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등급 조정 -->
“1년은 한참 더 지난 것 같은데,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교관님.”
등급 재조정을 위해 파견 나온 왕실의 책정관은 김선혁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계에 떨어진 이방인들이 개처럼 요새의 진창을 굴러야 했던 그 당시, 훈련을 총괄했던 교관이 바로 왕실의 책정관이었다.
“커흠.”
그의 알은체에 책정관이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저는 교관님 덕분에 무척 잘 지냈습니다. 전방에서 구르다 보니 배울 게 참 많더라고요.”
이번에도 책정관은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이어 인사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김선혁은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차라리 통쾌한 기분이었다.
‘각성을 축하하네. 전직 병과는 뭐지?’
‘요, 용기병입니다!’
‘용기병? 그게 뭐지?’
‘말 그대로 용을 타는 기병인 모양인데요?’
‘용? 용을 탄다고?’
당시에 주고받았던 대화를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끙. 오랜만에 또 상급 하나 나오나 했더니...’
차라리 처음부터 기대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았다면 실망도 덜했을 것을 교관은 한껏 들뜬 얼굴로 질문을 던지다가 금세 냉담한 태도를 해보였었다.
‘좋은 거 아닙니까?’
끝까지 기대를 버리지 못한 자신에게 교관은 혀를 차며 비웃었다.
‘아마 좋았겠지. 만약, 용만 이 세상에 있다면 말이야. 가끔 이렇게 이름은 거창한데 실속은 없는 병과가 있지. 안타깝지만 그게 자네의 경우야.’
말로는 안타깝다고 했지만 표정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 냉담함 속에 차라리 귀찮음 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용기병, 용기병. 그럼 기병 병과로 분류해야겠군. 차라리 기사였으면 중급은 됐을 텐데. 쯧.’
‘그, 그럼?’
‘하급!’
지옥 같았던 이계 생활에서 유일한 희망이었던 상급 병과로 전직해 요새를 벗어나겠다던 꿈이 무참하게 부서졌던 순간이었다.
“후방에서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네.”
시간이 흘러 당시에 자신을 매몰차게 대했던 교관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과는 입장이 완전히 달라져버렸으니, 교관의 태도는 조심스럽다 못해 상관을 대하듯 공손하기까지 했다.
“먼저 공을 세운 것을 축하하고, 무사함을 축하하네.”
하기야 김선혁은 더 이상 교관이 귀찮은 듯 손짓해서 내쫓을 수 있는 하급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훈 공로자였으며, 자작위가 약속된 전도유망한 군인이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말하는데 절대 오해하지 말게. 당시의 나는 어디까지나 왕실이 나에게 준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네. 그 과정에서 한 점 사심도 없었다는 걸 믿어주게나.”
교관은 혹시라도 과거의 인연이 악연이 되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게 되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자신을 못났다고 대차게 걷어찬 전 여자 친구 앞에 잔뜩 성공한 모습으로 나타나 인사를 건넸을 때, 상대의 반응을 즐기는 마음이 이러할까. 유치하지만 그만큼 더 통쾌하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비록 교관이 당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알량한 권력을 상당히 즐긴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 안에서 원칙을 어기지는 않았다는 것 역시 분명했다. 애초에 교관 스스로 나서서 이방인들을 괴롭히힌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점을 잘 알기에 그는 소소한 복수극을 이쯤에서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뭐, 교관님 덕분에 잘 지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당시에 제가 하급으로 책정되지 않았다면 24연대에 올 이유도 없었을 테고, 지금처럼 좋은 동료들을 만나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네.”
소심한 얼굴로 몇 번이나 고맙다 말하는 교관, 아니 왕실 책정관을 본 김선혁이 건들거리던 자세를 바로 잡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왕실 책정관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두고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투의 말, 왕실 책정관의 굳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이렇게 또 하나의 과거를 정리한 김선혁은 앞으로 나아갈 것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하급으로 평가절하당한 용기병의 힘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그 시작이리라.
