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지기(地氣)의 올바른 활용법 -->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왕도행이 드디어 끝이 났다. 김선혁은 기나긴 행군 끝에 마침내 24연대의 주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역시 집이 최고야.”
왕도에서 제공되었던 질 좋은 침대도 부드러운 양탄자도 없다. 머리맡의 밧줄만 잡아당기면 재깍 달려오는 시종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열 개 남짓한 싸구려 야전 침상, 그리고 끕끕한 냄새 나는 모포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비로소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왕도 쪽으로 오줌도 안 눈다. 툇!”
“에이, 녹테인 놈들보다 더한 왕도 놈들!”
누군가는 왕도의 주점에서 바가지를 썼던 기억 때문에, 누군가는 온갖 이해관계에 휘둘렸던 스트레스 때문에. 이유는 다 달랐지만 왕도행이 그다지 달가운 기억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새끼들아. 당장 나가서 먼지부터 털고 들어와!”
뒤늦게 막사에 들어선 클라크가 풀풀 날리는 흙먼지를 보고는 버럭 소리를 쳤다. 하지만 사내들은 헤어졌다가 10년 만에 만난 애인이라도 되는 양 베개를 끌어안고는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침대에서 기어 나온 것은 거의 해질녘이 되어서였다. 그들은 먼지 가득한 코트를 벗어던지고는 왕실에서 이번에 따로 하사한 드레이크 기병대의 신형 코트를 꺼내 걸쳤다.
국경 기병대에게만 허락된 블루 코트보다 한층 더 짙은 빛깔의 진남색 코트는 한쪽 어깨에 24라는 넘버링 대신에 노란 색의 드레이크 엠블럼이 새겨져 있었다. 재질도 기존의 코트보다 몇 배는 고급스러워 마치 어딘가의 이름 있는 기사단의 제복처럼 보일 정도였다.
“가자.”
잔뜩 흐트러져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깔끔한 모습, 기병들은 클라크의 말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지막 정돈을 하고는 막사를 나섰다.
평소의 불량스러움은 저 멀리 날려버리고 정예 기병대 다운 기세와 눈빛을 한 기병들이 마치 전장에라도 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복장을 바로 하고 거창하게 나선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주둔지를 한 바퀴 돈 게 전부였다.
“오오! 드레이크 기병대!”
“사스테인 슬레이어!”
“제복도 새로 맞췄나 본데?”
오고 가던 병사들이 그들을 보고 환호했고, 때로는 수군거리기도 했다. 기병대원들은 표 나지 않게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들의 환호와 대화를 엿들었다. 그리고는 한층 더 거만한 표정으로 주둔지를 한 바퀴 더 돌았다.
“봤냐? 땅개 새끼들 완전 눈 이만해진 거?”
“크. 진짜 기분 째지는구만!”
황당하게도 그들이 이리도 법석을 떤 것은 새로 맞춘 제복을 자랑하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용건도 없이 주둔지를 돌았을 리도 없었고, 지금에 와서 이렇듯 보병들의 반응을 주워섬기며 신이 나서 떠들어댈 이유가 없었다.
한참을 더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들은 코트를 벗어 정성스럽게 막사 한 켠에 걸어두었다. 그리고도 뭐가 부족한지 한참이나 뿌듯한 얼굴로 코트를 바라보았다.
**
귀환의 기쁨은 불과 채 하루가 가지 않았다. 정식으로 부대명을 인가받았다는 뿌듯함도 딱 그만큼이었다.
“아. 심심해.”
“좀이 쑤셔서 죽겠다.”
기병대의 이름이 드레이크가 되었고, 기존의 대원들이 전원 준기사 작위를 받았다는 건 그들의 일상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24연대 소속의 기병대원들이었을 뿐이고, 주둔지의 일상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일정했다.
어쩌면 번잡했던 왕도에서의 시간이 유독 일상을 지루하게 만든 것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홀로 바쁜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김선혁이었다.
“또 나가냐?”
“넵.”
슬며시 막사를 나가는 그를 보며 기병대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당히 괴롭혀라.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너무 그러는 거 아니다.”
