추천과 코멘트로 제 고갈되는 기력을 채워주소서.

*한편 더 도전하러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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