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37화 (37/305)

<-- 17. 서리 봉우리의 드레이크 -->

봉우리에서 내동댕이쳐졌던 드레이크는 잠시 사람들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푹 꺾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뜩이나 굶주려 체력이 떨어져 있다가 낙하의 충격까지 받아 기력이 더 떨어진 모양이었다.

김선혁으로서는 그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테이밍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타고난 야성과 흉폭함을 누를 정도로 완벽하게 복종을 시킨 것은 아니었던지라, 차라리 저렇게 축 늘어져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는 내친 김에 네 발을 제외한 드레이크의 전신을 로프로 꽁꽁 묶었다. 그중에서도 억센 주둥이를 몇 번이나 칭칭 감아 가엾은 누군가가 이 괴수의 먹이가 되는 상황을 방지했다.

[허기. 불만. 답답. 무기력.]

드레이크는 제 몸을 감은 로프가 몹시도 못마땅한 모양이었지만, 육포 몇 점으로 유혹하니 졸래졸래 잘도 따라왔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몹시도 험난했다. 가뜩이나 협소하고 위험한 잔도를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드레이크까지 끌고 내려가려니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고생을 하며 나아가기를 한참, 힘 빠진 드레이크와 함께 넘기에는 험난한 길이 곳곳에 있었다. 그때마다 김선혁은 봉우리에서 그랬듯이 드레이크를 밀고 굴리며 산을 내려갔다.

크아앙.

비명을 지르며 산길을 구르는 괴수를 본 한센과 일행들이 질린 얼굴을 해보였다.

“저, 저렇게 막 굴려도 되는 거야?”

“몸도 단단하고, 저도 나름 신경 써서 굴리고 있어요.”

스스로도 드레이크에게 미안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쇠약해진 괴수를 데리고 하산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봉우리 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부대로 복귀하는 일정마저 촉박해지고 말았다.

다른 방법을 찾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저런 위험한 놈을 영지로 데려가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은 저리 힘이 없어 얌전히 있는다지만 기력을 되찾으면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을 괴물입니다.”

험난한 하산길, 하지만 그보다 더욱 곤란한 것은 드레이크의 존재를 탐탁찮아 하는 일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넘쳐나는 이곳 세상에서도 드레이크는 흉포하다 알려진 괴수, 아무리 기력이 고갈된 드레이크라고 해도 영지로 끌고 가는 것을 영 꺼림칙해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고가 터졌다. 올라가는 길에 바바예티 무리를 만나 절벽 아래로 굴려 떨어트린 적이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그 시체가 쌓인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드레이크가 난동을 부린 것이다.

[식욕. 식욕. 식욕. 불만.]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달려가 바바예티 무리의 시체를 물고 뜯는 드레이크의 모습은 앙상한 모습과는 별개로 완연한 포식자의 그것과도 같았다.

멍하니 넋을 놓고 드레이크가 아구아구 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일행은 마침내 드레이크의 식사가 끝이 났을 때 저도 모르게 창과 칼을 들어올리기까지 했다.

“밧줄로는 안 됩니다.”

칭칭 감아두었던 로프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흉물스러운 살점과 피만이 가득했다. 그나마 안전장치라고 해두었던 로프마저 소용이 없으니 일행은 한층 더 드레이크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선혁.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영주의 아들이라지만, 지금의 나는 24연대 소속 기병일 뿐이야. 그런 내가 저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멋대로 구는 건 아버지도 바라지 않을 거야.”

이제는 완전히 드레이크를 끌고 가는 것을 반대하기 시작한 일행, 결국 김선혁은 산의 초입에 드레이크와 함께 남게 되었다.

[허기.]

“그렇게 처먹고도 또!”

바바예티의 시체로 배를 채운 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허기를 호소하는 드레이크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용기병 전용 탈것을 얻겠다고 이 먼 곳까지 왔더니, 웬 거지새끼를 주워버렸다.

앞으로 거쳐야 할 고난과 역경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드레이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말만 잘 듣게 만들면...”

전장을 누비는 기병들 사이로 질주하는 드레이크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아무리 잘 훈련된 전마라고 해도 이 흉폭한 괴수 앞에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

“이게 그 드레이큰가?”

