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47화 (47/305)

<-- 21. 골드레이크 -->

국왕과 왕녀가 돌아간 이후로 김선혁은 한참이나 귀족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어떤 귀족은 제 딸을 앞세웠고, 또 어떤 귀족은 재물과 권력으로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인계에 넘어가기에는 아티야로 인해 단련된 그의 정신이 너무도 굳건했다. 또한 재물은 이미 국왕에게 약속받은 바가 있었기에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권력은 아예 흥미가 없었으므로 그는 귀족들의 제안에서 그 어떤 매력도 느낄 수가 없었다.

결국 귀족들은 자신들의 조사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승전 연회 사흘째가 되던 밤, 고집 센 이방인에 대한 포섭 시도를 전면 중단했다.

덕분에 마지막 날만큼은 그도 동료들과 웃고 떠들며 비로소 연회의 참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왕실에서 제공한 음식과 음료는 그가 이곳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누리지 못한 호사스러운 것들이었으니까.

바쁜 일정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작위 서임식이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땅에서 온 이방인이여, 이름을 말하라.”

순백의 성장을 차려 입은 국왕의 엄숙한 질문에 김선혁이 고개 숙인 채 대답했다.

“그대 이방인 김선혁이여. 그대가 평생 살아가며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의(善意)에는 신의(信義)로, 악의(惡意)에는 정의(正意)로.”

먼저 나서 기사 서임을 받은 자들이 정의와 충성, 봉사를 온갖 미사여구를 보태 거창하게 늘어놓았던 것과는 상반되게 짤막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그는 이렇다 할 신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게 은혜가 됐든 악의가 됐든 그저 받은 만큼 그대로 갚아준다는 보통사람의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따로 할 말은 없는가.”

“네.”

길게 떠들어봐야 얄팍한 속내만 들킬 뿐이라, 그가 그렇게 질문에 대한 답을 마무리하니 국왕이 적당히 그의 말을 포장해주었다.

“선의에 보은하고 악은 징치하는 정의로움이 그대가 앞으로 지켜야 할 것인가.”

“네.”

다행스럽게도 국왕은 포장에 꽤나 일가견이 있었다. 다만 그 포장이라는 게 듣기에 따라 왕가에 입은 은혜를 갚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겠다는 말처럼 들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서임식만 끝나면 왕실이고 귀족이고 간에 이 지긋지긋한 왕도와 안녕인 것이다.

“그대 맹세하라. 오늘 이 자리에서 선언한 그대의 신념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겠노라고 맹세하라.”

“맹세합니다.”

국왕이 검을 뉘어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무릎 꿇은 그의 양쪽 어깨와 목 뒤를 툭툭 두들겼다.

“아데스덴의 첫 번째 기사, 나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의 이름으로 그대를 기사로 만드오니, 용감하고 예절바르고 충성스러울 지어다.”

엄숙한 선언이 끝이 나고 신성한 식을 구경하기에 위해 몰려들었던 왕도의 시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했다.

“또한 왕도 아데스덴의 적법한 통치자이자, 왕국의 하나뿐인 지배자가 지닌 온당한 권리로 그대에게 왕국의 자작의 위와 드라흔(Drachen)의 성을 하사하노라. 그대는 매사에 드라흔의 이름이 욕되지 않도록 신중하고 사려 깊고 공평할 지어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김선혁은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국왕 폐하 만세!”

“드라흔 자작 만세!”

왕도의 시민들이 용의 이름을 가문의 성으로 삼은 새로운 귀족의 탄생에 더욱 더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앞으로 잘해보게.”

식을 마친 국왕이 어느새 평소의 덤덤한 얼굴로 돌아가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고, 김선혁은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왕도행 끝에 당당한 귀족이 되었다.

**

작위 수여식까지 끝이 났지만 아직 모든 일정이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전공에 대한 포상은 비단 작위뿐만이 아니었으니, 아직도 받아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끝이 나기까지 잠시 더 왕도에서 머무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먼저 프레드릭 중대장이 온전히 상급 기사의 자리에 올랐고, 클라크와 한센을 비롯한 기존의 기병대원들은 전원이 명예 작위라 할 수 있는 준기사의 위를 수여받았다.

“어차피 말이 준기사지, 그냥 생색내기야. 이름뿐인 기사를 누가 알아준다고.”

경우에 따라 견습 기사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준기사의 자리였지만, 클라크나 다른 기병들은 어느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 스스로가 귀족가의 자제들이었기에 큰 아쉬움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거 앞으로 자작님으로 모셔야 하나.”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허물없이 서로를 대하던 기병대원들과 격차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그냥 평소대로 해요. 낯 간지럽게 자작님은 무슨.”

