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42화 (42/305)

<-- 20. 스폰서 쟁투 -->

아덴버그 왕국과 녹테인 왕국이 앙숙지간이라는 사실은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한 해 걸러 한해마다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고 공방을 주고받는 두 왕국의 전쟁은 새삼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지난 전쟁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기 2개에서 4개 연대가 동원되어 한 때 전면전이 우려되는 상황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실제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것은 중대 규모의 소규모 부대들 뿐이었다.

산발적으로 이어진 전투, 승리도 있었고 또 그만큼의 패배도 있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이어지던 전쟁은 양측에 비슷한 사상자의 수만 남긴 채, 전사자의 수만 보면 딱히 누가 우위를 점했다고 할 수 없는 상태로 끝이 나버렸다.

‘제 627회 아.녹 전쟁.’

두 왕국이 존재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져온 무수한 전쟁사에 그저 627이라는 숫자가 새겨지고, 몇 줄이 더 채워졌을 뿐인 특별할 것도 없는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버그 왕국의 왕도 아데스덴에서는 이례적으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이나 화제가 되었다.

“건방진 녹테인 놈들,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더니 꼬리를 말고 줄행랑 쳤군!”

“꼴좋다. 당분간은 감히 이쪽은 쳐다보지도 못할 테지.”

전쟁이 끝이 나고 양측이 서로 승리자임을 주장하는 것은 늘상 있어왔던 일이다. 다만 이번만큼 승자의 구분이 명확했던 적이 없었다는 게 차이점이었을 뿐이다.

‘기병 잡는 기병, 사스테인 기병단 전멸.’

아덴버그 왕국의 자랑스러운 기병대들을 벌써 몇 번이나 잡아먹은 악마들이 거꾸로 기병대에게 잡아먹힌 것이다.

그야말로 근래에 보기 드문 전공, 그것도 그냥 승리가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이야 늘 승리했던 조국이 그저 또다시 귀찮은 날파리들을 쫓아냈구나 하고 여상스럽게 생각했지만, 정보 깨나 만지는 귀족들의 경우에는 완전히 난리가 났다.

“그 끔찍한 악마들을 퇴치했다니, 실로 왕국의 경사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놈들에게 당한 아국 기병대의 숫자만 대체 몇인지...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을 풀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귀족들은 사스테인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아군을 괴롭혀왔고, 얼마나 큰 손실을 입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전선의 기병대가 피해를 입으면 귀족들이 말과 정련된 기병을 각출하여 전선의 공백을 메꿔왔던 탓이다.

그들은 이 뜻 깊은 승리를 기념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제 더 이상 그 저주 받을 이름을 들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인지 고개 끄덕이는 그 얼굴에 웃음이 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지옥에 굴러 떨어진 사스테인을 욕하고, 녹테인을 저주하느라 귀족들의 입에 침이 마를 새가 없었다.

“이번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자가 이방인이라죠?”

“들었습니다. 가장 선두에서 악적들을 상대로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왕실이 그렇게 이방인들을 아끼더니, 과연 밥값을 하긴 하는군요. 저는 왕실이 혹시 보답 받지 못할 은애(恩愛)를 베푸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 뭡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전투의 최선봉에 섰던 한 이방인 사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귀족 사내 하나가 입이 간질거리는 표정으로 다른 귀족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제가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지 뭡니까.”

잠깐 뜸을 들인 귀족은 다른 이들의 기대가 꺼지기 전에 솜씨 좋게 이야기를 풀었다.

“이번에 공을 세운 그 이방인이 가장 낮은 등급을 받은 자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못 들으셨겠지요. 왕실 소속의 정령사와 기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중간 이상의 등급을 받은 이들입니다.”

가장 하급의 이방인이라면 갓 서임 받은 평기사만도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하찮은 존재가 그 끔찍한 사스테인을 상대로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기 힘든 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귀족들은 금세 헛웃음을 치며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귀족 사내를 은근히 타박했다.

“믿지 않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가장 낮은 하급의 이방인이 그 험악한 전장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타박을 받으면서도 귀족 사내는 여유가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타박한 다른 귀족들의 귀 어두움을 조롱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만약 왕실이 등급을 잘못 책정했다면 어떨까요. 왕실의 지혜로움이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지만, 아주 가아끔 왕실이 미처 살피지 못하는 그늘도 있는 법 아닙니까?”

