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40화 (40/305)

<-- 18. 신고식 -->

드레이크의 흉폭함과 악취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잘 훈련된 전마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나마 험악한 전장을 전전하며 사나워질 대로 사나워진 24연대 소속 기병들의 전마들은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보충병들의 애마들은 그게 불가능했다.

“으억!”

낙마자가 속출하고, 미쳐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느라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조용히 해. 너 때문에 난장판 됐잖아.”

김선혁이 그 모습을 보고는 기세등등한 드레이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끄르릉.

마치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금세 기가 죽은 드레이크가 고개를 늘어트렸다. 하지만 한 번 겁을 집어먹은 말들은 여전히 쉽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밥도 먹였으니, 스텔라 데리고 올게요. 저 올 때까지 시작하지 말아요.”

“먹여 살리느라 고생이 많아. 아주. 그리고 걱정 마. 네가 첫 번째거든.”

“아, 그래요? 잘 됐네. 금방 다녀올게요!”

어쩐지 신이 난 듯한 어투로 인사를 남긴 김선혁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새하얀 백마를 타고 돌아왔다.

“그럼 슬슬 시작할까? 날도 곧 어두워질 거 같고. 이 짓을 또 내일 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 말한 클라크가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더, 더. 휘말려들지 말고.”

기병 간의 격돌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고도 한참을 더 물리는 태도에 보충병들이 의아해 했지만, 직접 나서서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선혁.”

“네.”

그렇게 거리를 벌릴 대로 벌린 클라크가 김선혁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저 놈, 남부 영지에서도 악명이 높은 놈이다. 제 상관을 뒤에서 찌르고, 동기도 병신 만든 악질이니 제대로 손 봐줘라. 필요하다면 죽여도 좋아.”

“그, 그건 좀...”

“스킬인지 뭔지라도 쓰라고. 보충병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아주 쓰레기들만 모아 보냈어. 갱생이 불가능하다 싶으면 일찌감치 쳐내야지.”

아무리 그래도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까지 남아있던 김선혁에게는 무리한 요구였다.

“뭘 그렇게 속닥거리시나! 엄마가 안 챙겨주면 말도 못 달리는 놈이냐!”

드레이크를 보고 눌린 기세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서인지, 거한이 사납게 소리쳤다.

“끙. 일단 겁은 줘볼게요.”

그러거나 말거나 김선혁은 오직 클라크가 준 미션을 어떻게 완수할지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럼 시작!”

잠시 텀을 두고 미리 준비한 깃발이 올랐다. 멀찌감치서 서로를 마주 보며 돌격을 준비하고 있던 그와 거한이 동시에 말 허리를 걷어찼다.

“어? 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구경꾼들이 얼 빠진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이 동시에 출발했는데 김선혁이 훨씬 더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거한은 제대로 속력을 끌어올리지도 못한 채 상대를 맞이해야 할 판, 이미 승부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놀라는 보충병들과는 달리 24연대 소속 기병들은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 과부 제조기가 얼마나 뛰어난 말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흉폭한 드레이크에게조차 두려움을 보이지 않고 뒷발질을 해대는 괴물 같은 전마, 그게 바로 스텔라였다.

“허업!”

거한이 끝에 두터운 솜뭉치를 매단 기병용 창을 확, 하고 내질렀다. 과연 제 스스로 최고의 기병이라 자칭할 만한 실력은 있었는지, 속도가 채 다 오르지 않았음에도 기세를 잘 실은 훌륭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두 번의 실전을 거친 김선혁은 더 이상 풋내기 기병이 아니었고, 후방에서 변변한 전투다운 전투도 못 치러본 기병 따위는 찜 쪄 먹을 실력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충돌 직전 속으로 한숨을 내쉰 김선혁이 작게 읊조렸다.

“윈드 피어싱.”

실전에서 사용했던 것처럼 한계까지 끌어 모은 속성의 힘은 없었지만, 단순한 차징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쾅!

허공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기세 좋게 달려들던 거한이 그대로 말에서 고꾸라졌다.

“으으...”

다행스럽게도 속도가 완전히 다 붙지 않아 낙사만큼은 피할 수 있었던 거한이 정신없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다 픽, 하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잘했어.”

24연대 소속 기병들은 함성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여주었을 뿐이다.

그에 반해 보충병들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저리 정확한 타이밍에 창을 찌를 수 있을까 생각했던 거한의 공격이다. 그런데 상대는 너무나 쉽게 그 타점을 흩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엇, 하는 소리에 뭔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거한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며 슬쩍 흩뿌린 방패에 밀려 그대로 낙마하고 말았다.

압도적인 기량차이에 의한 패배, 보충병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저런 사람이 막내라고?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괴물인 거야.”

