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서리 봉우리의 드레이크 -->
꼿꼿하게 세운 고개는 오만하고, 내려다보는 시선은 흉폭하다. 오색영롱한 비늘로 무장한 거체는 강인하고, 내뱉는 숨결은 유황불을 토해내듯 뜨겁다. 날개 잃어 창공을 누비지는 못하지만 지상에서만큼은 적을 찾아볼 수 없는 맹수, 그게 바로 김선혁이 상상한 드레이크였다.
“어?”
그런데 눈앞에 있는 드레이크는 대체 뭐란 말인가.
반쯤 내리깐 눈은 초점조차 없이 탁하기만 했고, 비쩍 마른 몸뚱아리를 덮은 비늘은 차라리 퍼석퍼석해 보였다. 유황불은커녕 내쉬는 숨결마저도 언제 끊어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괴수의 모습이 과연 자신이 찾던 그 드레이크가 맞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맥아리 없이 고개를 늘어뜨린 거대 도마뱀, 드레이크는 죽어가고 있었다.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잠시간 드레이크와 교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활성화된 용기병만의 고유 스킬, 드래곤 테이밍을 통해 김선혁은 드레이크의 상태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굶주림, 쇠약. 아사직전]
그리고 그렇게 엿본 드레이크의 상태는 황당했다. 드레이크는 지금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경우야.”
휴가를 전부 바쳐 이 먼 곳까지 달려왔다. 죽을 힘을 다 해 봉우리를 올랐고, 겨우 드레이크를 만났다. 기대와 설렘 속에서 마주한 드레이크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쇠약한 상태였다.
얼빠진 얼굴로 간신히 숨만 몰아쉬는 드레이크를 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드레이크의 상태가 돌변했다.
[허기. 식욕. 절박.]
크어어어어.
드레이크가 축 늘어트렸던 고개를 바짝 치켜 올리며 흉폭하게 목을 울렸다. 과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그 괴수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위맹한 기세, 필시 아사직전의 상황에서 제 발로 걸어들어온 사냥감을 보고 마지막 힘을 낸 것이리라.
‘얍!’
하지만 그 기세는 길지 않았다. 아티야가 허공에 날아올라 앙증맞은 기합소리를 낸다 싶더니, 꼿꼿하게 세워졌던 드레이크의 목이 대번에 무너져버렸다. 마치 행사장에 세워둔 바람 인형이 쓰러지듯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탈진. 체념. 절망.]
방금 전보다 몇 배는 강하게 전해져 오는 드레이크의 사념에 김선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일단 드레이크를 살려야 했다.
**
오물오물.
아구아구가 아니었다. 다 자란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물고 뜯을 것처럼 우악스러운 드레이크의 주둥이가 오물오물 거리며 음식물을 씹고 있었다. 그게 그 커다랗고 흉악한 모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보이는 행동이 우스꽝스럽다고 해서 타고나기를 흉폭하게 태어난 생김새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거대한 턱 사이로 손을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나선 것이 아티야였다.
‘옳지. 착하다.’
흉악한 주둥이 사이로 들락거리며 물에 불린 육포를 전해주는 아티야의 모습이 흡사 강아지 밥 주듯 여상스럽기만 하다. 그 강아지라는 게 지나치게 크기는 했지만 말이다.
“음. 이걸로는 턱도 없겠네.”
배낭 안의 식량의 전부 털어냈음에도 드레이크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덩치가 크다 보니 사람이나 겨우 배를 채울 법한 육포로는 어림도 없었던 모양이다.
“끄응.”
잠시 드레이크와 봉우리 아래를 번갈아 바라보던 김선혁은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배낭을 내려놓았다.
“금방 올 테니까, 기다려.”
**
“아이고. 이젠 내가 죽겠다.”
대자로 뻗어버린 김선혁이 죽겠다고 난리를 부렸다. 드레이크의 배를 채울 식량을 가져오겠다고 야영지를 다녀왔더니 완전히 지쳐버린 것이다.
보람은 있었다.
