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지기(地氣)의 올바른 활용법 -->
불과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을 왕도에 머물렀을 뿐인데,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왕도에서 서부 국경으로 향하는 동안 김선혁은 그 사실을 더없이 실감했다.
“아. 좋다.”
왕실의 하사품들을 가득 실은 수레 위에 올라가 늘어져 있는데도 누구 하나 눈치를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저쪽 세상에서 말년 병장으로 지낼 때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과연 이게 바로 자작의 위엄.
김선혁은 묘한 구석에서 귀족의 특혜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하기에는 일렀으니, 저쪽 세상에 행보관이 있었다면 이쪽 세상에는 사령관과 프레드릭 중대장이 있었다.
“이제 작위도 받았으니, 조금 더 체면에 신경을 쓰도록 하게.”
상급 기사에 올라 변경의 영주에 준하는 권위를 지닌 중대장의 말을 무시하기에는 그가 먹은 짬밥이 아직 한참은 부족했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전에는 그렇지 않던 사람이 작위를 얻었다고 너무 풀어진 게 아닌가.”
훈련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김선혁이 이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이자 프레드릭 중대장은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중대장의 평가는 저 혼자 내린 것이었으니, 애초에 김선혁은 말년 병장의 한가로움을 즐기던 한량이었다.
그런 그가 훈련에 열을 올리고, 더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당장의 생존과 필요에 직결되는 문제들이라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을 뿐이다. 그게 다른 이들 눈에는 아마도 더없이 훌륭한 노력가의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그는 언제나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으니 지금이라고 해서 딱히 본성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귀족이 되었고, 먹고 살기 충분한 재화를 얻었다. 물론 끔찍할 정도로 먹성이 좋은 드레이크를 키워야 했던 터라 그 재화가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령관이 약속한 봉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궁리하고 저리 궁리해 보아도,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충분히 늘어져 있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끄응. 사람이 갑자기 영 못 쓰게...”
그러한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프레드릭은 도무지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사냥 다녀오겠습니다!”
행군중인 부대가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드레이크의 먹성 탓에 평소에도 수시로 대열을 이탈하고는 했던 김선혁이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귀찮은 잔소리를 피해 도망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프레드릭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인지, 뒤뚱뒤뚱 거리며 사라지는 드레이크의 뒷모습을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버려두게. 변방에 내몰린 이방인들이 모두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저리 쉬어두는 게 꼭 나쁜 것도 아닐세.”
“하지만 사령관님도 아시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한 번 풀어지면 다시 다잡기까지 얼마나 지난한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꼭 자네와 같이 위만 보고 사는 것은 아니네. 그걸 타인이 강요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라네.”
사령관은 모든 것은 순리대로 될 거라며, 덤덤한 말투로 프레드릭을 달래주었다.
**
그 시각 김선혁은 중대장과 사령관이 제 얘기를 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골디! 잡아!”
왕녀가 선물해준 전용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외치니, 드레이크가 쾅쾅거리며 땅을 박차고는 저 멀리 보이는 멧돼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끠이이이이이.
구슬픈 돼지의 비명소리와 드레이크의 포효, 하지만 그마저도 이내 잦아들고 이따금씩 뼈 부스러지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들려왔다.
“끙.”
가만히 지켜보기에는 과히 보기가 좋지 않은 장면이라 김선혁은 고개를 돌리며 풀썩, 마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곧장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는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어차피 사냥에 걸리는 시간은 대중이 없으니, 복귀가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좋다.
복종도가 100에 도달한 드레이크는 이제 식탐만 제외하면 완전한 통제 아래 있었다. 도망갈 걱정도 혹시라도 사고를 칠까 마음 졸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적당한 사냥감을 찾아 풀어주면 곧잘 나서 제 배를 채우니 마음이 보채는 아이 젖먹이듯 했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한가롭고, 여유롭다. 그리고 평화롭다.
이계에 온 뒤로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한 때를 보냈던 적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마음이 평안했다.
그렇게 평화를 만끽하고 있자니 고향 생각이 났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저쪽 세상의 모습은 선명하지도 생생하지도 않았다. 마치 빛 잔뜩 바래 형태가 흐릿한 사진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 그리움조차도 막연하기만 했다.
아마도 이제야 이쪽 세상에 완전히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한 때는 이곳에서의 삶을 악몽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저쪽 세상에서의 삶이 아련한 꿈이 되어버렸다.
모호한 현실감에 손을 뻗어 허공을 잡을 듯 움켜쥐는데, 그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주인님.’
해맑게 웃으며 두 손으로 제 주인의 손을 소중한 듯이 움켜쥐는 아티야의 모습에 그는 미소 지었다.
까짓 거,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살아보자.
넉넉한 마음으로 아티야의 애교를 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식사를 마친 골드레이크가 쾅쾅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김선혁이 다시 대열에 복귀한 것은 거의 초저녁이 되어서였다. 이제 막 야영준비를 시작한 병사들 사이로 슬쩍 끼어드니, 병사들이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막사를 고정할 말뚝에 망치질을 하고 배수로를 까는 병사들을 보던 김선혁은 문득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거기 삽 좀 줘 봐요.”
“네? 삽은 갑자기 왜.”
영문을 몰라 눈을 멀뚱거리는 병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왜기는요. 오랜만에 삽질 좀 해보려고 하지.”
병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선선히 제 삽을 내어주었다.
“툇.”
불량스럽게 양손을 비빈 그가 삽을 힘차게 쥐고는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보여주었던 극한의 노동력을 다시 한 번 선보였다.
“어. 이제 그만 하셔도...”
