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서리 봉우리의 드레이크 -->
비록 군데군데 빈 자리가 있긴 했지만 퍼석퍼석하던 비늘의 비루함은 온데간데없이 윤기가 돌았고, 앙상하게 거죽만 남아있던 거체는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었다. 부실한 목 근육 탓에 유달리 커 보이던 머리 역시 이제는 제법 균형이 맞아 보였다. 앞발 축 늘어트린 채 타조처럼 겅중거리던 걸음도 지축을 걷어차는 두 발 공룡의 힘찬 발걸음이 되었다.
용의 아종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위풍당당한 모습, 이렇게 만들기까지 그야말로 김선혁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드레이크는 지독한 먹보였다. 처음에야 워낙 굶주려 있었던지라 육포 몇 점에도 혹,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기를 호소하며 불만을 표했다. 급기야 달리던 걸음조차 멈추고 반항을 할 정도였다.
결국 김선혁은 드레이크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 때 아닌 사냥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한센은 그다지 좋은 사냥꾼이 아니었고, 그는 아예 사냥 경험이 전무했다. 되도 않을 사냥꾼 흉내를 내며 날마다 평원을 뒤지고 다녀야 했고, 그렇게 겨우 구한 먹이로는 드레이크를 잠시 달래는 정도에 불과했다.
정말로 죽을 고생을 했다. 먹이고 또 먹이고, 나중에는 짐승을 찾을 수 없어 몬스터까지 사냥해야 했다.
이름 모를 평원의 몬스터들은 저마다 치명적인 발톱과 송곳니를 갖고 있었고, 더러는 맹독을 지닌 놈들도 있었다. 크기도 작게는 대형견만한 놈들부터 크게는 드레이크보다 큰 놈들도 있었다. 생김새도 천차만별,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어지간한 병사들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안전한 듯 보이는 세상의 이면에는 이토록이나 끔찍한 괴물들이 웅크리고 있었고, 평범한 인간은 그 앞에서 그저 씹기 좋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아티야와 용기병의 압도적인 스테이터스 수치를 이용해 어렵게나마 몬스터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됐는지 성장 느린 용기병이 레벨 업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힘들게 구한 몬스터의 시체로 드레이크는 포식을 했다. 그리고 몇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기력을 되찾고 제 스스로 사냥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드레이크는 그저 덩치 큰 방패에 불과했고, 결국 스스로가 고생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연일 가실 일이 없는 몬스터의 악취, 역한 피 냄새에 코가 무감각해질 무렵 갑작스레 드레이크가 쓰러졌다. 혹시 먹이로 삼았던 몬스터 중에 극독을 지닌 놈이 있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발을 동동 구르며 하루를 꼬박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드레이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일어났다.
그때부터였다. 드레이크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시간을 많이 허비한지라 드레이크의 상태를 돌볼 상태도 없이 다시 시작한 질주, 달리는 동안 드레이크의 비늘이 우수수 떨어졌다.
“뭐야. 너 탈모냐?”
늙은 드레이크를 얻어 하다하다 이제는 별 꼴을 다 본다며 김선혁은 기겁을 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억세 털 대신 비늘로 몸을 두른 드레이크가 탈모에 시달릴 리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 그렇게 떨어져 나간 자리에 새롭게 돋아난 비늘이 전의 것과는 달리 윤기 도는 비늘임을 확인했다.
“너, 허물 벗는구나?”
그제야 드레이크의 변화가 파충류가 허물을 벗는 탈피 과정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드레이크의 변화를 알아차린 이후, 김선혁은 이 끔찍할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괴수의 식사에 각별히 공을 들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위풍당당한 드레이크였다.
“모, 몬스터다!”
하지만 변화가 너무 극적이었던 모양이다. 복귀가 늦어지는 자신들 탓에 내내 마음 졸였을 게 분명한 기병대의 사내들이 기겁을 하며 무기를 찾는 것을 보았다.
“아냐! 아냐! 이거 몬스터 아냐!”
