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55화 (55/305)

<-- 24. 우두머리의 소양 -->

라인펄 영지에 도착한 김선혁을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불과 몇 달 사이에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영지의 모습이었다.

“24연대와 맹스크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공사가 많이 빨라졌습니다.”

마을이 잘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제법 구색을 갖춘 영주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저택은 왕도를 오갈 때 보았던 다른 영주들의 성에는 비할 바 없이 초라했으나, 내내 막사에서 생활했던 그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크고 튼튼해 보였다.

“귀족가의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초라하고 투박하지만, 당장 지내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줄리앙의 은근한 어투가 김선혁이 보기에는 꼭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느껴졌다.

“수고했어. 내가 없는 동안 줄리앙이 열 일 했네.”

“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수고했노라 말했더니, 줄리앙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성을 냈다. 아무래도 이 어린 종자는 자신을 완벽한 성인으로 대해주기를 바란 모양이다.

“기, 기병대의 주둔지도 1차적으로 공사를 끝냈습니다. 기병들의 요구를 따라 최우선적으로 마구간을 먼저 지었고, 숙소는 현재 막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저택의 공사가 끝나는 즉시 저들의 숙소도 공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정색을 하고 설명을 해주는 줄리앙의 말투가 냉랭했다. 하지만 김선혁은 개의치 않았다. 변해버린 영지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비록 마을을 오고 가는 이들의 태반이 24연대와 맹스크에서 지원 나온 보병들이라고 하지만, 처음 보았을 때와 비교하면 마을은 몇 배는 활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뒤늦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게 내 영지...

몸 뉘일 단 몇 평의 공간조차 제 것이 아니었던 삶,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투박하지만 수십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기거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저택의 주인이 되었고, 황량할지언정 광활한 영지 전반에 걸쳐 10여개의 마을, 약 1만여 명에 이르는 영지민을 거느린 영주가 되었다.

출세도 이런 벼락출세가 없었다.

뿌듯함과 감동이 동시에 물밀 듯이 밀려와 김선혁은 한참이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인지 쉬지 않고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던 줄리앙도 이때만큼은 입을 다물고 그가 감정을 추스르기를 기다려주었다.

“가자.”

한참 만에 입을 연 김선혁은 천신만고 끝에 마련한 내 집에 첫발을 내딛는 마음으로 줄리앙을 재촉했다.

“으아아앙. 어, 엄마아아.”

“히이익. 저게 뭐야.”

하지만 설레는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골드레이크 탓에 마을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뭣들 하는가! 영주님 행차시다! 어서 머리를 조아리고 경의를 표하라!”

줄리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소녀의 새된 음성은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의 비명과 소란에 파묻히고 말았다.

소란을 듣고 온 것인지 병사들이 때마침 모습을 드러냈다.

“벼, 병사들이다!”

“저기 몬스터요! 아주 흉악한 놈이오!”

골드레이크는 얌전하게 가만히 있는데, 멋대로 떠들어대는 영주민들의 꼬락서니가 수십의 양민을 잡아먹은 괴수를 대하듯 했다. 황당한 마음에 김선혁이 병사를 바라보니 병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죽여!”

“괴물을 몰아내자!”

병사들 뒤에 숨은 주민들이 온갖 험한 말을 던졌다.

“이 멍청한 양반들아! 영주님께 무슨 망발이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만. 당장 고개 숙이고 엎드려!”

하지만 병사들은 도리어 주민들에게 호통을 쳤다.

“벼, 병사 양반. 저기 괴물이 있...”

“괴물이 아니라 영주님의 드레이크다!”

“라인펄의 새로운 주인께서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걸 모르는 놈도 있더냐!”

당장에라도 무례를 빌미 삼아 창을 내지를 것처럼 살벌하게 소리치는 병사들을 본 주민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보였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괴수 위에 사람이 있음을 깨닫고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여, 영주님!”

“라인펄의 무지렁이들이 영주님을 뵙습니다요.”

뒤늦게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은 주민들이 바닥에 엎드려 몸을 달달 떨어댔다. 하기야 지나가던 귀족에게 무례를 저질러도 손발이 잘려나가는 세상에서 영주를 몰라보고 망발을 떨었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저기 저자와 저자는 감히 영주님께 ‘개상노무새키’라고 욕했고, 저자는 무엄하게도 ‘쳐죽여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직접 영주님께 한 말은 아니고, 드레이크에게 한 말이지만 그것 역시 크나큰 잘못인 것은 분명합니다. 제 영주를 욕보인 자는 3일 밤낮을 매달아 본보기로 삼는 것이 관례입니다.”