이미 보고를 받았는지 볼프마이어 남작과 영주성의 주요 인사들이 죄다 몰려왔다. 흉폭한 괴수를 기대하고 달려온 그들은 흔치 않은 드레이크의 존재에 놀라워하면서도, 거죽만 남은 앙상한 모습에 당황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남작이 차마 내뱉지 못한 ‘볼품없다.’라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해 김선혁은 민망한 얼굴을 해보였다. 자신이 보기에도 앙상한 가죽에 배만 볼록 나온 드레이크의 모습은 영 위엄이 없었다. 몸이 마르니 머리만 커 보여 차라리 우스꽝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제가 전직한 병과가 이 놈을 꼭 필요로 해서...”

“용기병이라고 했든가? 하긴 저 놈이 그래도 신화에서나 들었던 용이랑 비슷하게 생기긴 했군.”

남작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해주었다.

“그런데 자네, 저 드레이크가 늙은 드레이크라는 건 아는가?”

“네?”

사실 드레이크라는 말에 눈이 돌아가 이곳까지 왔지만, 그는 정작 드레이크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와중에 남작이 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니 귀가 쫑긋 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실제로 본 건 처음이고 들은 이야기도 많지 않네만, 와이번이나 드레이크들은 죽을 때가 되면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가 죽을 때를 기다린다더군. 봉우리에서 죽어가고 있었다고 들었네만, 아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저놈은 꽤나 나이를 먹은 놈일 걸세.”

그런데 그 정보라는 게 김선혁이 기대했던 것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는 단순히 굶주림 때문에 저런 몰골이 되었다 생각했던 드레이크가 사실은 늙어 볼품이 없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좌절했다.

“왜 하필...”

“아니. 그래도 보니까 당장 죽을 거 같아보이지는 않는군. 듣자 하니 식욕이 보통이 아니라고? 제 스스로 죽으려고 올라갔던 놈이라면 이제 와서 새삼 먹을 걸 밝히지는 않을 걸세. 그러니 내가 잘못 알았다 치고, 못들은 걸로 하세나.”

자신의 말에 극도로 실망한 모습을 보이는 김선혁을 보며 남작이 뒤늦게 수습을 했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뒤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지만,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아무리 북방의 사내들이 두려움을 모른다지만, 저런 괴물을 영지에 들였다가는 사람들이 동요할 걸세.”

“이해합니다.”

산행의 피로를 풀어야 했지만, 지금 당장 영주성에서 신세를 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간이 막사를 제공받아 그곳에 자리를 잡고 한센이 자신의 짐과 말을 가져다주기를 기다렸다.

아그작. 아그작.

그 사이 남작이 제공한 다 자란 돼지 한 마리를 먹어치운 드레이크가 입맛을 다시다가 도로 누웠다. 그 모습이 딱 식사를 마치고 아랫목 찾아 눕는 노인의 모습과도 같아 그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내내 그려왔던 위풍당당한 용기병의 모습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럴 때 용이라도 말을 걸어 시원하게 답을 주었으면 좋으련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용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

김선혁은 간이 막사에서 하루를 머물고, 한센과 함께 귀환길에 올랐다. 하루 사이에 두 마리에 달하는 돼지를 먹어치운 드레이크는 처음보다는 많이 활기가 있어 보였다.

“이거 일정이 촉박한데, 저놈이 따라올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한센의 우려는 당연했다. 뒤뚱거리며 뒤를 따라오는 드레이크의 모습은 그가 보기에도 영 미덥지 않았다.

“일단 가죠. 최소한 탈영죄는 피해야죠.”

김선혁은 서서히 스텔라의 속도를 올렸다. 다행스럽게도 드레이크는 곧잘 따라왔다. 혹시라도 주저앉거나 도망치면 곤란한지라 내내 뒤를 신경쓰고 있었던 그는 무리 없이 자신을 따라오는 드레이크의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그럼 조금 더 속도를 내볼까요?”

내친 김에 그는 드레이크의 속도와 지구력을 테스트해볼 생각으로 스텔라의 속도를 올렸다.

“어? 잘 따라오는데?”

한센이 뒤를 돌아보고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놀랍게도 다 늙어빠진 드레이크는 뒤처지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속도를 올렸고, 드레이크는 필사적으로 그 뒤를 따랐다.

“음. 말보다는 좀 느리네요.”

그렇게 내달리기를 한참, 김선혁은 의외로 저 앙상한 드레이크가 빠르고 끈질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전력을 다해 전마가 내달리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영 미덥지 않았던 모습에 비하면 꽤나 준수한 질주였다.