황급히 소리쳐 그들을 말리려는데, 타이밍 좋게 드레이크가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앙.
자신을 향한 적의가 마음에 안 드는지 그 어느 때보다 사납게 목을 울리는 드레이크, 괴수의 포효에 망루에 설치된 비상종이 땡땡거리며 적막하던 주둔지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적이다!”
“궁병들은 망루로! 보병들은 목책으로!”
지난 전쟁의 여파인지 지독스러울 정도로 신속하게 임전태세를 갖추고 몰려드는 병사들을 본 김선혁이 와락 울상을 지었다.
“망했네.”
**
평화롭던 주둔지에 찾아온 난데없는 난리는 연대장까지 나서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김선혁은 클라크를 비롯한 동료들과 그저 간단한 눈인사만을 나눈 채 연대장의 막사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뭉뚱그려 대충 설명했던 그간의 사정을 다시 자세하게 설명했고, 다행스럽게도 연대장은 늦은 복귀와 소란을 책잡기보다는 축하부터 해주었다.
“놀랍군. 저 녹테인 너머 어딘가의 왕국에는 그리핀을 길들여 타는 그리핀 라이더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드레이크라니. 이건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용기병의 진정한 힘이니 뭐니, 한껏 추켜 세워주는 연대장의 말에 김선혁은 드레이크보다 훨씬 대단할 게 분명한 진짜 용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이깟게 뭐가 대단하냐고 내심 우쭐거렸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속으로 거들먹거리면서도 입 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것만큼은 그도 피할 수가 없었다.
“알겠네. 군율이 지엄하다 하나, 귀관들의 특수한 사정을 이해도 못할 바가 아니네. 그러니 이번 일은 특별히 불문에 붙이겠네.”
김선혁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단, 귀관과는 별개로 한센 자네는 징계를 피할 수 없겠어.”
“어, 어째서!”
병풍처럼 뒤에 서 있던 한센이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뜨악한 얼굴을 해보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면 자네라도 먼저 달려와 보고를 했으면 될 거 아닌가. 자네라면 시간 맞춰 주둔지로 복귀해 사정을 알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텐데?”
김선혁은 드레이크를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고, 한센은 그냥 생각이 없었다. 연대장의 말에 반박할 말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두달치 급료의 감봉, 그리고 보름동안 조장급 책임자의 감독 하에 중갑 기동 훈련을 명하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달픈 법이고, 모진 놈 옆에 있으면 벼락에 맞는 법이다. 지금의 한센이 딱 그 경우였다.
“휴우. 다행이다. 강등이라도 당하나 했네.”
하지만 좋지 못한 곳을 다치고도, 앞니가 부러져 팔푼이가 되고도 늘 긍정의 힘을 잃지 않았던 한센은 오늘도 제 처지에 불만을 표하기보다는 안도했다.
**
“저게 드레이크야? 어떻게 길들였어?”
“용기병이 원래 드레이크를 타는 병과야?”
“이거 물어?”
“혹시 다른 사람도 한 번 태워줄 수 있어?”
쏟아지는 질문공세, 도대체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했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져오니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결국 홀로 남겨진 드레이크가 난동을 부릴지도 모른다며 핑계를 대고 나서야 겨우 사람들을 뿌리칠 수 있었다.
“후우.”
혹시 모를 난동을 대비해 주둔지의 창고에 가둬둔 드레이크를 본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새 또 잠이 들어 목을 늘어뜨린 채 그르릉 그르릉 코를 골아대는 그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아오. 삭신이야. 아주 죽겠구만.”
뒤늦게 여독이 밀려왔다. 제 딴에는 멋들어지게 등장한답시고 완전히 길이 들여지지 않은 드레이크에 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 여파가 지금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말과는 달리 기수에게 그다지 친절한 탈 것이 아니었다. 상하 좌우로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드레이크의 등위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불편했고,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완전히 굴복을 하지 않은 탓인지 틈만 나면 기수를 떨구려고 풀쩍 뛰어 오르기 일쑤라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놀라는 꼴들 하고는...”