“답답하오. 속 시원히 좀 이야기 해보시오.”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귀족들이 금세 몸이 달아 보챘다. 귀족 사내는 즐거운 얼굴로 한참 더 뜸을 들이다가 본론을 말해주었다.

“전직한 이방인들 중에 좀 특이한 자가 있었답니다. 등급은 가장 낮은 하의 등급으로 용기병이라는 해괴한 병과로 전직했다더군요. 기병도 기사도 아닌 이 애매한 병과 때문에 왕실이 가장 낮은 등급을 준 모양입니다.”

“근데 대체 무슨 실수를 했다는 거요.”

“그 이방인이 이번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잡니다.”

평생을 정치판에서 보내온 노회한 귀족들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는 답을 내렸다.

“왕실이 실수한 게로군요.”

“맞습니다. 사실은 가장 높은 등급을 주고 애지중지했어야 할 이방인을 가장 낮은 등급을 주어 험난한 변방으로 내몬 것이지요.”

귀족들의 눈빛이 변하자 사내는 더욱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만약 제가 그 이방인이었다면 왕실에 대한 충성에 변함이 없었을 거라 장담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방인들이라는 족속들은 도무지 헌신과 봉사를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충성심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불측하게도 서운하다 생각하겠지요.”

“어쩌면 불경한 마음을 품을 수도 있고요.”

데굴데굴, 마치 귀족들이 눈알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그 이방인의 이름이 뭡니까.”

몸이 달은 것처럼 그 어떤 귀족적인 수식어도 없이 내뱉은 질문,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사내가 우월감에 도취된 얼굴로 대답했다.

“김선혁. 그게 그 이방인의 이름이라지요.”

사내가 그렇게 말하고는 교활하게 웃어보였다.

“왕실의 실수는 곧 우리 귀족들의 과오이기도 합니다. 저 이방인이 사특한 마음을 품기 전에 이제라도 나서서 왕실이 헤아리지 못한 이방인의 마음을 달래주는 거야말로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 우리가 잘 달래줘야지요. 설령 그로 인해 우리 곳간이 축나더라도, 왕실에 충성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당하지요.”

마주 웃어 보이는 귀족들의 얼굴에도 사내의 그것과 똑같은 교활함이 떠올라 있었다.

**

“와아! 저 말 좀 봐!”

“과연 변방의 용사들답게 엄청 강해보이는구만!”

“이렇게 보니 왕도의 기병들은 전부 계집애들처럼 보일 지경이야!”

왕도, 아데스덴의 시민들은 줄지어 들어오는 기병들의 늠름한 모습에 완전히 혼이 빠진 모습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개선식을 보아온 왕도의 시민들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었으니, 그들은 변방의 기병대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사스테인이라는 악명 높은 기병단 탓에 늘상 전공서열에서 밀려났던 기병대가 아주 오랜만에 왕도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만에 본 기병대의 모습이 이따금씩 오가는 왕도의 기병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늘상 보아왔던 화려한 갑주도 정갈함도 없었다. 잔뜩 먼지 내려앉은 갑주는 이곳저곳에 긁히고 패인 자국이 선명했고, 얼굴 가리개 올린 사내들의 면면은 저마다 흉터 하나쯤은 있는 험상궂은 것이었다.

그게 도리어 진짜 역전의 용사처럼 보여 왕도의 시민들은 전에 없이 열광했다. 마치 막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것처럼 흉흉한 모습의 기병대를 보며 그들은 끝없이 환호하고 소리쳤다.

“꺄아아악!”

그런데 그 사이로 비명소리가 끼어들었다.

“저, 저게 뭐야아아아!”

“겨, 경비대!”

소란은 위풍당당하게 행군하는 부대의 가장 뒤에서도 제법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 앞을 지나가는 기병대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던 시민들은 이내 그들이 모두 지나가자 아쉬운 얼굴이 되었고, 각자 기병대의 뒤를 따라 이동하거나, 걸음을 돌리려 했다.

크르릉.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한없이 낮은 으르렁 소리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인적 드문 산길에서 맹수와 마주친 것 같은 기분, 시민들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아아...”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번뜩이며, 억센 주둥이를 덜그럭거리는 괴수가 그곳에 있었다.

