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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46화 (46/305)

<-- 20. 스폰서 쟁투 -->

“아덴버그의 온당한 지배자이자, 누구보다 존귀하고 현명하신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웅성거리며 떠들어대던 입을 다물고는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왕국의 온당한 지배자, 국왕 폐하께 경의를!”

그런데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는 귀족들의 태도가 왕녀가 입장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다. 공손한 가운데에도 묘하게 제 체면을 챙기고 고개가 뻣뻣한 면이 있던 귀족들이 지금은 제 무릎에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몸을 낮추었다.

그 묘한 긴장감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한껏 몸을 숙였다.

저벅, 저벅.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소리, 수백의 귀족들을 무릎 꿇려놓고도 국왕은 걸음을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이윽고 발소리가 멎고 국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라.”

배에 힘을 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톤을 높여 멀리 전달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곁의 이에게 말하듯 여상스러운 음성은 과연 이 넓은 연회장 끝까지 제대로 전해지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나지막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 중에 국왕의 말을 듣지 못한 이들은 한 명도 없어 보였다. 하기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 연회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으니까.

다른 귀족들을 따라 슬쩍 고개를 든 김선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필 마침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국왕과 눈이 마주쳐 버린 것이다.

아...

그렇게 마주한 국왕의 시선은 기이할 정도로 투명했다. 마치 속이 낱낱이 헤집어지는 듯한 기분에 소름이 돋았다.

“이리 오거라. 오필리아. 내 사랑스러운 딸아.”

하지만 마주침은 찰나에 불과했고, 국왕은 이내 눈을 돌렸다. 겨우 국왕의 시선을 벗어나게 되었지만 그 잠깐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로 그는 피로감을 느꼈다.

“경들도 이렇게 연회장에서 본 것은 오랜만이오.”

“폐하께서 워낙에 공사가 다망하시니, 감히 먼저 청해 뵙지 못했나이다.”

국왕이 불편한 것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작위 깨나 높을 법한 노귀족들도 그 여상스러운 인사말조차 허투루 넘기지 못하고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던 김선혁은 문득 연회장의 모든 것이 멈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귀족들은 돌이 되는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굳어 있다가, 국왕이 말을 걸면 그제야 저주에서 풀려난 것처럼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왕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숨 쉬는 것조차 까먹을 것처럼 보였다.

“경들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왕국의 내일이 참으로 밝게 느껴지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고 작은 음성, 그럴수록 귀족들은 국왕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저게 아덴버그의 국왕.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귀족과의 알력이 있다 하여 혹시 권위가 부족한 왕은 아닌가 싶었던 왕가의 수장은 타고난 지배자였고 제왕이었다.

“뜻 깊은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이니, 다들 부담없이 마시고 즐기시게.”

시간이 지나자 국왕의 등장으로 굳어있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다시금 부드럽게 흐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고, 발소리 없이 연회장을 누비고 다니는 시종들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하지만 김선혁은 알 수 있었다.

“그런 우스운 일이 있나! 경의 재치에 무릎을 탁, 칠 수밖에...”

“로델린양, 부디 제 애 닳는 마음을 받아주...”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며 다른 귀족과 이야기 하는 사내도, 아름다운 여인에게 밀담을 건네는 젊은 귀족도 모두가 하나같이 온 신경을 국왕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싸구려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 김선혁은 그 진귀한 구경거리를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국왕은 언제까지고 그를 연회의 관객으로 둘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왕국의 적법한 지배자, 테오도...”

“아아. 거추장스러운 예법은 생략하도록 하라. 그대 이방인들이 우리와 같지 않음을 나도 잘 알고 있으니.”

금빛 번쩍거리는 갑주를 입은 기사의 인도를 받아 국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김선혁은 말허리를 잘라내는 국왕의 참견에 입을 다물었다.

“그대가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던 드레이크 나이트로군.”