하지만 무리한 보람은 있었다. 드레이크를 보고 놀란 동료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괜스레 뿌듯해졌다. 비록 치기일지언정 그간 용기병이라는 괴이한 병과로 인해 받아온 울분과 서러움이 단숨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 Level. 7
□ 용기병(Dragon Rider)
□ 고유 속성
-풍(風) / 속성 지배력 99
:풍아(風牙)
:풍신(風身)
:풍령(風靈)
□ 계약 정령
-하급 바람의 정령(아티야)
□ 테이밍 드래곤 목록
-드레이크(?) / 복종도 53
: 상태 ? 허기, 평화, 숙면
□ 근력 29 / 지구력 28 / 민첩성 31 / 마법 저항력 37
□ 보유 스킬
-드래곤 테이밍
-드래곤 라이딩(하급)
-차징(Charging)(風)
-윈드 피어싱(Wind Piercing)(風)
-속성 무기술(중급)
-상급 기마술
: 상급 기마술 + 차징 = 혼연일체의 차징(風)
-왕국 표준 창술(상급)(風) 〈-〉 왕국 표준 기마창술(상급)(風)
-왕국 표준 검술(하급)(風) 〈-〉 왕국 표준 기마검술(하급)(風)
-중갑 기동(30Kg) 〈-〉 중갑 기마 기동(75Kg)
-보병 방패술(상급) 〈-〉 기병 방패술(상급)
-상급 작업 기술(토목)
오랜만에 열어본 스테이터스 창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이 변화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들어오는 드레이크의 상태, 김선혁은 잠이 든 드레이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먹깨비를 먹여 살리려면 결국 말뚝 박는 수밖에 없네.”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마음이 적당한 핑계까지 생기고 나니, 완전히 기울어버렸다.
**
“이게 드레이크라는 놈인가.”
이미 맹스크 요새까지 드레이크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것인지 사령관이 몸소 주둔지로 달려왔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우리 왕국에 이런 놈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 과연 듣던 대로 아주 흉포한 모습이군.”
“네. 뭐. 그렇습니다.”
김선혁은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을 뻔 했다. 사령관이 과연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가분수에 배만 볼록 튀어나와 볼품없던 드레이크의 모습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했던 탓이다. 하지만 지금 사령관이 보는 드레이크의 모습이 제법 위맹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 그는 웃음을 참고 대답을 해주었다.
“혹시 이놈, 다른 사람들도 탈 수 있는가?”
“아직 길이 덜 든 놈이라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굴복시킨 뒤에는 또 모르겠지만 그다지 가능성이 높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용기병이 괜히 용기병이겠는가. 테이밍 스킬의 보정을 받고 나서야 겨우 관계를 맺은 드레이크다. 그런 드레이크를 관련 스킬도 없는 사람들이 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쉽구만. 가능하다면 내 억만금을 쏟아 부어서라도 드레이크란 드레이크는 싹 쓸어올 생각이었네만.”
역시나 자나깨나 왕국의 앞날 생각뿐인 사령관다운 말이었다.
“그래서 휴가는 어떻든가.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변하지는 않든가.”
한참을 드레이크를 관찰하며 감탄을 토하던 사령관이 뒤늦게 질문을 했다.
“변하는 부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애매한 대답이군. 그래서 결정은 내렸나.”
사령관의 대답에 김선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힘있는 어투로 대답을 해주었다.
“말뚝 박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사령관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탐을 내던 인재가 흉폭한 괴수를 길들여 돌아왔으니 그 기쁨이 배가 되었던 모양이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사령관의 얼굴을 보며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니 주십시오. 작위도 봉토도. 전부 받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다음 챕터는 '작위 수여식'입니다.
*드디어 연참의 날입니다. 오늘 오후에서 저녁 사이에 한편 추가로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찡긋.
*추천과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일일이 답댓은 못해드리고 있지만, 몇번씩 확인하며 연재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