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스폰서 쟁투 -->
조그만 얼굴에 앙증맞은 코볼, 부드러운 암갈색의 눈동자와 입가에 매달린 부드러운 미소까지 왕녀의 모습은 도도하다기 보다는 온화해보였다. 필시 공들여 치장했을 게 분명한 맨살 드러나지 않은 순백의 드레스와 틀어 올린 머리도 화려함보다는 차라리 기품이 있었다.
김선혁이 왕도까지 오기까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왕족다운 모습,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눈앞의 왕녀가 어려도 너무 어렸다는 것이었다.
“어서 오게. 드레이크 나이트여.”
고작 해야 열셋이나 될까, 훤히 드러내 보인 동그란 이마 탓에 더욱 어려 보이는 왕녀가 어울리지 않게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커흠.”
만약 곁에서 사령관이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김선혁은 인사도 잊고 한참이나 결례를 범했을 것이다.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 3조 대원 김선혁이 왕녀께 인사드립니다!”
황급히 드레이크에서 내린 그가 왼쪽 무릎을 꿇고 반대편 무릎에 가지런히 손을 올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겹도록 받았던 예절 교육이 다행스럽게도 제 때 발휘되어, 왕녀 앞에서 허둥지둥하는 일은 없었다.
어디 보자. 이 다음에는 왕녀가 고개를 들라고 할 테고, 그 다음이...
가만히 고개 숙인 채 머릿속으로 다음 절차를 떠올리고 있자니, 과연 왕녀가 고개를 들라 말했다.
“고개를 들고, 면갑을 올리게. 원한다면 그 무거운 투구를 벗는 걸 허락하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절차에 따라 달달 외웠던 문구를 내뱉은 그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무엄하게도 자신은 왕녀 앞에 얼굴을 드러내 보이지 않은 채, 가리개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왕녀는 이를 책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왕녀를 둘러싼 중갑의 사내들도 딱히 그의 무례함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연스럽게 투구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아, 어리다더니 그냥 어린 게 아니라 완전 애잖아...
투구를 벗은 탓에 탁 트인 시야 너머로 왕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름답다기 보다는 차라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새어나오려고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올라가는 입매를 꾹 눌러 내리고는 왕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로에 지쳤을 그대를 붙잡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배려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대의 공을 치하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어린 소녀가 제 딴에는 근엄하게 말하니 그게 도리어 더욱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왕녀는 난생 처음 보는 드레이크가 신기한 것인지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사악한 녹테인의 악마들을 무찌른 그대의 용기와 왕가에 대한 헌신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니, 그대의 헌신은 차후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기품과 단정함을 잃지는 않았지만 왕녀의 입과 눈은 따로 놀고 있었다. 그게 너무도 귀엽고 우스워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웃음이 터지기 전에 왕녀의 마중이 끝이 났다.
“그럼 여독이 풀리고 나서 다시 보도록 하지.”
왕녀는 원로의 피로를 풀기 전에 오래 잡아둘 생각이 없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간단한 환영사 몇 마디를 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대열 유지한 채 대기!”
하지만 원체 많은 인원이 한 번에 왕도로 들어온 탓인지 부대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대기해야 했다.
보병대가 안내를 받아 왕도 밖에 마련된 주둔지로 향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김선혁이 클라크에게 슬쩍 귀엣말을 건넸다.
“저, 그 뭐냐. 왕녀가...”
조심스럽게 왕녀가 저렇게 어린 줄은 몰랐다고 이야기 하니, 클라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래봬도 왕실의 대외적인 대소사를 거의 도맡아 하시는 분이다. 어려도 호랑이 새끼는 호랑이 새끼인 법이지. 마냥 어리게 봐서는 안 돼.”
없는 자리에서는 사령관과 중대장마저도 아저씨 취급을 하던 클라크가 왕녀에 대해 말할 때만큼은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그게 왕실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진심 어린 존경과 충성심이 느껴져 질문 한 김선혁은 어색한 얼굴을 해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귀여운 꼬맹인데.
왕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이곳 세상의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그저 왕녀의 사랑스러움만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
“보셨습니까!”
무엄하게도 높은 곳에 앉아 왕녀와 이방인의 대면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 하나가 신이 나서 외쳤다.
“왕녀 앞에서 면갑조차 벗지 않다니, 이거 이방인의 서운함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큰 모양입니다.”
“왕녀 앞에서 감히 괴수에 올라탄 채 한참이나 내려 보기까지 했지요. 사특한 마음을 품은 게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엄하신 왕족을 앞에 두고 그리 꼿꼿하게 굴 리가 없습니다.”