차라리 언행에 기품이 있는 것은 왕녀 쪽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음성은 그 자체로 무게가 있었으니, 부담은 이쪽이 몇 배는 더 심했다.

“과분한 호칭에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

적당히 대답을 해준 김선혁은 식은땀을 흘렸다. 분명 칭찬인데 그는 묘하게 기사 서훈도 받지 못한 자가 나이트의 칭호를 받았다고 혼나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아니. 이건 좀 억지인가.

그런 생각이 스스로의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도리어 긴장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수도에 온 이후로 왕족이니 귀족을 신경 쓰느라 마음이 편할 때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변경으로 떠나면 그만인 것을 왜 이리 다시 볼 일도 없는 자들을 신경 썼나 하는 마음에 억울함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유치하고 낯 부끄러운 칭호는 자신이 원해서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이곳에 온 이후로 원해서 한 것이 하나라도 있기나 했을까. 김선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빳빳이 고개를 세웠다. 물론 무릎은 모범적으로 꿇은 상태였다.

“재미있는 자로군.”

그 심경의 변화를 마치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국왕이 실소를 내뱉었다.

방금 전의 그였다면 그 한마디에 어깨를 움츠렸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특유의 투명한 시선조차도 덤덤하게 받아낼 정도로 평온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대들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가 약속한 것이 있었지. 그대 이방인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겠노라고.”

국왕은 그런 그의 태도를 질책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꺼운 듯 웃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대는 충분히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당당할 자격이 있다.”

당장 이해도 못할 헌신과 봉사 대신에 대가를 주고받는 식의 관계를 제안했던 왕실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합리적인 거래 상대였다. 단지 주변에서 충성이니 뭐니 너무 떠들어대는 통에 왕실의 기본 입장을 그가 잊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그가 가만히 국왕을 바라보았다.

“말하라.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겠다.”

국왕은 분명 대하기 편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충분히 대화가 통하는 사내였다. 게다가 화끈하기까지 했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이다.”

시원시원한 국왕의 제안에 딴지를 걸고 나선 것은 노귀족들이었다.

“폐하! 차라리 금전과 귀물을 하사하옵소서! 아직 이곳의 물정조차 제대로 모르는 이방인에게 내리기에는 지나치게 과한 포상이옵나이다! 행여 무리한 것을 요구하기라도 한다면...”

“이미 자작위와 막대한 포상금이 예정된 상황입니다. 인재를 아끼시는 폐하의 자애로움은 익히 알고 있으나, 행여 형평성에 문제가 생길까봐 우려가 되옵나이다!”

이제까지 말도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던 주제에 소원을 들어준다니 기겁을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대가 말해보라. 그대가 나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할 참인가.”

“아닙니다.”

“그럼 이번에는 맹스크 백작이 대답하라. 내가 저 자에게 따로 보상을 내린다고 하여, 형평성에 어긋나는가.”

“그렇지 않사옵니다. 감히 어느 누구도 그보다 더 큰 공을 세웠다 말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둘 모두의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국왕이 웃었다.

“들었는가. 당사자가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이 없고, 서부군의 총사령관이 특별 보상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을 거라 확언을 해주었다. 따로 또 우려되는 것이 있는가.”

한 번 나선 노귀족들은 국왕의 말에 감히 다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분분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을 뿐이다.

“자. 말하라. 그대가 원하는 게 뭔지.”

방금 전에 나서서 국왕을 만류했던 노귀족들을 힐끗 바라본 김선혁이 빼지 않고 대답했다.

**

귀족들은 차라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쪽 무릎 꿇은 이방인의 자세는 흠잡을 곳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미묘하게 그 태도가 뻣뻣해 보였다. 왕가의 혈통이 지닌 특유의 투명한 시선마저도 덤덤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저,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인자한 얼굴 뒤에 뱀과 사자의 면모를 숨긴 테오도르 국왕 앞에서 이렇게까지 당당한 사람은 여태 본 적은 없었다.

