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골드레이크 -->
드디어 고대하고 기대하던 왕도를 떠날 날이 임박해 왔다. 전공에 대한 포상도 이미 챙겼고, 국왕이 추가로 약속했던 적지 않은 재화도 이미 시종관을 통해 수령한 상태였다.
남은 것은 국왕이 들어주기로 약속했던 ‘소원’ 하나뿐이었다.
“저와 겨루어 주십시오.”
김선혁의 난데없는 말에 레인하르트 후작은 얼빠진 얼굴을 해보였다.
“폐하께서 이미 약조했던 바이니 레인하르트 경은 드라흔 자작의 청을 거절치 말라.”
드레이크의 이름을 지어준 뒤로 부쩍 왕래가 빈번해진 왕녀가 나서 이 모든 것이 국왕의 약속으로 보증된 일이라 설명을 해주었다.
“애송이가 겁을 상실했군.”
마뜩찮은 표정으로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감히 너 따위가 나에게 덤빌 깜냥이나 있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딱 세 번의 공격을 양보해주십시오.”
“그 또한 폐하께서 약조했던 바다.”
레인하르트 후작은 내키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차마 제 입으로 국왕의 약조를 깰 생각은 없었는지 김선혁의 해괴한 제안을 모조리 수용해주었다.
“저는 기병이니 기승한 채로 후작과 겨루겠습니다.”
“원하는 것도 엄청 많은 놈이로다. 멋대로 하라.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니.”
강자의 여유가 고스란히 드러난 대답,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김선혁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에 올라탔다.
“그래도 기개는 있는 놈이렸다. 하찮은 미물의 힘을 믿고 덤볐다면, 당장 다리몽둥이부터 부러트려놓았을 것이다.”
후작은 그가 드레이크 대신 평범한 전마에 오르자 그게 의외였는지 칭찬인지 으름장인지 모를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건대, 폐하께서는 이 대련의 결과가 어찌 되든, 그 어떤 경우에도 앙갚음은 없을 거라 보증하셨습니다.”
“고양이 쥐 생각하는구나. 네놈이나 나중에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후작은 코웃음을 쳤고, 김선혁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전마 위에 올라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놈 말 참 많구나.”
퉁명스러운 음성에 투구의 안면가리개를 내린 김선혁이 기병용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돌격 자세를 취했다.
“이랴!”
기합과 함께 말허리를 걷어찬 그가 순식간에 후작을 향해 짓쳐들었다.
“윈드 피어싱.”
그 어떤 위협도 없이 그러모은 속성의 힘은 그만큼 강력하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과연 레인하르트 후작은 왕가의 안위를 책일 질 정도의 강자였고, 찬란한 검광을 피워올리는 것으로 그의 공역을 완전히 무산시켰다.
“두 번 남았다. 애송아.”
“끄응. 다시 갑니다.”
한참이나 간격을 벌린 김선혁은 다시 한 번 말을 힘차게 내달리며, 속성의 힘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창끝에 어느정도 기운이 모이자 작게 읊조리며 윈드 피어싱 스킬 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속성의 힘은 여전히 후작의 검광을 넘지 못했으며,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검광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한 번 남았다.”
단 두 번의 격돌로 김선혁의 힘을 완전히 가늠했는지 후작은 여유가 만만했다. 하기야 왕국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검호인 후작이, 고작해야 선임 기사 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의 공격을 두려워 하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윈드 피어싱.”
김선혁의 작은 속삭임에 또다시 창날 앞으로 소용돌이와도 같은 광풍이 들러붙었다. 후작이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을 해보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는 미련할 정도로 방금 전의 실패를 답습하고 있었으니까. 멍청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아티야.”
‘맡겨 주세요!’
요란스럽게 일어난 후작의 검광과 속성의 기운이 닿기 직전, 김선혁은 은밀하게 소환해두었던 아티야를 창날에 휘감았다. 언젠가 녹테인의 상급 기사와 충돌했었던 그 당시처럼 아티야는 제 몸을 던져 바람의 힘을 잔뜩 창끝에 모아주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무지막지하게 불어난 속성의 기운, 김선혁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풍아.”
그는 지난 두 번의 공격을 시도할 동안 단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던 비장의 힘을 꺼내들었다.
크아아아앙.
풍아 특유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전의 공격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광풍이 후작을 향해 짓쳐들었다. 후작은 갑작스레 변해버린 그의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또 다시 검광이 사방으로 솟구쳐 광풍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광풍도 쉽게 흩어지지 않았고, 끈질기게 들러붙어 쉴 새 없이 검광 너머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무언가 찢겨져 나가는 듯한 소음이 주변을 때려댔다. 그리고 뽀얗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방을 집어 삼켰다.
하. 이게 안 통하네.
얼핏 보기에는 후작이 김선혁의 공격에 당한 것은 아닐까, 싶은 광경이었지만 그는 스스로의 공격이 이번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창끝을 휘저어댄 덕에 운 좋게 검광을 뚫고 들어간 기운이 있었다. 비록 몇 가닥 되지 않는 바람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후작의 옷자락을 찢고 머리를 봉두난발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네 이놈!”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방심의 대가로 엉망진창의 꼴이 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던 후작은 완전히 대노한 얼굴이었다.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꽉 움켜쥔 검에 순식간에 살벌한 기운이 마구 모여들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성난 후작의 검무에 난도질을 당할 상황, 하지만 김선혁은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상황에 맞지 않게 여유가 있었다.
“졌습니다.”
“뭐, 뭐?”
“패배를 인정합니다. 저 같은 하찮은 이에게 드높은 검력을 경험신 후작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지금 뭐라고 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후작이 발작적으로 뛰쳐나가려는데, 왕녀가 후작을 말리고 나섰다.