**
“오오. 이게 그 왕성까지 소문이 자자한 드레이크로군!”
드레이크를 보고 환호하는 등급 책정관의 태도 그 어디에도 첫날의 불편함과 어색함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이놈 잡는다고 아주 죽을 고생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걸 또 받아주는 김선혁의 태도 역시 거리낌이 없었으니, 과거의 앙금 따위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그래. 그래. 이런 놈이면 그럴 고생을 할 만 하지. 아주 훌륭하구만!”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등급 책정관과 또 좋다고 낄낄대는 김선혁은 차라리 친근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게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전날 과거를 털어낸 그와 책정관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제법 사이가 친해진 상태였다.
“아직 길이 덜 든 놈이라 실전에서 쓰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이 상태로도 꽤나 대단한 놈이죠.”
전력 질주하는 말보다는 느리지만, 그만큼 더 맹렬하고 저돌적인 드레이크의 질주를 선보인 김선혁이 급조된 간이 안장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래. 확실히 이런 괴물 앞에서라면 아무리 잘 훈련된 전마라고 해도 겁을 집어먹지 않고는 못 베길 테지. 아주 좋은 무기를 얻었구만.”
윈드 피어싱을 비롯한 용기병의 능력을 시연해보이는 것은 이미 끝이 났다. 등급을 책정할 때만큼은 책정관도 다시 과거로 돌아간 듯 깐깐하게 굴었고, 꼬박 하루를 내내 능력 측정에 매달리고 난 뒤에야 겨우 책정이 완료되었다.
그렇게 책정된 김선혁의 새로운 등급은 상급이었다. 윈드 피어싱을 이용한 기마돌격과 전투력을 면밀하게 따진 결과였다.
“축하하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뭐하지만, 이제야 자네의 병과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되었군. 참으로 잘된 일이야.”
드레이크의 기동까지 본 책정관은 상급 위로 더 이상 등급이 없다는 사실에 짙은 아쉬움을 표했다. 할 수만 있다면 상급 이상의 최상급, 그 이상의 등급도 아깝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 상급이면 충분합니다. 지금 당장은 이 걸신들린 놈하고 성질 더러운 말 한 마리, 그리고 제 몸 하나만 건사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김선혁은 덤덤하게 제 속내를 밝혔고, 잠시 그를 바라보던 책정관이 웃으며 대꾸했다.
“같은 상급이라도 격차가 있지. 그리고 나는 자네가 실전에서만큼은 수위에 꼽힐 거라 생각한다네.”
가장 발전 속도가 빠른 것은 바람의 정령사 안유정, 기본기를 비롯한 종합적인 능력으로는 마법사 이은서, 전투력으로는 마검사로 전직한 장길석이라는 자가 최고라 말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집단전에서 만큼은 용기병을 상대로 우위를 장담할 수 없을 거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렇습니까?”
김선혁은 피식, 웃었다. 자신은 아직 아티야를 꺼내 보이지도 않았고, 먼 훗날 만나게 될 용의 존재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 눈앞의 사내가 아직 자신이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
괜히 입이 근질근질한 느낌이었지만, 그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럼 다시 만날 때는 자네가 나보다 한참은 윗사람이 되겠구만. 그냥 자작도 아니고 봉토를 지닌 자작이라니, 진짜 영주님이 되어 있을 테니까.”
제 할 일을 마친 책정관은 내친걸음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들러 혹시 또 다른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을 해볼 예정이라 말했다.
“그리고 말일세. 이건 내가 아무리 매뉴얼대로 했다지만, 어쩌면 왕실의 풍족한 지원 아래 더 빠르게 성장했을지도 모를 인재를 위험천만한 전방으로 내몬 것에 대한 사죄로 하는 말이네만.”
배웅까지 나와줄 줄은 몰랐다며, 책정관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한가지 정보를 주었다.
