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신고식 -->
“그래. 어쨌건 먼 길 오느라 수고했고, 돌아가서 쉬도록.”
날카로운 눈빛으로 온몸을 훑는다 싶더니, 사내는 금세 시큰둥한 얼굴로 나가보란 손짓을 했다. 잭슨은 그 성의 없는 행동에 내심 김이 빠지면서도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경례를 해보였다.
“중대장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의 경례에 사내, 프레드릭 중대장이 다시 한 번 휘휘 손을 저어보였다.
“따라오십셔.”
중대장 막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병 하나가 건들거리며 안내를 자처했다. 그 태도가 심히 불량했지만, 잭슨은 신경쓰지 않았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는 그깟 보병의 태도보다 새롭게 배속된 임지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컸던 탓이다.
‘국경지대로 향하게.’
처음 전출 명령을 받았을 때는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새로운 임지가 국경의 24연대라는 사실을 알고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다.
단 두 번의 전투로 악명 높은 사스테인의 이름을 지워버린 왕국 최정예 기병대,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가 자신이 앞으로 몸담을 곳이었다. 그 사실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여깁니다.”
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있는 사이에 벌써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고맙...”
들뜬 마음에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안내를 맡은 병사는 이미 멀찍이 물러나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민망함에 괜스레 뺨을 긁적인 잭슨은 이내 숨을 고르고 복장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는 기대하던 왕국의 영웅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힘차게 막사의 문을 제꼈다.
“이건 또 뭐하는 놈팡이야.”
“얼씨구. 어디 견습 기사나부랭이라도 오신 건가. 옷 번지르르 한 거 봐.”
미처 경례를 해보이기도 전에 날 선 비난이 쏟아졌다.
“아주 단추까지 다 잠그고, 수도원에라도 계시다 오셨어?”
자신이 기대했던 정예 기병대는 마치 기사단처럼 엄정한 분위기에 엘리트적인 인상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 불한당들은 대체 뭐라는 말인가. 얼굴마다 흉터 하나씩은 지닌 사내들의 모습은 역전의 용사라는 느낌보다는 불량스럽기만 했고, 그 어디에도 그가 기대했던 정예병다운 기상은 보이지 않았다.
음. 역시 전방의 야전부대는 다른 건가.
애써 저들의 모습을 좋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게 영 힘들었다.
“이런 개자식아. 거기 내 자리라고!”
“맡아놨어? 맡아놨어?”
서로 으르렁거리며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영락없는 시장통 건달패였다.
“끙...”
신고식조차 잊고 그 난잡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턱 하니 어깨를 잡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마지막인가?”
“네? 네!”
평범한 듯 하면서도 어쩐지 묵직한 분위기를 지닌 남자의 음성, 잭슨은 저도 모르게 군기가 바짝 들어 대답했다.
“저, 저 병신. 완전 계집앤데?”
킬킬거리는 비웃음과 조롱에 그제야 그는 막사에 퍼져 있던 사내들의 복장이 중구난방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직 눈앞의 남자만이 전방 기병 특유의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입 닥치고 짐 챙겨서 나올 준비나 하도록. 딱 서른만 세겠다.”
사내가 조용히 목소리를 깔자 소란스럽던 막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음성에 담긴 미묘한 살기에 압도된 것이다. 하지만 이 불량스러운 사내들은 외모만큼이나 거칠기 짝이 없었고, 자신들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더욱 반발했다.
“블루 코트 새끼들이 아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더니, 아주 사람을 물로 보는구만.”
국경지대의 기병들이 입는 푸른 제복은 그 자체로 왕국 최정예 기병을 상징하는 표징이자 영광 그 자체였다. 후방의 기병들은 전방의 베테랑 기병들을 선망했고, 더러는 능력도 없는 놈들이 실전 몇 번 해봤다고 질시하기도 했다. 지금 나선 사내는 아무래도 후자 쪽이었던 모양이다.
“댁들이 그렇게 사람을 잘 썬다며? 거 아무리 봐도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말이야.”
당장에라도 사고를 칠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사내, 하지만 블루 코트의 남자는 덤덤하기만 했다. 오히려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잭슨이었다.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중간에 끼어버린 그는 관절을 풀며 다가오는 사내와 24연대 소속일 게 분명한 남자를 보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거, 말을 하면 대답을...”
“...스물여덟, 스물아홉.”
사내의 말허리를 툭 자르고 튀어나온 무심한 음성, 잭슨은 그제야 남자가 처음에 짐을 챙길 시간으로 제한을 두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서른. 시간 됐다. 전부 막사 밖으로 튀어 나와.”
“도망치는 거요? 역시 사스테인이니 뭐니 전부 국경의 겁쟁이들이 만든 헛소, 억!”
남자가 도망친다고 생각한 것인지 기세 좋게 다가서던 사내가 코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어설프게 기 싸움 하지 마라. 기병은 입으로 싸우지 않아.”