“자작님께서 원하신다면 소인 그리하겠습니다요.”

다행스럽게도 기병대원들은 어렵지 않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공식 석상에서는 과거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지만, 사석에서만큼은 전과 같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중대장 아저씨는 이제 상급 기사라 최소한 연대장 정도 자리는 꿰찰 텐데. 그럼 우리 중대장 자리는 공석 되는 거 아냐?”

“이번에 부대 명까지 생겼으니 영 못 쓸 놈이 오지는 않겠지만, 걱정이긴 하네.”

기병대원들의 관심사는 단연 공석이 될 중대장의 자리에 누가 오게 될 것인가였다.

“가만, 선혁이도 이제 작위도 받고 기사 서임까지 받아서 평대원으로 있지는 못할 텐데?”

“설마...”

가만히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문득 자리가 붕 뜨는 것은 김선혁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기병대원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너 뭐 들은 거 없어?”

원한다면 동료들과 떨어지지 않게 해주겠다던 사령관의 제안이 떠올랐지만, 그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어차피 확실하게 지휘관의 자리를 제안 받은 것도 아니라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뭐, 어때. 차라리 말도 제대로 못 타는 놈이 검 좀 만진답시고 우리 앞에 서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것도 그렇네. 아니. 그냥 그런 게 아니라 확실히 그래.”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설마 하는 의문에 불과했던 동료들의 대화가 어느새 기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선혁이 없으면 우리가 사스테인 같은 애들을 어떻게 잡았겠어. 나는 요즘 선혁이 없이 달리면 영 허전하기까지 하더라고.”

“의존하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우리 드레이크 기병대가 하나로 뭉쳐야 제 힘을 내는 것도 사실이지.”

“암. 암 그렇고말고.”

이제는 사령관을 찾아가 김선혁을 중대장 자리에 앉혀달라 건의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의 기병들을 보며 김선혁이 기겁을 했다.

“제발, 우리 여기서 일 더 벌리지 맙시다. 일단은 돌아가자고요. 아주 왕도라면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니까.”

“하기야, 먹을 거 없고 볼 거 없어도 주둔지가 낫지. 여기는 영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아서 정이 가지를 않는다.”

“나도 그래.”

그의 말에 클라크가 말을 보탰고, 한센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데 요나슨이 갑작스레 한센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타박을 했다.

“그런 놈이 아주 왕도에는 예쁜 아가씨들이 많다고, 껄떡대느라 정신이 없지. 너 이 새끼, 어제도 안 들어왔지?”

좋지 못한 곳을 다쳐 남성성이 온전할지 아닐지 모르는 한센을 구박하는 요나슨을 김선혁이 기겁을 하며 말렸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이 새끼 꼬불쳐둔 돈 전부 들고 가서, 용한 사제한테 전부 치료받았단다. 봐봐. 여기 이도 새로 끼웠지? 이 새끼 아마 그간 모은 돈 전부 날려먹었을 거다.”

요나슨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는 텅 비어 있던 한센의 앞니가 원상복구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진짜에요? 한센?”

깨져버린 그곳과 앞니 모두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던 터라 그가 반색을 하고 물었다. 한센은 마치 보란 듯이 어설프게 끼워 맞춘 모조 이를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 다행이다. 그래도 영 못쓰게 망가지지는 않았었나 봐요.”

사제와 마법사의 콜라보이레이션이 일으킨 놀라운 기적이었다.

“커흠. 형만 믿고 따라오면 내가 왕도가 왜 왕도인지를 보여주마. 내가 마침 어제 아주 기가 막힌 곳을 뚫었거든.”

한센은 여기까지 온 이상 왕도는 한 번 둘러봐야 하지 않겠냐며 거들먹거렸다.

“그래? 거기가 어딘데. 아직 일정에 여유가 있으니...”

클라크를 비롯한 사내들이 금세 죽이 맞아 한센을 따라 나설 채비를 했다.

**

영 미덥지 못한 한센이라는 안내인을 앞세운 사내들의 왕도 나들이는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어여쁜 아가씨에 맛 좋은 술과 안주가 있다던 주점은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울 것 없는 허접쓰레기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바가지는 얼마나 씌우던지 격분한 기병대원들은 소위 기도라 불리는 사내들과 시비가 붙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란은 왕도 경비대가 출동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고, 기병대원은 하마터면 감옥에 갇힐 뻔 했다.

하지만 무려 자작이나 되는 존재와 전원이 준기사로 이루어진 일행을 일개 경비대원들이 연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마침 주점이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켰던 건달패들의 것이라 요령을 발휘할 여지가 있었다는 게 다행일 뿐이었다.