“이건 괴롭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새끼야. 과부 제조기한테 그렇게 했으면, 진즉에 도망쳤어. 어디 기병이란 놈이 제 파트너 아낄 줄을 몰라.”
“맞아. 그 정도면 많이 고분고분해졌던데 이제 좀 챙겨줘라.”
사정 모르는 기병대원들이 골드레이크를 괴롭히는 그를 타박했다. 그게 이제는 드레이크 기병대의 상징이 되어버린 괴수를 염려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정말로 불쌍했든지 간에 그로서는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자신의 행동이 동물학대에 가까운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풍 속성을 통해 놀라운 성장을 이룬 김선혁은 지 속성 지배력의 성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의 질타를 뒤로 하고 언제나처럼 골드레이크를 찾았다.
움찔.
한가롭게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던 골드레이크가 슬며시 눈을 떴다가 제 주인을 발견하고는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스레 동료들의 말이 떠올라 입맛이 썼다.
“가자. 뭘 하든 간에 밥부터 먹자.”
복종도가 100에 오른 골드레이크는 주춤거리면서도 그에게 등을 내주었다.
“어? 선혁아.”
“오랜만이에요. 정태형.”
주둔지를 벗어나는 도중에 낯익은 얼굴이 보여 잠시 걸음을 늦췄더니, 강정태가 바로 알은 체를 해왔다.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제야 얼굴을 보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첫 실전의 후유증으로 말이 아니던 강정태의 얼굴이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는 그 태도가 일전의 그 강정태가 맞나 싶을 정도로 깊이가 있어 보였다.
“네. 정신이 없어서, 먼저 못 찾아가봤어요. 미안해요.”
“아냐. 너도 바쁠 텐데. 아, 이제 이렇게 말 하면 안 되나? 자작위를 받았다지? 그리고 기사 서임도 받고.”
더 이상 열등감도 질시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가 도리어 낯설 지경이었다.
“됐어요. 우리끼린데 뭐.”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대화가 뚝 끊어졌다. 소원해질 대로 소원해진 상태에서 대화도 없이 한참만에 재회한 것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의지하고 꽤나 친근했는데 불과 몇 달이 채 가지 않아 이렇게 변해버린 관계에 마음이 복잡했다.
“형. 저 가볼게요.”
“그래. 또 보자. 그리고 니 드레이크 멋있다.”
큰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어색한 단어의 나열, 김선혁은 드레이크의 머리를 돌렸다.
“선혁아.”
그런데 그렇게 돌아선 그를 강정태가 다시 붙잡았다.
“너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우리 세계가 그립지 않냐고!”
차분하던 어투는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었을까. 잔뜩 격앙된 강정태의 음성에 그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입맛이 썼다. 현실을 마주하고 그리던 장밋빛 미래를 버린 강정태가 오히려 과거로 퇴보해버렸다. 준비 없이 현실의 차가움과 맞닥뜨린 가엾은 사내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더 이상 강정태에게 공감할 수도, 동질감을 느낄 수도 없었다.
저들과 다르게 자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되었으니까.
“선혁아! 너 이제 귀족이잖아! 우리 좀 도와줘! 어? 그럴 힘도 능력도 있잖아. 이제!”
완전히 무너져버린 강정태의 울먹임을 들으며 그는 골드레이크를 출발시켰다.
“우리 좀 이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
강정태와 마주친 탓에 기분이 가라앉은 김선혁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골드레이크가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주춤주춤 다가왔을 때도 그는 멍한 얼굴로 있었을 뿐이다.
“아? 다 먹었어? 가자.”
뒤늦게 골드레이크를 발견한 그가 안장 위에 올라탔다.
“오늘은 그냥 좀 달려보자.”
김선혁은 오늘만큼은 속성 지배력이니 모두 잊고 그냥 시원하게 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별다른 주문 없이 그저 내달리는 드레이크의 등위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후우. 나도 기병 다 됐네. 좀 달렸다고 풀리는 걸 보면.”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보니 복잡하던 머리가 많이 비워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드라이브(?)를 하는 모양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린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음?”