“기병은 입으로 싸우지 않는다...”
남자의 모습이 꼭 자신이 꿈꾸던 기병의 모습이라 잭슨은 홀린 듯이 그 말을 따라했다.
“이런 개자...”
“그리고 그렇게 징징거리고 떼 쓰지 않아도 기회 줄 테니까, 그만 보채라. 이 핏덩이 새끼들아.”
피투성이가 된 코를 부여잡고 일어난 사내가 욕설을 퍼부었지만, 남자는 이미 막사를 나서고 난 뒤였다.
“도망치냐? 도망쳐? 봤지? 저 새끼 도망치는 거.”
기세에서 눌린 사내가 뒤늦게 제 위세를 회복하려 했지만, 코피 낭자한 얼굴로 징징거리는 모습은 영 볼품없기만 했다.
잭슨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막사를 나가려 했다.
“야! 나가지. 마. 앞으로 우리가 동기야. 동기끼리 척 져서 니가 편할 거 같아?”
“너도 나 무시하냐? 이 새끼야, 너 이름이 뭐야! 내가 다 기억했다고!”
등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그는 무시했다. 스스로 판단하건데 숫자만 많은 동기들보다는 저 블루 코트 하나가 더 무서웠다.
그런데 막사를 나서니 그렇게 무서운 블루 코트가 하나도 아니고 수십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
온갖 으름장을 뒤섞은 동기의 날 선 질문과는 달리 그저 짧기만 한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기세가 달랐다. 그 서슬에 굳어버린 잭슨은 저도 모르게 군기가 바짝 들어 정자세를 취해보였다.
“잭슨 해밀튼입니다! 동부 패슬런 영지에서 왔습니다!”
“좋아. 패슬런에서 온 잭슨, 저쪽으로 빠지도록. 넌 특별히 신고식 열외다.”
손짓을 따라 한쪽으로 물러난 잭슨은 막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동기들은 단체로 반항하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무도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래. 이쯤은 해야 진짜 기병이지. 말 잘 듣는 신병은 너무 재미가 없잖아?”
당연히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던 푸른 제복의 남자는 오히려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이 꼭 자신을 탓하는 것 같아 잭슨은 괜히 기가 죽었다.
“어차피 기다려도 더 안 나올 거 같지?”
“나올 리가 있나. 다들 지 부대에서는 조장이고 선임이고 대우 받던 놈들일 텐데.”
24연대 소속의 블루 코트들이 쑥덕거리더니 이내 뭔가를 결정 내리고는 손짓을 했다.
“어? 지금 뭐하시는...”
“신병은 보고만 있어.”
재갈 물린 전마 두 마리가 막사 끝에서 내달렸다. 그런데 그렇게 내달리는 말 뒤로 막사와 연결된 밧줄이 보였다. 느슨했던 밧줄이 이내 탱탱하게 당겨진다 싶더니, 금세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막사 중앙의 기둥과 함께 끌려왔다.
“으악!”
“뭐, 뭐야!”
순식간에 내려앉은 막사 안에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뭐긴 뭐야. 신고식이다. 존만이들아.”
그리고 그렇게 폭삭 주저앉은 막사 위로 블루 코트들이 올라가 신나게 매타작을 하기 시작했다.
“으악!”
“억! 내 코!”
비명과 신음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그마저도 잠잠해질 정도로 시간이 흐른 뒤, 블루 코트들이 막사의 천을 걷어냈다. 코가 깨지고 입술이 터진 얼굴은 벌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고, 찢겨지고 멍든 전신은 푸르고 뻘겋기만 했다. 기 싸움을 한다며 막사에서 버티던 사내들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었다.
“너, 이 비겁한... 으윽.”
맷집 좋은 사내 하나가 몸을 일으키며 내뱉은 욕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푸른 제복의 남자가 주먹질을 했다.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에 온 걸 환영한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환영의 말,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조장 클라크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이 좀마니들아.”
“억!”
푸른 제복의 남자, 클라크에게 짓밟힌 사내 하나가 또 다시 비명을 질렀다.
**
중대장과 클라크가 예상했던 것처럼 전국 각지에서 보낸 보충병들 중에 제대로 된 놈은 하나도 없었다. 개개인의 기량이야 어떨지 몰라도 불량스럽기 그지없는 태도나 반항기가 영락없는 반골들이었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눈에 독기가 그득한 것이 전혀 기가 죽은 모습이 아니었다.
“왜? 억울해? 제대로 싸우면 한방에 털릴 놈들이 기습해서 거들먹거리는 게, 꼴 같잖냐?”
보충병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굳이 대답이 없어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였다. 그래서 클라크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골라. 이중에서 만만한 놈이다 싶은 놈 하나만 골라. 만약 이기면 니네가 선임이다.”