당장에라도 꿱, 하고 죽어버릴 것 같던 드레이크가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은 것이다. 초점 없던 눈동자에 슬며시 빛이 돌아온 것을 본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이런 배은망덕한 새끼!”
최대한 끌어 모은다고 모았다지만 그 정도 양으로는 드레이크의 배를 완전히 채울 수 없었고, 이 괘씸한 괴수는 부족한 식사를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쩍 벌린 주둥이가 턱을 아구거리는 것을 본 그가 기겁하며 몸을 틀었다.
텁.
눈앞에서 꽉 다물린 주둥이를 잠시 바라보던 김선혁이 화가 나서 훤히 드러난 머리통을 후려쳤다.
“악!”
하지만 단단한 비늘로 감싸인 드레이크를 후려쳐 봐야 자신만 손해일 뿐이다. 밀려드는 통증에 비명을 지른 그가 펄쩍 거리며 드레이크를 피했다.
“멈춰! 이 은혜도 모르는 도마뱀 새끼야!”
아직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던지라 드레이크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봉우리의 정상은 그다지 넓지 않았고, 육중한 드레이크가 이리저리 움직이자 금세 비명을 지르며 돌부스러기를 떨구어댔다.
“무너져! 무너진다고!”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드레이크의 난동에 요동을 치던 봉우리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로 추락을 면한 김선혁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드레이크도 영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건 아닌지, 난동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진정해. 응? 자, 착하지. 나는 더 도와주려고 온 사람... 하, 나. 진짜 짜증나네.”
말을 하다 보니 속에서 울컥하고 억울함이 올라왔다. 드레이크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이 먼 곳까지 찾아왔건만, 막상 와보니 다 죽어가는 놈이 있었다. 또 그 놈을 살려주었더니 이번에는 자신을 잡아먹겠다고 난리였다.
이러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아닌데,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착하지. 주인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아티야가 나서서 드레이크에게 속삭이자 괴수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경계.]
그게 또 더 화가 나서 김선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네 주인이다. 내가 네 주인이다.”
언젠가 성질 드센 과부 제조기를 제 것으로 만들었을 때처럼 그는 강한 의지를 담아 드레이크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다시 한 번 발동되었다.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창공에서 추방당해 대지로 내몰린 아종의 용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김선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통하든 통하지 않든 끊임없이 드레이크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훌렁 내려가면 혼자 남아서 뭐 할래. 이번에는 정말 죽는다고.”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드레이크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또다시 실패 메시지가 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드레이크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드레이크가 망설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반복되던 실패 메시지 사이가 드디어 달라졌다.
[드래곤 테이밍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
[드레이크에게 테이밍을 시도했습니다.]
[드레이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메시지를 본 김선혁이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었다.
“옳지. 착하지. 나랑 함께 하면 이런 거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을 거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비상식량을 꺼내 드레이크 앞에서 흔들었다. 꿀떡 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울렁거리는 울대, 드레이크가 턱, 하고 주둥이를 내밀었다.
“어허. 안 되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우리 매너 지키자고.”
손을 쭉 뒤로 뺀 김선혁이 그대로 육포를 내던졌다. 허공에서 육포를 낚아챈 아티야가 까르륵 거리며 하늘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녔다.
또르르.
원체 덩치가 큰 드레이크라 눈도 크다. 그 커다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치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따라올래? 말래?”
한참동안이나 아티야를 쫓던 드레이크의 눈동자가 돌연 그를 향했다. 그 어떤 식욕도 흉폭함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괴수의 그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투명했다.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빨려들 듯 그 눈동자를 마주 응시했다.
[그대를 따르겠다.]
드레이크의 사념은 언어라기보다는 의지 그 자체였다. 머릿속에 낮게 울려대는 사념에 그가 환호했다.
“아자!”
주먹 불끈 쥐고 내지른 환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테이밍에 성공했습니다!]
[드레이크가 넘어왔습니다!]
[비록 완벽하게 굴복시켜 온전한 주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용의 아종과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습니다.]
먼 훗날 누군가가 그에게 이 흉폭한 괴수를 어떻게 길 들였냐고 묻는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리라.
허기 앞에 장사 없다고.