앳된 음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냉랭한 어투, 줄리앙의 말에 주민들이 고개를 조아린 채 용서를 빌었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무리 틀어졌다고 하지만 제 조부인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는 가장 말단 병사와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손녀라는 이가 이런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 김선혁은 차라리 황당할 지경이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관례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집행 여부는 온전히 자작님의 의사에 달려있지요.”

괴물을 보고 괴물이라 불렀고, 겁에 질려 병사들에게 되는 대로 말을 던졌을 뿐이다. 그런 걸로 하나하나 치도곤을 내는 건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부터는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그럴 생각 없으니까.”

당장 사람 위에 사람 없고 만인은 평등하다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만인 평등을 기치로 삼은 저쪽 세상에서조차 통하지 않는 말이었고, 하물며 신분의 고하가 엄격한 이곳 세상에서는 더더욱 통하지 않을 말이었다.

저들은 계몽해야 할 대상도 아니었고, 그 스스로도 뼛속까지 깊게 뿌리박힌 계급주의를 타파해야 할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어쩌다 이곳 세상에 내던져진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이곳 세상의 귀족들처럼 평민들을 마소(馬牛) 부리듯 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가자.”

당장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린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기보다는 거북스러움이 더 컸다.

“영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 영주님께서는 무도한 네놈들의 목을 치는 대신 자비를 베푸셨으니, 앞으로 평생토록 오늘의 은혜를 감사하며 봉사하도록 하라!”

병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냥 가려 했더니, 줄리앙이 몸을 돌려 주민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질책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도 이곳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

영주의 저택에 도달한 김선혁은 설레던 마음이 짜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만난 주민들이 보내는 극진한 예에 도리어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다.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영주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영지는 노소간의 예의와 남녀의 유별함마저 그 기준을 잃고 맙니다.”

줄리앙의 말을 전부 납득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정부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딱히 그녀의 말에 반박하거나 토를 달지는 않았다.

“후우.”

다만 뭔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현실에 자꾸만 한숨이 나왔을 뿐이었다.

“미리 고용한 하인들이 인사를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로가 크신 듯 하니 바로 침실로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미안하지만 그 사람들과 인사는 내일 하도록 하지. 오늘은 좀 쉬고 싶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개운해지겠지 싶어, 그는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을 택했다.

“그러실 거 같아서 미리 목욕물을 데워놨습니다. 따뜻한 물에 여독부터 푸시지요.”

“오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김선혁은 환호하며 냉큼 그녀를 따라 저택에 마련된 욕탕으로 향했다.

“뭐하냐?”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를 온욕에 들뜬 그가 허겁지겁 탈의를 하다가 그대로 손을 멈췄다. 한 손에 수건과 작은 바구니를 든 줄리앙이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저는 자작님의 종자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시중드는 게 제 일입니다.”

“불편하니까 나가줄래? 혼자 씻지도 못할 정도로 모질이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줄리앙을 내쫓고 신이 나서 욕조에 몸을 담궜다.

“으다다닷. 좋다아아!”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온기와 나른함이 좋아 그는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고민들을 전부 잊고 말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입욕을 즐기기를 얼마나 즐겼을까. 누군가가 드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욕실에 들어섰다. 반사적으로 욕조 안으로 몸을 더 깊게 파묻은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뭐라고 했...”

“영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님의 목욕 시중을 맡은 마리라고 합니다.”

당연히 줄리앙일 거라 생각했던 김선혁은 성숙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오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삐걱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여인이 욕조 옆에 무릎을 꿇고 탕의 온도를 재고 있었다.

“조금 물이 식은 감이 있는데, 몸이 차지는 않으신지요. 뜨거운 물을 조금 더 부을까요?”

손으로 몇 번 욕조를 휘젓던 여인, 마리가 몸을 일으켰다. 그새 수증기에 젖어 들러붙은 옷 탓에 여인의 뒤태가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김선혁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떡 삼키고 말았다.

**

목욕은 어떻게 끝이 나는지도 모르고 끝이 났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리의 손에 이끌려 옷까지 갈아입고 난 뒤였다.

“목욕은 즐거우셨는지요.”

어떻게 알았는지 때를 맞춰 나타난 줄리앙이 그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질문이 꽤나 모호해 김선혁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럼 침소까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는 이만 돌아가도 좋다.”