“내 다시는 한센 네놈을 믿나 봐라.”

“고자 탈출 하면 뭐해. 눈이 고자고 목구녕이 고잔데.”

의도치 않게 수도에서도 악명이 높은 건달패 하나를 완전히 와해시킨 거친 사내들 답지 않은 대화, 김선혁은 이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으음.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냄새지.

아무래도 너무 오래 동료들과 어울리다보니 그도 단순무식한 사내들과 닮아버린 모양이다.

그렇게 소란을 떨며 왕도를 헤집고 다니고, 시간을 죽이고 있다 보니 약속되었던 포상이 내려왔다. 그런데 그 포상금이 무려 연비 나쁜 기병들의 1년치 급료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생포되었던 적 기사와 마법사에 대한 추가 포상이란다.”

적게 준 것도 아니고 포상금이 늘어난 것인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

왕도에 머무는 동안 안유정이 두 차례 더 찾아왔고, 한 번도 얼굴 본 적 없던 또 다른 이방인 파벌들이 찾아왔었다. 그들의 목적은 역시나 무려 국왕이 관심을 보인 이방인을 제 무리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김선혁은 일언지하에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왕도를 떠날 판인데, 굳이 어딘가에 이름을 올리고 복잡한 알력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아, 진짜. 왕도랑 어지간히 궁합이 안 맞네.

거듭된 불청객들의 방문에 잔뜩 짜증이 나 있던 김선혁은 왕녀 오필리아의 방문에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드라흔 자작은 너무 나의 방문을 불편해 말라. 오늘은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에 찾아온 것이니.”

연회 에스코트 건으로 한 번 시달린 탓에 개인적이건 공적이건 간에 왕녀의 방문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대의 드레이크를 내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린애 다운 치기를 애써 꾹 누르며 근엄한 척 부탁을 해오는 왕녀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해, 그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곧 있으면 떠날 왕도, 나름대로 꼬맹이 왕녀에게 선물을 주기로 한 것이다.

“오오! 과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전날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용이 있도다. 말처럼 우아한 맛은 없으나 그만큼 용맹하고 강인해 보이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하고 몇 발자국 떨어져 드레이크를 올려다보는 왕녀의 모습에 그가 조금은 풀린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나에게 이 용맹한 괴수의 이름을 알려주겠는가.”

“아직까지 길이 완벽하게 든 놈이 아니라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왕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드레이크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김선혁이 변명처럼 대답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대 나에게 이 용맹하고도 강인한 생명체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는가.”

아니. 절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리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선혁은 왕녀가 지닌 권위와 소녀 특유의 사랑스러움 이겨내지 못하고, 작명 센스로는 왕국 최악일 게 분명한 그녀에게 가엾은 드레이크의 운명을 맡겼다.

“그대의 건승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빅토리,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두려움과 혼란이라는 의미의 카오스 피어, 아니면 라이트닝 썬더...”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이름이 왕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미 독하게 마음을 먹었던 그로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끔찍한 이름들이었다.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그를 보며 왕녀는 오히려 기꺼운 얼굴로 계속해서 궁리를 했다.

“다크 팬텀. 오! 그래. 비늘 빛이 금빛에 가까우니 골드 드레이크, 줄여서 골드레이크는 어떤가. 애칭은 골디가 되겠구나.”

김선혁은 살인적인 작명 센스를 지닌 왕녀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얼마나 더 끔찍한 이름이 나올까 두려워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골드레이크...”

“오오. 나도 그대가 마음에 들어할 거라 생각했었노라. 저 금빛 비늘과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던가.”

얼굴까지 발갛게 상기된 왕녀는 드물게 소녀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맹목적인 행복을 차마 깰 수가 없어 결국 김선혁은 왕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골드레이크, 그게 앞으로 네 이름이다.”

허탈한 음성으로 드레이크에게 새로운 이름을 말해주니, 게슴츠레하게 내리감았던 드레이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레이크의 복종도가 마침내 한계를 돌파하여 100에 도달했습니다.]

[속성창에 새로운 항목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테이터스에 ‘지(地)’ 속성이 추가되었습니다.]

========== 작품 후기 ==========

*서임식 장면은 토마스 불핀치의 '원탁의 기사'와 구글 자료들을 참고로 하였습니다.

**시간 차 없이 다음 편 바로 또 올라갑니다.

**자정 정기 연재본, 정오 추가 연재본, 기습적 연참 추가본. 이중에서 두번째 연재본입니다. 잊지 마시고 다음 49편도 꼭 읽어주세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글쟁이의 더없이 좋은 단백질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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