**
드레이크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데리고 내려간다.”
혼자 오르내리기에도 벅찬 봉우리를 저 거대한 드레이크까지 짊어지고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몰라 아티야라면 가능할까 하여 시험해보았더니, 비쩍 마른 육체나마 드레이크의 거체는 하급 정령 정도로 운반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넌 대체 어떻게 올라온 거니?”
이쯤 되니 이 거대한 몸을 이끌고 이 높은 곳까지 무슨 수로 올라온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처음 테이밍에 성공한 이후, 드레이크는 더 이상 제 의지를 전해오지 않았고, 간간히 감정의 편린만을 전달해왔을 뿐이었다.
[허기.]
“이 새끼는 순 먹는 생각뿐이야!”
그리고 그렇게 느껴진 드레이크의 사념은 이 난국을 타파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
“대체 위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서리 봉우리가 보이는 야영지를 바라보는 한센의 눈동자에 걱정이 떠올라 있었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괴성이 들려온다 싶더니, 지금은 또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어?”
불안한 마음에 하염없이 봉우리 위를 쳐다보기를 한참, 한센은 봉우리 위에 빼꼼 고개를 내미는 거대한 물체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뭔지 보이는 사람?”
“뭐지? 뭐지?”
다른 일행들도 뒤늦게 달려와 봉우리에 모습을 드러낸 괴물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물러서요! 다칠 수도 있어요!”
그때 저 위에서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칼바람 속에서도 유난히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김선혁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럼 갑니다!”
대체 뭐가 간다는 것인지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갑작스레 봉우리 위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떨어졌다.
쾅!
굉음과 함께 눈 덮인 공터에 떨어져 내린 괴물체, 사람들이 웅성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게 뭐지?”
동그랗게 몸을 만 정체불명의 물체를 보며 사람들이 조금씩 접근하는데, 위에서 다시 한 번 김선혁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살았어요? 죽었어요?”
때마침 미동도 없던 물체가 슬며시 몸을 틀었다.
“사, 산 것 같은데?”
영문도 모른 채 대답을 해주니, 또 어떻게 그 소리를 들었는지 용케 김선혁이 대꾸를 해왔다.
“저 내려갈 때까지 절대 가까이 가지 마요!”
그 순간 웅크리고 있던 물체가 고개를 들었다.
“으악!”
“괴, 괴물이다!”
거대한 괴수, 드레이크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비명을 질러댔다.
**
“사, 산 것 같은데?”
풍령이 전달해준 한센의 대답을 들은 김선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대한 드레이크를 끌고 내려갈 방법이 없어 모험을 해보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성공한 것 같았다.
사실 방법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드레이크의 육신을 믿고 냅다 봉우리 아래로 밀어버린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몸이 단단해도 추락사를 면치 못했겠지만, 아티야 덕분에 드레이크가 어이없이 죽는 것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속성 지배력과 심력을 쏟아 부어 이룬 쾌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전력을 다 하고도 아티야가 역소환되고 기력이 고갈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아, 이젠 내가 내려가는 게 문제네.”
파김치처럼 늘어진 김선혁이 봉우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주인공이 드디어 용 비슷한 것을 얻었습니다! 껄껄. 상태가 몹시 멜롱하기는 하지만 일단 드레이크는 드레이크니까요!
*드레이크를 길들인 방법이 황당하지만, 실제로 맹수를 길들이는 방법 역시 대동소이합니다. 그저 좀 심하게 크고 사나운 개를 스킬의 보조를 받아 길들였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여러 제목과 의견을 내주신 독자분들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댓글이 너무 많아 한 눈에 보고 당장 결정할 수는 없지만, 오늘 하루 천천히 댓글 곱씹어 보며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중에 적당한 제목이 있다면, 따로 쪽지를 드리고 제목을 교체하겠습니다.
*추천과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근래 일이 고단해 연재의욕이 저하되었다가도 독자분들의 코멘트와 추천을 보며 스스로를 다잡고 있습니다. 꼭 연참하여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T^T
*항상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코멘트와 추천을 주신 독자분들은 물론, 말없이 드래곤 푸어를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께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