사실은 단순히 개선식 도중에 내린 면갑을 올리는 것을 깜빡 했을 뿐이고, 왕녀의 모습이 너무 어려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에 불과했지만 귀족들은 마치 김선혁이 역심을 품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게다가 표정은 또 어떻고요. 입을 꽉 다문 것이 아주 보기가 거북스럽더군요.”
그것 역시 왕녀가 너무 귀여워 자꾸만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은 것에 불과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귀족들은 멋대로 그의 속을 단정하고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이거 우리가 조금이라도 빨리 저 검은 마음을 걷어주어야겠습니다. 발칙하고 무도하기는 하나 능력만큼은 있으니, 어떻게든 감화시켜 왕국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게 우리 귀족들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내일 저녁에 승전 무도회가 있다니, 그때 한 번 나서보도록 하지요.”
“저도 한 팔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금세 죽이 맞아 떠들어대던 귀족들이 이내 심각한 얼굴로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미인계를 제시한 자도 있었고, 금전을 지원하기로 한 자도 있었다.
“변방에서 굴러먹던 촌놈이 화사한 영애들을 만나 과연 정신이나 차릴 수 있을까요. 그 얼굴이 벌써부터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젊은 친구들끼리는 이야기가 더 잘 통하지 않겠습니까? 도중에 그 자가 마음을 준다면 그건 그거대로 순리인 게지요.”
마치 김선혁이 벌써 넘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귀족들, 그 시각 김선혁은 왕실에서 배정해준 객실에 누워 아티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찔한 자태를 뽐내며 유혹하듯 허공을 유영하는 투명한 여인을 보고 있노라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시간이 잘도 갔다.
“아. 지배력이 올라가서 그런가. 점점 이뻐지네.”
안유정과 닮은 얼굴은 여전했지만, 속성 지배력이 올라갈수록 미묘하게 빛이 나는 아티야의 모습이 새삼 놀라울 정도였다.
“너 때문에 눈만 높아진다. 진짜.”
하루 종일 헐벗은 아티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때 맨살만 조금 보여도 벌떡거리던 심장이 무쇠처럼 변해버렸다. 중요한 몇 군데만이 모자이크 처리가 된 아티야가 주는 자극에 완전히 만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는 아무 잘못이 없는 걸요. 주인님.’
게다가 호칭은 또 어떠한가. 남심을 자극하는 아티야의 말에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욕구는 쌓이는데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를 않으니, 심신의 부조화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래. 니가 무슨 잘못이니. 다 내 안의 마귀가 문제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그가 이내 아티야의 성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때 당장에라도 변화를 일으킬 것 같던 아티야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99에서 상승을 멈춘 속성 지배력도 변함이 없었다.
99에서 성장이 멈춘 것은 속성 지배력뿐이 아니었다. 드레이크 역시 먹이로 구슬리고 달래 겨우 복종도를 99까지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로는 속성 지배력과 똑같이 더 이상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복종도가 99가 최고가 아닌가 싶다가도 이따금씩 반항을 시도하는 드레이크를 보면 또 그건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속성 지배력과 마찬가지로 복종도 역시 계기가 있어야 99를 넘어설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 Level. 7
□ 용기병(Dragon Rider)
□ 고유 속성
-풍(風) / 속성 지배력 99
:풍아(風牙)
:풍신(風身)
:풍령(風靈)
□ 계약 정령
-하급 바람의 정령(아티야)
□ 테이밍 드래곤 목록
-드레이크(?) / 복종도 99
: 상태 ? 허기, 경계, 불편
□ 근력 29 / 지구력 28 / 민첩성 31 / 마법 저항력 37
□ 보유 스킬
-드래곤 테이밍
-드래곤 라이딩(하급)
-차징(Charging)(風)
-윈드 피어싱(Wind Piercing)(風)
-속성 무기술(중급)
-상급 기마술
: 상급 기마술 + 차징 = 혼연일체의 차징(風)
-왕국 표준 창술(상급)(風) 〈-〉 왕국 표준 기마창술(상급)(風)
-왕국 표준 검술(하급)(風) 〈-〉 왕국 표준 기마검술(하급)(風)
-중갑 기동(30Kg) 〈-〉 중갑 기마 기동(75Kg)
-보병 방패술(상급) 〈-〉 기병 방패술(상급)
-상급 작업 기술(토목)
특히 스테이터스 상에 표시된 드레이크 옆의 물음표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 방법이 없었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방법이 나오지 않자, 김선혁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원로에 지친 육신이 금세 수마에게 넘어갔다.