두 발로 선 도마뱀 같기도 하고, 벽화나 조각 속에서 보았던 전설의 괴수가 날개 잘려 대지를 어슬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각자가 떠올린 것이 뭐가 됐든 괴수의 끔찍한 모습에 혼비백산한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어, 엄마아아!”

“꺄아악!”

“괴, 괴물이다! 경, 경비대애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각기 가족과 경비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난리를 떨었다. 개중에는 무리를 튀어나가 이미 지나친 군인들을 찾아가 괴물의 존재를 알리는 이도 있었다.

“모두들 진정하라! 저것은 몬스터가 아니다!”

타이밍 좋게 나타난 왕도의 경비대가 시민들을 진정시켰다.

“모두 눈 크게 뜨고 봐라. 저 위에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은가! 저 몬스터는 몬스터이되 그냥 몬스터가 아니다! 드레이크 나이트 김선혁의 자랑스러운 동료이자, 애마이니 그대들을 해할 일이 절대 없도다!”

소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경비대의 선전이 완전히 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뒤늦게 저 끔찍한 괴수 위에 기수가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간악한 녹테인의 악마, 사스테인을 섬멸한 영웅을 맞이하라!”

“그가 바로 왕국의 새로운 별, 드레이크 나이트다!”

공포는 이내 침묵이 되었고, 다시 또 터질 것 같은 함성으로 변했다.

“와! 드레이크 나이트!”

“왕국의 새로운 별!”

그들은 저 흉악한 몬스터를 길들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괴수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사실에 열광했다. 이미 지나간 기병대들에게 보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 저....”

전망 좋은 왕도의 건물 테라스에 앉아 개선식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무지한 시민들과는 달리 이미 드레이크 나이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드레이크 나이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흉폭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드레이크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저 괴물을 사람이 길들였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이거 생각보다 걸물이었군요.”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귀족들 중 누군가가 말했고, 다른 이들이 금세 동조했다.

“저런 무지막지한 몬스터를 길들이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전장에 저자가 나타난다면, 적들은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할 게 분명합니다.”

귀족들의 눈가에 맹목적인 탐욕이 떠올랐다.

**

“간악한 녹테인의 악마, 사스테인을 섬멸한 영웅을 맞이하라!”

“그가 바로 왕국의 새로운 별, 드레이크 나이트다!”

“와! 드레이크 나이트!”

“왕국의 새로운 별!”

낯 부끄러운 호칭에 김선혁은 신경질적으로 얼굴 가리개를 내렸다. 개선식 도중에는 바이저를 내리지 말라는 당부를 들었지만, 얼굴이 화끈거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끄응. 미치겠네.”

시민들의 환호가 커질수록 그가 느끼는 부담감과 부끄러움은 몇 배로 늘어났다. 이게 다 저 드레이크 나이트니, 왕국의 별이니 하는 낯 부끄러운 호칭 때문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화풀이 삼아 애꿎은 드레이크의 뒤통수를 때렸더니, 시민들을 보고 잔뜩 흥분했던 드레이크가 고분고분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또 시민들은 흉악한 괴물을 마구 다룬다며 더욱 열광했다.

“으으.”

할 수만 있다면 저 낯부끄러운 호칭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드레이크 나이트라는 별명과 왕국의 별이라는 칭호는 왕실이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그가 멋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는 어서 빨리 이 거북스러운 행사가 끝이 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왕도의 길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어서 오게. 드레이크 나이트여.”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에 끝이 없는 길은 없었고, 마침내 지옥 같았던 개선식이 끝이 났다. 그리고 길 끝에 도달한 그는 말로만 들었을 뿐, 단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아덴버그 왕실의 왕족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체력 좀 쌓이면 다시 또 비축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지도 모를지도 모르는데 노력하겠습니다. ㅜㅜ 그리고 만두는 제가 제 돈 주고 사먹겠습니다. ㅂㄷㅂㄷ

*추천과 코멘트 선작은 사랑입니다. 찡긋.

*참고로 극중에 나오는 작명은 전적으로 극중 인물들의 센스에 의존한 것입미다. 절대로 글쟁이의 센스와는 무관합니다. 저는 작명고자가 아닙미다. 또 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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