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영지 개발 -->
“공중 화장실을 만들자.”
화장실 같은 것 말이다.
“공중 화장실 말입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일단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주변 환경이 깨끗해야 해. 근데 지금 라인펄은 너무 더러워. 잘 씻지도 않는데 마을까지 더러우니 병 걸리기 딱 좋은 환경이야.”
줄리앙의 시큰둥한 음성에 그도 풀이 죽은 얼굴을 해보였다. 그렇게 궁리를 하고도 겨우 떠올린 것이 화장실이라니, 스스로도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화장실이 제대로 정착만 되면 작게는 마을의 위생 상태를 일신하고, 크게는 농사에 필요한 비료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으니 그 나름대로는 장고 끝에 떠올린 획기적인 한 수였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당연한 거였어. 그리고 그렇게 똥이 모이면 짚이니 뭐니 적당히 덮어서 삭혔다가 퇴비로 쓰면 농사에도 도움이 될 거야.”
농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세상의 농업이 낙후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만 해도 휴경지니 뭐니 놀고 있는 땅이 너무 많았다.
“지기를 지나치게 소모하면, 수확이 영 좋지 않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쉬어주지 않으면 땅이 완전히 죽어버립니다.”
“그 지기를 퇴비가 채워줄 거라고.”
줄리앙은 크게 공감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일단 영주의 명인지라 알았노라 대답했다. 이럴 때면 거추장스럽던 영주의 자리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얄팍한 지식을 늘어놓으며 상대를 설득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가능하면 많이 만들어. 화장실이 부족하면 또 기다리기 싫어서 아무데나 볼일을 볼 테니까.”
공중 화장실이라고 해봤자, 말만 거창하지 사실은 땅을 파내고 그 주변에 천막을 쳐둘 뿐인 조잡한 것이다. 비용도 얼마 들지 않으니, 빠듯한 재정 상태로 시행하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그럼 당장 적당한 사람을 추려 내일부터라도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줄리앙은 당최 영주라는 사람이 왜 영지민들의 배설에까지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따로 또 지시하실 게 있으십니까?”
“어. 그거 말고도 물레방아라는 게 있거든...”
내친 김에 전부 이야기를 해주니, 줄리앙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그를 처다만 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생긴건데...”
열심히 설명을 해보았지만, 상대가 알아먹지를 못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이제껏 수많은 아이디어를 갖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발안자 스스로가 얄팍한 지식을 지닌 탓에 도무지 새로운 개념을 잡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때만큼은 영주의 권위도 소용이 없었으니, 그로서는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호오. 이건 수차(水車)로군요.”
그의 말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 줄리앙이 왕실 조사관을 불렀다. 그리고 조사관은 놀랍게도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제법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수차라는 게 뭡니까?”
줄리앙의 질문에 김선혁은 대답을 조사관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조사관은 그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떨어지는 물이나 흐르는 물을 이용해 굴리는 바퀴라고 할 수 있네. 그렇게 돌아가는 바퀴에 이것저것을 만들어 매달아두면 마소를 대신할 수 있지. 하지만 물가에 만들어야 하고 마소와는 달리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쓰임이 있지는 않다네.”
조사관은 비록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마법사로서의 소양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고, 마법사는 이곳 세상의 발명가이자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 해박한 지식에 완전히 반해버린 김선혁이 이내 눈을 게슴츠레하게 썼다.
“조사관께서 얼마나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라 하셨죠?”
“광산이 개발되어 제대로 굴러갈 때까지는 머물 생각입니다. 제대로 된 생산량을 확인해야 왕실에 보고할 수 있을 테니까요.”
조사관의 대답에 그의 눈매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그때까지는 크게 할 일이 없으시겠군요. 무료하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변경의 마을이라는 것이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무료함을 참는 것이라면 저도 이골이 났습니다.”
기다렸던 대답이다. 김선혁은 덥석 미끼를 문 조사관을 보며 눈을 번쩍였다.
“조사관님. 아니, 제네거경.”