“중갑 걸치고 이거저거 생각하면, 영 못 쓸 정도는 아닌 모양인데요.”

마갑을 걸치고 중갑의 기병을 태운 전마는 기동력 부분에서 많은 페널티를 받는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면 드레이크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게 마냥 꿈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너 저거 타고 달릴 수 있겠어?”

상하 운동이 일정한 전마와 달리 겅중대며 따라오는 드레이크는 승마용으로 영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죽어라고 함 매달려봐야죠.”

왠지 처음 승마를 시도해보았을 무렵이 떠오른 김선혁이 암울한 얼굴을 해보였다.

아룡을 얻었지만, 용기병의 길은 아직도 험난하기만 했다.

**

한달의 기일을 하루 남겨두고 거의 모든 기병대원들이 주둔지로 복귀했다. 개중에 늦게 도착한 이들도 그날 저녁에는 주둔지에 도착해 복귀신고를 마쳤다.

남은 것은 오직 한센과 김선혁 뿐이었다.

“얘들 뭔 일 생긴 거 아니야?”

“끄응. 한센 같은 놈한테 막내를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클라크와 요나슨을 비롯한 기병대원들은 주둔지의 입구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다보았다. 하지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어도 여전히 한센과 김선혁의 복귀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그들은 탈영에 대한 엄벌을 우려하게 되었다.

“한센이야 감봉 받고, 뺑뺑이 좀 돌고 말겠지만. 막내가 문제네.”

“아니. 한센도 따지고 보면 책임을 피할 수 없어. 상부에서 막내의 원행을 묵인한 건, 한센의 지도를 믿었기 때문이니까.”

꽤나 대우를 받는 이방인이었지만, 탈영 문제에서만큼은 현지의 병사들보다 몇 배는 엄격한 규율을 적용 받았다. 이대로라면 승급이고 작위고 징계를 받을 위기, 중대장마저도 안절부절하며 주둔지의 입구를 바라볼 정도였다.

자기 소속의 이방인이 탈영으로 기록되는 건 상급 기사 승급이 확정된 그에게도 치명적인 일었던 탓이다.

날이 어두워가고, 이제는 정말 탈영의 혐의를 피할 수가 없을 상황이 되었다.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들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주둔지의 입구까지 나와 김선혁과 한센을 기다렸다.

“이 미친놈은 대체 막내랑 어딜 간 거야!”

클라크가 과격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믿고 막내를 맡겼는데 정작 본인도 돌아오지를 않으니 화가 치민 것이다. 요나슨을 비롯한 다른 기병들도 화를 내거나 걱정을 하거나 안절부절 못하며 주둔지를 서성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해는 떨어졌고, 그들은 여전히 복귀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복귀 신고 시간을 놓친 것이다.

“지금이라면 내 직권으로 가벼운 징계로 끝낼 수 있다.”

프레드릭 중대장의 말을 듣고 나서야 흥분해 있던 기병들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은 나도 힘들다. 전령을 보내고 수색대를...”

말이 수색대지 사실은 추격대다. 그리고 추격대에게 잡혀 들어오면 절대로 좋게 끝나기는 힘들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기병들의 얼굴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그때.

“어? 저기!”

개중에 눈이 좋은 기병 하나가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인마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한센이랑 막내다!”

“미친 새끼들! 사람 숨 넘어가게 만들고 있어!”

늦었지만 수습이 가능한 상황, 기병들은 때늦은 동료의 복귀에 환호했다. 중대장도 드물게 안도한 얼굴로 지각생들의 귀환을 반겼다.

“어? 근데 저거 뭐야. 이상한 놈을 달고 오는데?”

쾅쾅쾅쾅.

말발굽 소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요란스러운 발소리, 겅중거리는 그림자 하나가 두 마리 말 사이에 끼어 있었다.

“모, 몬스터다!”

“아냐! 아냐! 이거 몬스터 아냐!”

단숨에 전투 태세를 갖추려는 기병들을 보고 기겁을 한 김선혁이 소리쳤다. 그런데 그가 올라탄 드레이크의 모습이 처음 프로스트베그문트 영지를 떠났을 무렵과는 완벽하게 달라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글쟁이의 가장 큰 단백질원입니다.

*오늘 내일 중으로 자정 연재본 외에 한편 추가로 연재하겠습니다. 연참 부스터, 가동합미다!

*제목은 조금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ㅜㅜ 너무 어렵습니다. 제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