“혹시 다른 사람들도 아까 그 괴물 타고 다니는 거 아냐?”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보충병들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럼, 이제 정말 막내 탈출인가.

눈앞에 보이는 보충병들이 전부 제 밥처럼 보여 그가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보충병들이 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뒤로 김선혁을 지목한 보충병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피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옥 같았던 대 기병 간의 전투마저도 이겨내고 사스테인을 전멸시킨 24연대 소속 기병들은 후방에서 날고 기었다는 명함만으로 뻗대기에는 턱없이 강했다.

“여기까지야? 이미 진 놈이라도, 다시 기회를 주겠다. 그러니 마음 있는 놈들은 지금 말해.”

몇 번이나 상대로 지목당해 기마 돌격을 하고도 지친 기색이 없는 클라크의 말에 보충병들이 고개를 꺾었다.

기세와 완숙함, 그리고 죽음을 초월한 배짱까지, 뭐 하나 이길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패배, 보충병들은 감히 다시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럼 전부 납득한 걸로 알아도 되나?”

클라크의 질문에 대답조차 못하고 고개 숙인 보충병들, 그런 그들을 향해 24연대 소속 기병대원들이 다시 한 번 환영 인사를 해주었다.

“잘 왔다. 신병들아.”

“내일부터는 제대로 뺑이 칠 각오해라. 진짜 사나이로 만들어주마.”

“아주 곡소리 나게 해주지.”

그런데 그 환영 인사라는 게 영 섬뜩하기만 해, 보충병들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

“꽤나 요란스럽게 했더군.”

“뭐, 기병 놈들 생각하는 거 다 똑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나보다 덜 떨어진 놈이 위에 있는 건 절대로 싫다. 나보다 느린 놈 뒤를 따라 달리고 싶지 않다. 그런 놈들이니 초장에 한 번 밟아줘야지요.”

중대장의 말에 클라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혹시 문제가 된 겁니까?”

“그럴 리가. 어차피 문제아들이라 몇 죽는다고 항의할 놈은 없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보낸 놈들도 있더군.”

“아, 혹시 정치적인 문젭니까?”

클라크가 골치 아픈 얼굴로 묻자, 중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슬런 백작의 서자가 부대에 섞여들어왔다.”

“패슬런 백작이라면 장남이 병약해 무척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사실이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서른을 넘기기가 힘들 거 같다더군. 3남이 있지만 뻐꾸기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어 가신들이 영 못마땅해 하는 모양이다. 차라리 서자라도 확실하게 피가 섞인 쪽을 밀자는 이들이 제법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클라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 스스로도 상황을 파악한 건지, 전출 명령에 군말 없이 따랐다더군.”

“한쪽은 전장에서 죽기를 바라고, 다른 쪽은 차라리 등뒤의 칼보다는 눈앞의 창이 덜 위험하다고 판단한 거군요.”

프레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누굽니까? 그 서자가?”

“잭슨 해밀튼.”

**

보충병들은 잔뜩 기가 죽었지만, 완전히 독기가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엉뚱한 곳에 분노를 표출하는 이가 있었다.

“너 이 새끼. 동기고 뭐고 없다는 거야? 혼자만 살겠다고 살랑거려?”

클라크에게 두들겨 맞아 코피가 터졌던 보충병이 잭슨에게 시비를 걸었다.

“군인이 명령을 따르는 게 뭐가 이상하지?”

그런데 마냥 샌님 같던 잭슨의 반응이 생각보다 강경했다.

“전우애도 모르는 새끼가...”

“거기까지.”

그때 보충병 막사에 들어선 클라크가 끼어들었다.

“전우애는 같이 사고 칠 때 생기는 게 아니라, 함께 사지를 겪고 나왔을 때 생기는 거다. 이 설 익은 새끼야.”

독기 잔뜩 오른 보충병들의 막사를 거리낌 없이 들락거리는 클라크의 모습이 꼭 토끼 떼를 휘젓는 늑대와도 같았다.

“혹시 아까 신고식으로 죽은 놈 있나? 있으면 대답해.”

죽은 사람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죽은 사람도 없었다.

“그럼 아파서 입도 못 벌릴 놈 있나? 대답해봐.”

보충병들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행이군. 전부 따라 나와.”

대답 못할 예시만 든다 했더니, 결국은 열외 없이 전부 따라나오라는 말이었던 모양이다.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보충병들은 클라크의 말에 군말없이 막사를 나섰다.

“신고식 아직 안 끝난 겁니까?”

그렇게 험한 꼴을 보고도 두려움 없이 질문하는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클라크가 제법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아니. 사내들끼리 푸닥거리를 했으면, 마무리도 깔끔해야지.”