“그럼 평안함 밤이 되시기를.”

줄리앙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마리를 돌려보내고 먼저 앞장을 섰다.

“아쉬우십니까. 혹시 침실 시중까지 필요하신 겁니까?”

“어린 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열네살 소녀가 하기에는 부적절한 발언이라 그가 인상을 찌푸리니, 줄리앙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저도 알 건 다 압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전문 시종이지, 함부로 몸 막 굴리는 하녀가 아닙니다.”

이곳 세상의 하녀와 시녀는 명백하게 의미가 달랐다. 전자가 말 그대로 하인이라면, 시녀와 시종은 꽤나 엄격한 교육을 받은 일종의 전문직이었다. 그 사실을 미리 들어 알고 있던 김선혁은 진땀을 흘렸다.

그도 사내인지라 목욕 시중을 드는 마리를 보고 망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족과 하녀, 남자라면 한 번쯤은 상상해본 일이 아니든가.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는 망상을 실행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만약 했다면 꽤나 망신살이 뻗쳤으리라.

“그럼 좋은 밤 되시기를.”

**

설레는 마음에 잠이 오지 않을 거란 생각과는 달리 김선혁은 말 그대로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그는 다음날 그 어느 때보다 몸이 가벼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오늘은 혼자 가도록 하지. 내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야.”

날이 밝기가 무섭게 찾아온 줄리앙을 뿌리치고 김선혁은 골드레이크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곧장 전날 지기의 흐름을 느꼈던 곳을 향해 달려갔다.

[지맥(地脈)을 발견했습니다.]

[지맥의 풍부한 지기(地氣)는 드레이크에게 더 없이 풍부하고 좋은 영양소입니다.]

[골드레이크가 식사를 시작합니다.]

[속성 지배력(地)이 1 상승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골드레이크가 알아서 찾아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제 주인도 잊고 허겁지겁 지기를 먹어치우는 골드레이크를 보며 김선혁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속성 지배력(地)이 1 상승했습니다.]

“전보다는 조금 느리네. 터가 그런 건가, 아니면 지배력이 올라가서 그런 건가.”

한참의 텀을 두고 느릿느릿 올라가는 속성 지배력, 하지만 느릴지언정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투자하고 나니, 40에 불과했던 지 속성 지배력이 50에 도달했다.

[속성 지배력이 40에서 50으로 상승했습니다.]

[기존 속성의 특수 효과가 소폭 상승하고 뼈의 강도와 피부의 탄성이 강해졌습니다.]

언제나처럼 일정치에 도달한 속성 지배력을 통해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메시지를 따라 팔뚝의 피부를 당겨보고 다시 또 꼬집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변화가 체감될 정도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크게 달라진 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뼈를 부러트려 강도를 시험해볼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수치가 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이곳의 지맥도 흡수가 끝난 모양이었다. 그는 적당히 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일어나는 김선혁의 표정에 희한하게도 일말의 아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또 다른 지맥(地脈)이 근처에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드레이크를 살찌울 지맥이 지천에 널려있었던 것이다.

**

영지로 돌아온 김선혁은 적당히 주민들이 없는 틈을 타 저택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골드레이크를 다른 곳에 풀어둘까도 생각했지만, 혹시 또 변화가 있을지 몰라 저택에 마련된 전용 처소에 데려다 놓았다.

역시나 골드레이크는 포만감을 만끽하며 잠에 빠져들었고, 깨워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골드레이크가 다시 허물을 벗을지, 그도 아니면 그저 포만감에 자고 있는 것뿐인지는 몰랐지만 전보다 골드레이크의 비늘이 한층 더 보기 좋아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만약 이번에 또 한 번 성장을 이룬다면, 드레이크라는 족속들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괴물이라는 뜻이었다. 참으로 키울 맛이 나는 탈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ㅜㅜ 글에 나오지도 않을 중세 마을 규모와 형태를 조사하다보니, 이렇게 늦어버렸습니다. 내일부터는 재깍 정시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원고 마감이 너무 늦어버린 탓에 아직도 투표 집계 못했습니다. 내일 자정에는 꼭 집계하여 추첨자와 함께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 화약 무기에 대한 댓글을 봤습니다. 의아한 점이 있으시더라도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차후에 납득이 갈만한 전개를 통해 화약무기에 대해 언급토록 하겠습니다. 나올지 안나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만 알고 있습죠.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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