“드라흔 자작님?”
정색을 하고 부르는 그를 보며 조사관, 아인스트 제네거가 덩달아 진지한 얼굴을 해보였다.
“저랑 같이 그 무료함을 달래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
김선혁은 자신이 이제껏 생각으로만 갖고 있던 저쪽 세상의 지식들을 전부 아인스트 제네거에게 풀어놓았다. 그중 대부분은 반드시 갖춰야 할 기초 기술이나 제반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었지만, 간혹 가다가 쓸 만한 것들도 있었다.
“수차를 이용해 낮은 곳의 물을 끌어다 필요한 곳에 물을 대다니, 흥미로운 발상이군요.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그다지 출중하지 않아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었던 탓인지, 아인스트 제네거는 그가 전해주는 저쪽 세상의 지식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이거 단시일에 끝날 일이 아니겠습니다.”
급기야 왕실로 직접 편지를 보내 임무를 마치고 나서도 이곳에 잠시 머물러도 될지 허락을 구하기까지 했다. 새로운 지식과 발상에 어지간히 몸이 달았던 모양이다.
왕실은 어렵지 않게 그 요청을 허락해주었다. 다만 머무는 동안에도 조사관의 책무에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을 뿐이다.
“끄응. 이거 자꾸만 신세를 지니 부담스러울 지경이군요. 나중에 이런 것도 전부 갚아야 할 텐데.”
왕실에게 자꾸만 빚을 지는 꼴이라 또다시 그의 채무자 본성이 슬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아인스트가 껄껄대며 안심하라 말했다.
“자작께서는 변경에 머무느라 모르셨겠지만, 이미 중앙의 이방인 출신 인사들을 통해 새로운 지식이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왕도의 모습이 놀라울 정도였답니다.”
하기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간 이방인들이 살아남아 제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몰두하느라 다른 데 신경쓰지 못했었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모두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저쪽 세상의 문물을 전파할 정도의 여유가 있고도 남았으리라.
“왕실은 이방인의 문물에 굉장히 호의적인 편입니다. 왕실 마법사단의 마법사들에게 전적으로 그들을 지원하라는 지침까지 내려왔을 정도니, 새삼 자작께서만 특혜를 받으신 건 아니라 여기셔도 무방합니다.”
이제까지 보여왔던 왕실의 합리적인 태도를 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아인스트는 자신이 떠나오기 전에도 활자 기술이라는 것과 값비싼 양피지를 대신할 종이라는 물건이 개발 중이었다며 이방인들의 기술에 엄지를 추켜세워 보였다.
“아...”
자신은 고작 생각해낸 것이 화장실과 비료, 수차 정도인데 새삼 비교가 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저쪽 세상에서 다져온 지식이 달라 일어난 일이니 누구를 탓할 이유도 실망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은 개중 쓸 만한 기술이 있다면 자신의 영지에 보급하는 게 이득이었다.
“자작님 개인이 쓸 만한 물건이라면 모를까, 영지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건 그다지 떠오르지 않는군요.”
하지만 왕도에 전파되기 시작한 저쪽 세상의 기술 중에 당장 영지에 도입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 그 기술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귀족의 여흥을 위한 것들이거나, 존귀한 양반들의 품위에 관계된 물건들 뿐이었다.
“정말로 하나도 없습니까?”
“네. 원하신다면 중앙에 요청해 그 리스트를 받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담컨대 자작님께서 바라시는 건 없을 겁니다.”
아인스트 제네거의 확신에 찬 대답, 그 상황이 꽤나 작위적이었다. 어찌 하나같이 귀족들의 향락과 문화생활에만 관련된 이기들만 전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개중에 하나 정도는 평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도 있을 법 하지 않은가.
“하긴 자기들이 아쉬운 것부터 먼저지.”
김선혁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떠올렸다. 왕도에 머무는 이방인들 대다수가 이미 귀족의 반열에 오르거나 그에 준하는 신분을 얻은 상태였다. 그들이 새삼 마주칠 일도 없는 평민들을 위한 발명품을 내놓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선혁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왕실이 이러한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한 번 생각하고 나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다.