“스폰서를 조심하게. 왕실은 온전하게 이방인들이 통제 아래 있기를 바라지, 귀족들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네. 맹스크 변경 백이야 누가 뭐라 해도 왕실의 더없이 충실한 지지자이니 왕실도 책잡지 않겠지만, 수도의 귀족들은 경우가 다르네.”
“명심하겠습니다.”
“아마 수도에 올라가는 즉시 수많은 귀족들이 자네에게 구애를 할 걸세. 귀족이라는 족속들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교활하고 영악한 자들이야. 그러니 절대로 틈을 보이지 말게. 만약 자네가 그들의 꾀임에 넘어간다면, 왕실의 또다른 면모를 보게 될 거란 말이야.”
책정관은 몇 번이나 자신의 말을 명심하라 당부했다.
“그리고 다음에 볼 때는 책정관이 아니라, 깁슨이라 불러주게.”
왕실에서 나온 책정관, 깁슨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미안함을 보이며 주둔지를 떠나갔다.
“귀족들의 구애라...”
깁슨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던 김선혁이 괜스레 혀 끝에 맴도는 말을 꺼내보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
이제는 하급의 병과가 아닌 당당한 상급의 병과로 인정을 받았지만, 정작 김선혁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변한 것이 있기는 했다. 내내 막내로 취급받았던 자신이 보충병들의 합류로 이제는 고참병 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첫 인상이 워낙에 강렬했던 탓인지(사실은 술자리에서의 난동때문이었지만.), 보충병들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그를 어려워했다. 그들은 그가 지나갈 때면 하던 것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사냥 가십니까. 형님.”
“어? 어.”
요나슨과 한센의 지도 아래 연병장을 굴러대던 기병들이 그를 보고는 훈련도 멈추고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접어 보였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형님!”
그런데 그 모습이 꼭 저쪽 세상의 건달들이 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어 김선혁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말끝마다 붙이는 형님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야, 야. 그렇게 하지 마. 그리고 지금 훈련 받는 중이잖아. 그리고 형님이 뭐야. 깡패냐.”
“형님이 그날 술자리에서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라고...”
기억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무슨 말을 했건 간에 잊으라 말했다.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선배님도 있고, 알아서들 불러.”
“알겠습니다. 선배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잠깐 실랑이를 하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교관 격으로 나와 있던 요나슨과 한센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갈게요!”
“오냐. 다녀와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분노는 자신이 아닌 보충병들에게 향한 것이었다.
“이 새끼들이, 형님? 우리가 깡패야? 그리고 훈련 중에 딴 짓을 해?”
“우리가 그렇게 우습냐? 엉? 쟤는 무섭고 우리는 뭐 허수아비야?”
“아닙니다!”
힘찬 대답이 이내 곡소리로 변하는 것을 들으며 김선혁은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갔다.
**
평온한 일상이 반복되던 가운데 드디어 맹스크를 출발한 부대들이 24연대의 주둔지에 도달했다.
“그럼 우리도 출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프레드릭과 중갑 기병대 역시 그들을 따라 수도로 출발했다. 그 과정에서 드레이크를 본 타 부대의 병사들이 난동을 부리는 일이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진정되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아수라장을 겪고 살아남은 기존의 중갑 기병대원들의 전마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말들이 드레이크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만이 부대에서 한참 뒤쳐진 채 뒤를 따라야 했다는 것이었다.
부대원들이 번갈아 가며 찾아와 이따금씩 말상대를 해주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무료한 행군 길이 더욱 무료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무료함을 달래는데 영 소질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티야."
그는 막간을 이용해 또다시 용기병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주인공이 금의환향합니다. 물론 고향은 아니지만;;; 여튼 수도로 고고싱합미다!
*으으. 저를 화형시키려고... 이 무슨 마녀사냥 ㅂㄷㅂㄷ. 연참을 위해 체력 또 비축하겠습니다. ㅜㅜ 언제가 될지는 저도 몰라요. ㅜㅜ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사랑입미다. 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