“폐하는 드라흔 자작과도 같은 인재가 상하지 않기를 바라셨고, 혹시라도 힘에 부치거들랑 언제든 패배를 인정하고 대련을 멈출 수 있도록 배려하셨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왕녀의 말에 후작이 얼빠진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경험 많은 검호 답게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검은 머리의 이방인, 하지만 입가에 매달린 미미한 미소는 분명 후련함을 담고 있었다. 그 미묘한 감정의 편린을 발견한 순간, 후작은 상대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노렸음을 깨달았다.
‘선의(善意)에는 신의(信義)로, 악의(惡意)에는 정의(正意)로.’
그리고 그가 기사의 신념으로 무엇을 맹세했는지를 떠올렸다. 서임식 도중에는 좋게 포장이 되었다지만, 결국 뜻은 간단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받은 대로 되갚아주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김선혁은 자신의 신념을 철저하게 솔선수범해 보였다.
**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왕도에 온 뒤로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다. 멋대로 휘두르고 이용하려고만 했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헤아려주는 이는 없었다. 그게 왕도에 머무르는 동안 내내 스트레스로 작용했고, 홧병이 날 지경이었다.
‘말하라.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겠다.’
그러던 차에 국왕이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공언을 했다. 그 말을 드는 순간 김선혁은 눈앞에서 별이 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소원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는 건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국왕이 합리적인 성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도 이런 식의 은혜를 받는 것은 영 찝찝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 스스로가 이런 소원을 들어주는 정도로는 체면이 살지 않는다고 여길 정도로 하찮은 소원을 빌었다.
그게 바로 후작과의 ‘안전한’ 대련이었다.
멋대로 자신을 압박한 후작에 대한 소심한 복수, 그리고 더 나아가 왕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진짜 초인을 통해 자신의 힘이 얼마나 통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결과는 반쪽의 성공이었다. 후작에 대한 복수는 성공했으나, 스스로의 힘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후련하면서도 속이 마냥 편치만은 않은 이유였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 Level. 7
□ 용기병(Dragon Rider)
□ 고유 속성
-풍(風) / 속성 지배력 99
:풍아(風牙)
:풍신(風身)
:풍령(風靈)
-지(地) / 속성 지배력 4
□ 계약 정령
-하급 바람의 정령(아티야)
□ 테이밍 드래곤 목록
-드레이크(골드레이크)(地) / 복종도 100
: 상태 ? 허기, 경계, 불편
□ 근력 29 / 지구력 28 / 민첩성 31 / 마법 저항력 37
□ 보유 스킬
...
김선혁은 고유 속성란에 추가된 지(地)라는 문구에 주목했다. 게다가 물음표로 표기되어 있었던 드레이크 옆의 괄호 역시 똑같은 지 속성이 추가되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또 하나 발견한 것이다.
이 모든 건 왕녀 오필리아의 덕이었다. 그날 그녀가 골드레이크라는 끔찍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면, 그는 앞으로도 한참동안이나 복종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계기를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야 했을 것이다.
귀찮은 꼬맹이긴 하지만, 신세를 진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말을 타고 달리고, 손안의 바람을 느끼는 것으로 성장이 가능했던 풍 속성과는 달리 지 속성은 좀처럼 성장시킬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끙. 어디 흙이라도 파고 기어들어가 봐야 하나.”
바람을 그렇게 얻었듯이 땅의 기운 역시 제 몸을 내던지고 나서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싶어, 그는 주둔지로 돌아가는 대로 당장 지 속성부터 지배력을 올려보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
드디어 왕도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챙기던 김선혁은 또다시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꼬맹이 왕녀 오필리아였다.
“골드레이크는 아직 변변찮은 안장과 갑주도 없다고 들었노라. 기병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데 행여나 상할까 걱정이 되어 만든 것이니 부디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라.”
이때만큼은 왕녀는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록 그 딱딱한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당장에라도 마갑을 흉내낸 드레이크의 갑주와 안장을 씌워주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투구에는 멋드러진 금빛 뿔이, 가슴과 사지를 감싸는 갑옷에는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물결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런 고급스러운 철갑을 둘러주고 나니 드레이크의 모습이 한층 더 강인해 보였다.
“오오. 과연. 장인의 솜씨로다. 시일을 맞추느라 다소 보채었던지라 혹시라도 하자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과연 장인은 장인이로다.”
사실은 단단한 드레이크의 비늘보다 더 좋은 갑옷은 없지만, 아이처럼 좋아하는 왕녀를 보니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부디 다시 볼 때까지 강녕하기를 바란다. 용맹무비한 골드레이크여.”
쉽사리 드레이크를 두고 돌아서지를 못하는 모습을 보니, 왕녀도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였다. 그게 조금은 안쓰러워 김선혁은 조심스럽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골드레이크와 함께 왕도를 찾아오겠노라 약속을 했다.
“지금의 헤어짐은 훗날의 재회를 위한 것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노라.”
끝까지 변함이 없는 왕녀의 인사, 그는 골드레이크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황송하게도 왕녀의 배웅을 받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출발하지.”
왕성 밖에서 미리 도열해 있던 맹스크 사령관과 서부군이 발걸음 맞춰 진군을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자정 정기 연재본, 정오 추가 연재본, 기습적 연참 추가본. 이중에서 세번째 연재본입니다. 건너 뛰시지 마시고 직전에 올라간 48 편도 꼭 읽어주세요!
*어제는 비록 3연참을 못하고 2연참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오늘은 기필코 3연참에 성공했습니다. 추천과 코멘트로 글쟁이의 노고를 치하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