아니. 당당하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심지어 그 이방인은 국왕의 호의를 무산시키려 했던 공작들을 힐끗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게 마치 얼굴을 기억해두고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태도처럼 보여 어지간한 노귀족들도 망연한 얼굴을 해보였을 정도였다.

그 당당함이 이방인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만용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감의 발로인지는 몰라도 그게 국왕의 마음에 꽤나 들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자. 말하라. 그대가 원하는 게 뭔지.”

이방인은 염치도 없이 한 번 사양도 하지 않고, 국왕의 제안을 넙죽 잘도 받았다.

“제가 바라는 것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이방인과 국왕의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슬쩍 눈치를 살피며 다가가는데 이미 이야기가 끝이 난 것인지 국왕이 말했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는가. 만약 그대가 나의 권위에 일말의 의구심이 있어서 한 말이라면 다시 대답할 기회를 주겠다. 나는 충분히 그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이 있다.”

“감히 제가 어찌...”

이방인이 가증스럽게도 다 늦은 겸손을 떨어 보였다. 국왕은 잠시 이방인을 바라보다 화통하게 웃었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자로다.”

도대체 어떤 대답을 했기에 국왕이 저리도 소리 내어 웃는 것일까. 귀족들은 궁금함에 몸이 달아 오를 지경이었다.

“좋아.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내심 환호했다. 저 교활한 국왕이 쉽게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 리가 없었다. 말 끝에 붙인 ‘하지만’이라는 말에 귀족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는 내 체면이 살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는 군말 없이 내 선물을 받으라.”

마치 형벌이라도 주는 듯한 말투였지만, 실상은 추가로 포상을 내리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나 테오도르 티베리우스 로 아데스덴은 이 욕심 없는 사내에게 기꺼이 왕실의 곳간을 열리라. 연회가 끝나는 즉시 창고를 개방하여...”

귀족들은 얼빠진 얼굴로 국왕이 떠들어대는 음성을 들었을 뿐이다.

**

국왕은 오래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자신이 있어서는 귀족들이 마음껏 연회를 즐길 수가 없다며 왕녀를 데리고 사라졌다. 원래대로라면 왕녀의 퇴장을 에스코트했어야 했을 김선혁은 국왕 덕분에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미친놈아.”

뒤늦게 몰려오는 피로에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우르르 기병대의 동료들이 몰려왔다.

“대체 간이 얼마나 크길래 국왕 폐하 앞에서 그렇게 따박따박...”

“보는 내가 다 심장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

말뿐이 아닌지 한센과 요나슨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를 잡고 흔들었다.

“폐하께서는 인재를 아끼시지. 그리고 속이 무척이나 넓은 분이시다. 설령 자네가 실수를 했더라도 고작해야 포상과 작위를 취소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을 테지.”

“제가 보기에도 그렇더군요.”

만약 국왕과 실제로 마주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이다. 국왕은 그에게 충성과 헌신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간 왕실에 고삐를 잡히지 않기 위해 해온 모든 고민과 노력이 무색해져버린 것이다.

“근데 대체 무슨 소원을 빌었길래, 폐하께서 저렇게 즐거워하신 거야?”

“너 무슨 아부라도 했냐?”

동료들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김선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아니고...”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어느새 몰려든 귀족들이 아닌 척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탓이다.

아, 맞다. 이 양반들이 있었지.

최종 보스는 사라졌지만,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눈에 불을 켠 귀족들에게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저녁 사이에 끼워 넣으려던 연참, 실패했습니다. ㅜㅜ

무료일 때도 최선을 다 해 썼지만, 유료가 되고 나니 제 가치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써서 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ㅜㅜ

하루 두 편을 목표로 달리되, 그 사이에 여력이 될 때 한 편 추가하여 하루라도 3연참을 성공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전개 속도도 올리고, 연재 속도도 쭈욱 올라갑니다! 추천과 코멘트로 힘을 주소서.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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