처음에는 분명 배수구를 깔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목적이 불분명해졌다. 흙을 퍼내기는 하는데 방향이 중구난방이었다. 방금 전에 파낸 배수로를 다시 덮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 되돌아와 다시 또 같은 곳을 파내기도 했다.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병사들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저리 삽질을 잘 하는 기병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그 기병이 마치 삽질 성애자라도 되는 것처럼 무아지경 상태로 작업에 몰입했다는 사실에 황당할 지경이었다.
“아오! 왜 안 되냐고!”
한참 삽질에 열을 올리던 김선혁이 버럭 짜증을 부렸다. 아무리 삽을 퍼내고 흙을 뒤집어써도 도무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地) 속성 지배력 탓에 신경질이 난 것이다.
그렇게 분노를 담아 삽질을 하다 보니 배수로가 아닌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마치 진지 내에 함정이라도 파둔 듯한 모습이었다.
“하. 미안하게 됐습니다. 도로 원상복구 해둘 게요.”
뒤늦게 자신이 온 야영지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선혁이 가장 깊고 크게 파인 구덩이 앞에 삽을 들고 섰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야밤에 순찰도는 경계병이 빠져 낭패를 볼 테니,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진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풀어두었던 골드레이크가 쿵쾅거리며 달려왔다.
“어? 어?”
오고 가는 길에 지겹도록 본 골드레이크라 사실 병사들이 놀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듯 어둠 속에서 화등잔만한 눈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골드레이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골드레이크는 밤이 되면 늘 야영지 밖에 머물며 안쪽으로 들어오는 일이 없었으니까.
과연 드레이크는 몬스터 중의 몬스터였다. 새파란 안광을 흘리며 접근하는 드레이크의 모습은 낮에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세가 있었고,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넌 또 왜.”
어쩌면 흙과 모래를 만지는 것으로 지 속성 지배력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생각이 빗나가 버린 터라 멋대로 야영지에 난입한 드레이크를 보는 김선혁의 시선은 영 곱지 못했다.
크르릉.
골드레이크는 그의 힐책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로 쿵쾅거리며 다가와 김선혁이 파둔 구덩이 안에 몸을 묻었다.
그르르르르.
그리고는 몹시도 기분 좋게 목을 그르렁거렸다. 골드레이크의 테이밍에 성공하고 난 뒤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만족스러운 모습이라 김선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성 지배력(地)이 1 만큼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그토록이나 간절히 듣기를 원했던 메시지가 들려왔다.
“어, 설마? 내가 아니었어?”
풍 속성을 그렇게 얻었듯이 으레 지 속성 지배력도 같은 방식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흙을 파내도 보고 만져도 보았다. 심지어 흙바닥을 구르고 남몰래 흙과 모래를 먹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지배력을 상승시킬 수는 없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속성 지배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주체는 그가 아닌 드레이크였던 것이다.
[속성 지배력(地)이 1 만큼 상승했습니다.]
마치 어미 품에 안긴 새끼 새처럼 골드레이크가 땅밑 구덩이에서 몸을 부비거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 사이에도 속성 지배력이 상승했다는 메시지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
골드레이크를 내버려두고 온 야영지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친 사고를 수습했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속성 지배력이 상승했다는 메시지는 들려왔고, 고작 4에 불과했던 지배력은 이제 15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지배력의 성장은 그가 야영지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구덩이를 모두 수습할 즈음에는 끝이 났고,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고, 김선혁은 야영이 시작될 즈음에 맞춰서 진지에서 조금은 떨어진 곳에 구덩이를 파고 드레이크를 밀어넣었다.
[속성 지배력(地)이 1 만큼 상승했습니다.]
전날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성장, 밤이 다 가도록 고작 2의 지배력이 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19까지 오른 지배력은 완전히 성장을 멈춰버렸다.
“또 다른 계기가 필요한 건가.”
풍 속성 역시 그러했던 것처럼, 지 속성 역시 일정 수치마다 성장이 느려지고 빨라지는 구간이 있었다.
“뭐, 아무렴 어때.”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더욱 더 가열 차게 지배력을 성장시킬 방법을 찾으면 되었다.
물론 그 실험의 과정에서 고생할 건 그가 아니라 골드레이크였다.
**
김선혁은 골드레이크를 마구 굴려댔다. 때로는 구덩이를 파고 골드레이크를 밀어넣고, 다시 또 그 위로 흙을 덮기도 했다. 처음에는 얌전히 있던 골드레이크도 제 턱끝까지 흙이 차오르자 기겁을 하고는 난동을 피웠다.
소득은 아주 미미했다.
거의 생매장 수준이 되어서야 지배력이 찔끔 올랐다. 그리고 그마저도 처음의 시도에서 오른 수치였을 뿐,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더 오르지 않았다.
김선혁은 다시 방법을 찾았다. 그 중에는 음식 사이에 흙과 모래, 또는 돌조각 따위를 넣는 식의 무식한 방법도 있었다. 골드레이크는 복종도가 100에 오른 뒤로 처음으로 반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끝이 없었으니, 주둔지로 복귀하는 길 내내 골드레이크는 고통 받았다.
========== 작품 후기 ==========
*유료화를 간 순간부터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작가는 외출과 일상을 포기합니다. 하루 2연참을 하려면, 하루의 절반을 글을 쓰고 나머지 절반의 반을 쪼개 플롯을 다잡고 이미 올린 글을 되짚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절반의 반에 해당하는 6시간동안 잠도 자고 밥도 먹어야 합죠.
이런 극악의 상황에서 글쟁이가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독자분들의 추천과 코멘트등의 질 좋은 단백질들뿐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어서 상질의 단백질을 주십시오. 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