똑똑.
막 잠이 들려던 찰나,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왕성에서까지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었던지라 그가 의아한 얼굴로 누구냐 물으니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안유정이예요.”
그제서야 왕도에 올라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오라던 안유정의 말을 떠올린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오던 안유정이 그의 어깨 너머를 힐끗 보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티야. 돌아가.”
‘저 여자 싫어요!’
헐벗은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날뛰어대던 아티야가 드물게 심통을 냈다. 하지만 똑같은 얼굴이 벌거벗고 정신을 산만하게 해서는 대화가 진행될 리가 없다. 그는 떼를 쓰는 아티야를 억지로 돌려보내고는 어색한 얼굴을 해보였다.
“여전하군요. 선혁씨도, 저 정령도.”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들었어요. 이제 상급이라면서요?”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이미 소문을 들은 것인지 안유정이 축하의 말을 건네 왔다.
“제가 온 게 불편해요?”
아직까지 문가에 서서 자신을 맞이하던 모습 그대로인 김선혁을 본 안유정이 물었다.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당연히 불편했다. 그녀가 제의할 파벌 합류 제안도 불편했고, 방금 전까지만 헐벗고 날아다니던 정령과 꼭 같은 얼굴을 한 여자와 밀실에 있는 것도 불편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이제는 자신뿐 아니라 상대도 어색해질 것만 같아 그는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렸다.
“문 닫고 좀 앉아요.”
주춤거리며 문을 닫고 객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니, 그녀가 대뜸 본론을 꺼내들었다.
“우리 파벌에 합류할 필요는 없어요. 몇 번이나 거절당했는데 또 요구할 정도로 상황이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꽤나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던 탓일까. 예전과 다르게 지배력의 영향으로부터 약간은 자유로워 보이는 안유정의 모습이 새로웠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제안까지 쳐내지는 말아요.”
이건 또 의외의 말이었다.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면 다른 무리와 섞이는 것도 훼방 놓을 것 같았던 그녀가 예상과 반대 되는 말을 한 것이다.
“바보예요? 지금 왕도 분위기가 어떤지도 몰라요?”
“방금 도착해서 알 수가 없죠.”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더니, 그녀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귀족들이 선혁씨한테 엄청 매달릴 거예요.”
“딱히 넘어갈 생각은 없는데요.”
“선혁씨 마음이야 그렇겠죠. 하지만 귀족들을 얕보지 말아요. 아마도 귀족들은 선혁씨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예요.”
그래봐야 이미 받을 거 다 받기로 한 상태라 딱히 더 필요한 건 없었다. 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안유정이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귀족들은 상대가 스스로도 모르는 약점을 찌르고 아쉬운 것을 잡아내는 재주가 탁월해요.”
그녀는 귀족들을 경계하면서도 그 능력만큼은 높게 사는 듯했다. 진지한 어투에 그도 더는 허투루 듣지 못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아마 선혁씨가 제일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찾아냈을 거라고요.”
========== 작품 후기 ==========
*드래곤 푸어가 프리미엄으로 전환이 결정되었습니다.
사실 드래곤 푸어는 처음부터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늦게 유료화 공지를 하게 된 것은 계약된 업체와의 연재처 협의에 난항이 있었던 탓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조아라 연재 도중 습작 처리했어야 할 작품이지만, 제 입장에서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조아라를 버릴 수가 없고, 독자 분들과 호흡하며 글을 잇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끝끝내 굽히지 않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업체 측에서 최근에 제 어리광과 고집을 포용해주어 이제야 조아라에서 계속 연재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료화 공지가 늦어진 점 사과드립니다.
전업 글쟁이이고 글이 생업이라 무료로 끝까지 독자 분들과 함께 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유료화가 결정 난 만큼 더욱 책임감 있는 자세로 완결까지 열과 성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한 편에 100원, 딱지 한 장, 작다면 작은 금액이지만 단 1원의 가치도 허투루 사용되지 않도록 한 편 한 편 최선을 다 해 쓰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 함께 할, 혹은 하지 못 할, 모든 독자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독자 분들 덕분에 제가 슬럼프 이겨내며 글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드래곤 푸어는 12월 2일, 금요일 오후 경에 유료화가 되며, 무료 공개 편수는 1권 분량에 해당되는 25화까지입니다. 이후 편수의 구독을 위해서는 편당 100원, 딱지 1장이 필요합니다. 기존에 연재본을 실시간으로 따라와 주신 독자 분들께서 혼동 없이 이어보실 수 있도록 따로 소제목에 체크를 해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