‘만인은 평등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이방인들이 살아온 세상은 이곳 세상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민주주의에 근거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켜지지 않을 공허한 외침이나마 늘 평등을 교육받으며 살아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보기에 따라 왕정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위험인자들이었다.
왕실이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까. 처음 훈련소에 갇혔을 때도 그렇게 난리들을 피워댔는데,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은 아낌없이 지원을 베풀었고 마침내 대부분의 이방인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에는 그저 가치가 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영주에 오르고 나니, 그게 얼마나 단순한 생각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왕실은 이방인들을 변화시켰다. 이방인들 스스로가 선민의식과 특혜에 절게 만들어 스스로를 기득권에 속하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거북스러운 이념과 가치관은 이미 온데간데없게 되었고, 그들은 이제 위험인자가 아닌 이방인이라는 이름의 신흥 귀족들이 되었다.
실제로 그들이 왕도에서 전파한 문물들은 오직 귀족과 왕족의 삶을 한 층 더 즐겁고 풍요롭게 만드는데 필요한 물건들뿐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 국왕이라는 양반,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무섭다.
어떻게 이리 완벽하게 필요한 것만 취하고 껄끄러운 것은 쳐낼 수 있었는지, 왕실의 수완이 놀라울 정도였다.
“드라흔 자작님?”
“네? 네. 말씀하십시오.”
생각에 잠겨 있던 김선혁은 아인스트 제네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영지의 목수를 데리고 한 번 수차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저도 이론만 알지 실제로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 직접 물건을 봐야 조금 더 명확하게 감이 올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줄리앙에게 이야기를 해둘 테니 언제든 말씀하세요.”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 지은 김선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근히 그가 자리를 비켜주기를 기다린 것인지 아인스트 제네거는 그가 자리를 채 떠나기도 전에 펜과 양피지를 꺼내 작업할 준비를 했다.
“그럼 결과물이 나오면 기별 주시기를.”
대답 대신 슥슥, 펜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아인스트의 거처를 나섰다.
**
“아이고! 이쁜 것! 기특한 것!”
입가에 뭔가를 잔뜩 우겨넣고 아그작거리는 골드레이크를 보며 김선혁이 한껏 칭찬을 해주었다. 혹시라도 또 뒤통수를 두들겨 맞는 것은 아닌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목을 움치고 있던 괴수가 뒤늦게 목을 빳빳이 세웠다.
뭔지는 몰라도 자신이 칭찬받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어떻습니까? 그냥 돌은 아니지요?”
수차의 개발과 도면작업에 한창 몰두해 있던 아인스트 제네거는 영주의 재촉에 불려 나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뚱한 표정이었다.
“오! 이번에는 철이군요. 잡스러운 것들이 많이 섞여 있긴 하지만, 분명 철광입니다.”
하지만 그 못마땅한 얼굴도 오래 가지 않았다. 척박한 영지에 놀랍게도 벌써 두 번째 광맥이 발견된 탓이었다.
“으잣! 부자다!”
“자작님! 부디 체면을!”
줄리앙이 곁에서 잔소리를 하며 참견을 해왔지만, 김선혁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아인스트와는 이런저런 연구를 함께 진행하며 본성을 보일 대로 보인지라 새삼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순수하게 두 번째 광맥의 발견에 기뻐하고 환호했다.
하지만 좋은 일은 나쁜 일과 함께 온다고 했던가. 영지에 좋지 못한 소식을 담은 서신 한 통이 날아왔다.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료 조사와 설정에 매몰되지 말고 글에 집중하라는 조언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언제나 조언과 지적 비판은 환영입니다. 부족한 글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원동력입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챕터는 '기사는 입으로 싸우지 않는다.'입니다. 많은 기대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글에 집중하고, 쓰는 만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연참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3연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껄껄. 추천과 코멘트로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