그렇게 말하고 데려간 곳은 기존의 24연대 소속 기병들이 머무르던 막사였다.

“오? 신병들 왔네? 앉아. 앉아.”

“야. 망 잘 봐라. 중대장 아저씨가 허락하긴 했어도, 연대장 꼬장꼬장한 건 중대장도 못 막아준다.”

코를 쏘는 술 냄새에 보충병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보였다.

“어제까지 너희가 어디 부대에 있었고, 얼마나 잘 나갔고,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이었는지는 관심 없다.”

그런 그들을 클라크가 억지로 주저앉혔다.

“그 앞에 잔을 마시고 나면, 너희는 이제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의 대원이 되는 거다.”

꽤나 사내다운 말에, 망설이고 있던 보충병들이 잔을 들어 올렸다.

“좋아. 드레이크 기병대의 영광을 위하여!”

“드레이크 기병대?”

난생 처음 듣는 명칭에 누군가가 의문을 표하니, 요나슨이 나서서 설명해주었다.

“우리 부대는 앞으로 공식석상에서 넘버링이 아닌 부대명을 사용한다. 아직 정식으로 위에 보고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높은 확률로 드레이크 기병대가 우리 이름이 되겠지.”

기사단도 아닌 일반 기병대가 무려 고유 명칭을 갖게 되고, 또 자신들이 그 영광스러운 부대에 배속되었다는 사실에 보충병들이 들뜬 얼굴을 해보였다. 지금만큼은 조금 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따위는 완전히 잊은 모습이었다.

“드레이크 기병대를 위하여!”

“드레이크 기병대를 위하여!”

클라크가 다시 한 번 선창하자 보충병들이 힘차게 복창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냅시다.”

“그... 쪽만 믿고 따르겠수.”

문제아라지만 태생이 단순한 사내들답게 한 잔 술에 불만을 잊고 친한 척을 해오는 모습이 호쾌하기만 했다.

“그래. 잘 왔어.”

말투도 태도도 거칠어 영 신병다운 맛이 없었지만, 김선혁은 웃으며 자신의 후임들을 반겨주었다.

“어?”

주둔지에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충분할 정도의 술, 단순한 사내들이 모인 자리답게 금세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어? 근데 이 사람들 전부 어디 갔어?”

“단체로 오줌이라도 싸러 가셨나.”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마시다 보니 기존 드레이크 기병대의 대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가 남아있기는 했다.

“흐음.”

술이 잔뜩 올라 얼굴이 시뻘게진 김선혁이 그곳에 있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가셨...”

“야.”

대답대신 들려온 건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진 김선혁의 말뿐이었다.

“네? 네.”

드레이크를 타고 나타났던 첫 인상이 워낙에 강렬했고, 기병의 완숙함도 인정해줄 만한 선배였던지라 보충병들이 대번에 입을 다물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그런데 그렇게 들려온 말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

다음날 날이 밝고 집합한 보충병들은 마치 막 첫 임지에 배속된 신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짝 군기가 들어 있었다.

“생각보다 잘 다독여준 모양이군. 아주 마음에 들어.”

비록 그 얼굴이 엉망진창이기는 했지만, 중대장은 대범하게 받아 넘겼다. 도리어 흡족한 얼굴을 해보이기까지 했다.

“뭐, 막내가 열 일 했죠.”

클라크가 씨익 웃으며 김선혁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정작 과음의 여파로 기억을 잃은 그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을 뿐이다.

“맹스크에서 출발한 부대들이 도착하면, 바로 수도로 향할 테니 각자 개인정비 마치고 컨디션 조절하도록.”

“앗싸. 포상이다!”

중대장의 말에 부대원들이 환호했다.

막대한 포상금, 1계급 특진, 각종 훈장까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포상은 차고도 넘쳤다. 그리고 가장 많은 포상과 훈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김선혁이었다.

자작의 작위와 막대한 포상금, 그 중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용기병을 쓸모없는 병과라며 무시했던 자들과 당당하게 마주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때 그 책임자...”

그중에서도 몇 번이나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었던 왕실 등급 책정관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설렐 지경이었다.

곧 볼 수 있겠지.

그의 기다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수도로 향하기 전에 먼저 등급을 조정하기 위해 방문할 거라던 등급 책정관이 주둔지에 당도한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책정관의 얼굴이 낯익었다.

========== 작품 후기 ==========

*자정 연재본 두 편째입니다. 혹시 전편 안 읽으셨다면, 꼭 읽고 이번 편을 읽어주세요!

*하얗게 불태워 재도 남지 않은 글쟁이에게 다시 연료를 넣어주소서. 추천과 코멘트는 늘어진 글쟁이를 다시 타오르게 만드는 좋은 원료입니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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