그 말에 보충병들의 눈빛이 변했다. 매맞은 육신은 온전치 않았지만, 이대로 당장 붙어도 자신들이 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쪽에 서 있는 양반.”
“이야. 귀신 같네. 이번에도 한센이야?”
가장 먼저 나선 보충병 하나가 한센을 지목했다. 기병들이 낄낄대는데 화가 난 한센이 앞으로 나서며 투덜거렸다.
“대체 내가 어디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지?”
앞니 빠진 모습으로 투덜대는 모습 자체가 만만해 보였지만,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만! 그만!”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한센의 전매 특허 조르기에 걸린 보충병이 기절을 한 것이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 마지막 순간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텨낸 보충병을 보니 과연 기병이란 사내들이 얼마나 드센지를 알 수 있었다.
“그쪽이 조장이라든데, 거 내가 이기면 조장 자리도 줄 거요?”
호기롭게 나선 사내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덩치 큰 기병들 중에서도 유달리 거대한 체구를 한 사내는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 보였다.
“이길 수만 있다면.”
하지만 클라크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거한의 도전을 받아주었다.
“억!”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사내가 목젖을 강타당하고는 그대로 기절했다.
“난 그쪽.”
“나는 거기 거 화장한 양반.”
그 압도적인 모습에 기가 죽을만도 하련만 보충병들은 끊임없이 도전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가떨어졌다.
“이건 불공평해! 우린 몸도 성치 않다고! 말 위에서라면...”
“그래? 그럼 각자 말 끌고 와.”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보충병들을 보며 클라크가 또 한 번 기회를 주었다.
**
연병장에 모인 보충병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워낙에 다양한 곳에서 끌어 모은 탓인지 장비고 갑주고 하나도 통일된 것이 없었다.
그에 반해 맞서는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의 사내들은 정규군 특유의 장비로 마치 하나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분명 수도 보충병 쪽이 더 많고 기세도 흉악한데, 기이하게도 이렇게 마주 세워놓고 나니 24연대 기병들 쪽이 압도적으로 강해보였다. 그것이 단순히 통일된 장비에서 오는 중압감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위에 오르니 격차가 더욱 도드라졌다.
과연 실전 기병대.
훈련을 아무리 고되게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야전 부대 특유의 날 선 기세에 잭슨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럼 시작하지. 단체로 붙어도 좋고, 직접 상대를 지목해도 좋다.”
수적 열세를 무시하는 엄청난 자신감, 하지만 성질 더러운 보충병들에게도 집단전은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눈을 굴려대며 상대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번에 사스테인을 박살 낼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기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누구요.”
클라크에게 일격을 당해 기절했다 일어선 거한이 말 위에서만큼은 질 수 없다는 투로 제 상대를 찾았다.
“우리 막내를 말하는 것 같은데.”
“막낸지 뭔지는 몰라도 그 작자랑 붙어야겠소. 말 위에서만큼은 내가 최고요.”
거한의 말에 24연대 기병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얼굴, 거한이 놀림받았다 생각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감 좋아. 아주 좋아. 그래야 기병이지. 근데 진짜 말 위에서 최고야?”
“직접 확인해보시든가.”
“아니. 아니. 진짜라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최고의 기병하고 그놈이 붙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뭔가 숨겨진 뜻이 있는 듯한 말을 던지고는 기병들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올 때가 됐는데...”
“마침 저기 오네.”
저 멀리 보이는 새까만 점을 본 클라크가 웃으며 거한에게 물었다.
“진짜 후회 안 해?”
“사내가 바지를 내렸으면 노상방뇨라도 해야지. 말 바꿀 생각 없소.”
“좋아. 좋아. 그럼 막내 오면 바로 붙어봐.”
잠시 시간이 흐르고 멀찍이 보이던 점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렇게 나타난 ‘막내’를 본 보충병들이 입을 쩍 벌렸다.
고개 뻣뻣이 든 괴수의 눈동자는 마주하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고, 대체 뭘 하다 온 것인지 피칠갑을 한 턱주가리는 꿈에 나올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벌써 시작했어요?”
드레이크에 올라탄 검은 머리의 사내, 김선혁이 상큼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게 네 상대야.”
빵, 하고 웃음이 터진 클라크의 말에 거한이 하얗게 질렸다.
크르릉.
때마침 목을 울려대는 드레이크, 맹수의 목울림에 놀란 전마들이 이리저리 날뛰어댔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ㅜㅜ
*이번 편에 이어 시간 차 없이 다음 편 바로 업데이트합니다. 지금 바로 다음편 확인 가능하십니다! 껄껄.
*중요! *중요!
오늘 올릴 두편 중, 첫번째입니다. 한 편 건너 뛰는 사태가 없도록 다음 편도 꼭 읽어주세요! 추천과 코멘트도 잊지 마시라능! 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