그런데 너무 생각이 없었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주둔지 근방이라면 나름 빠삭하다 생각했는데, 눈앞의 평원과 야트막한 구릉은 그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곳이었다.
“너, 대체 어디로 온 거냐.”
고삐를 잡아챘지만, 골드레이크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자. 지금이라도 돌아가야지, 이러다 진짜 길 잃겠다.”
하지만 골드레이크는 여전히 그의 말을 무시했다. 복종도가 100에 오른 이후로 골드레이크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명령을 무시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마. 그간 너무 괴롭혀서 삐졌냐? 앞으로 살살 할 테니까...”
적당히 달래도 보고 으름장을 놓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구릉을 향해 나아가는 골드레이크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
그런데 그 이유가 있었다. 골드레이크는 그간의 학대에 화가 나 반항을 한 것도, 그렇다고 생각없이 나아간 것도 아니었다.
“이게 대체...”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감각이 온몸을 간지럽혔다. 마치 풍 속성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그날과도 같았다. 하지만 풍 속성은 아니었다. 부드럽고 상쾌한, 그리고 가벼운 느낌의 풍 속성과는 달리 지금 온몸에 전해져 오는 기묘한 감각은 한층 더 무겁고 투박했다.
“지 속성?”
달리 다른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바람이 아니면 땅, 그가 인지할 수 있는 속성의 기운은 단 둘뿐이었고, 그중 바람은 아닌 게 확실했다.
크르르릉.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골드레이크가 목을 울려댔다.
“너 지금 기운을 느끼고 따라온 거야?”
이번에는 골드레이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걸음을 빨리 해 구릉 위에 올라섰을 뿐이다.
“엇.”
그때 갑자기 드레이크가 땅에 드러누웠다. 하마터면 육중한 몸뚱이에 깔릴 뻔 한 그가 깜짝 놀라 안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
제 주인도 떨궈내고는 바닥에 몸을 부비적거리는 드레이크의 행태가 하도 가관이라 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갑작스레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들려왔다.
[지맥(地脈)을 발견했습니다.]
[지맥의 풍부한 지기(地氣)는 드레이크에게 더 없이 풍부하고 좋은 영양소입니다.]
[벽에 도달했던 속성 지배력의 성장이 다시 가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속성 지배력(地)이 1 상승했습니다.]
[속성 지배력(地)이 1 상승했습니다.]
[속성 지배력(地)이 1 상승했습니다.]
지맥은 뭐고 지기는 또 뭐란 말인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무섭게 성장한 속성 지배력이 단숨에 30에 도달했다.
[속성 지배력(地)이 1 상승했습니다.]
[속성 지배력(地)이 1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메시지는 끝이 나지 않았고, 30을 넘어선 속성 지배력이 어느새 40에 임박했다. 그리고 40이 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성장이 멈췄다.
[지 속성 지배력이 22에서 단번에 40으로 성장했습니다.]
[지 속성 지배력의 상승으로 임의로 속성의 기운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특정 무기술에 속성이 적용됩니다.]
[임의로 무기에 속성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어구가 조금 더 단단해집니다.]
메시지가 끝이 날 때 즈음 바닥에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던 골드레이크가 벌떡 일어났다.
꺼억.
그런데 그렇게 일어난 골드레이크가 마치 배가 부르다는 듯이 트림을 하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김선혁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보았다.
□ 테이밍 드래곤 목록
-드레이크(地) / 복종도 100
: 상태 ? 포만감, 행복, 만족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정말로 드레이크는 포만감을 느끼고 있었다. 커다란 소 한 마리, 집채만한 몬스터로도 채우지 못했던 허기가 드디어 해결이 된 것이다.
허탈했다. 지기(地氣)가 주식인줄도 모르고 간식만 주구장창 먹여댄 꼴이었으니, 배가 찰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김선혁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끄어어억.
그 속도 모르고 골드레이크는 행복에 겨운 트림만 연이어 해댔을 뿐이다.
========== 작품 후기 ==========
정오에 올렸어야 했던 연참본입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올립니다. 자정에 한 편 또 올리겠습니다.
지구의 독자분들이여 글쟁이에게 추천과 코멘트로 부디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