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35화 (35/305)

<-- 16. 서리 봉우리 -->

험난한 잔도를 지나 암벽으로 이루어진 공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짙게 서리 내려앉은 높다란 봉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희가 안내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저 위부터는 아무도 올라가본 적 없는 곳입죠.”

사냥꾼은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백색 봉우리에 대체 뭐가 있길래 이 고생을 하는지 호기심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자신은 그저 맡은 바 소임을 다 했으니 그만이라는 투였다.

일단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던 터라 야영지에서 하루를 더 보내기로 결정했다.

“나도 저기는 도저히 같이 못 가겠다. 대체 저기를 왜 올라가겠다는 거야?”

병사들을 도와 야영준비를 마친 한센이 높이 솟은 봉우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뭘 좀 찾을 게 있는데, 그게 저기 있다네요.”

“뭐가? 아니, 누가?”

김선혁은 아직은 확실한 게 없으니 일을 마치고 모든 것을 설명하겠노라 말했다. 언제나처럼 한센은 그의 한마디에 그러마 하고 대답했고 더는 묻지 않았다.

“너, 저기 올라갈 수 있어?”

그저 저 길도 없는 절벽을 어떻게 올라갈 것인지 걱정 어린 말을 건네왔을 뿐이다.

“일단 해봐야죠.”

대답은 했지만 암담한 건 김선혁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야 앞서서 길을 잡은 사냥꾼들이 능숙하게 길을 내고 안내를 해주었다지만, 여기서부터는 혼자 나아가야 했다. 길은커녕 매끈하게 솟아오른 창과도 같은 봉우리를 보니, 팔자에도 없는 암벽 등반이라도 하게 생겼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야영준비라고 해봐야 칼바람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곳 세상에는 험한 산행에 짊어지고 다닐 정도로 가벼운 텐트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지할 건 다소 허술한 침낭이 유일했다.

정체모를 짐승의 털로 만든 침낭은 2인용이었다. 짐을 최소화해야 하니, 개인 침낭을 따로 준비하는 게 비효율적이기도 했고, 부족한 보온성을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보완한다는 취지였다. 김선혁 역시 이제껏 사냥꾼들 중 하나와 침낭을 함께 써오며 밤을 버텨왔다.

그런데 오늘은 엉뚱한 이가 침낭으로 파고들었다.

“실례.”

“뭐, 뭐하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침낭속으로 파고드는 안느의 행동에 그가 기겁을 했다.

“한센 침낭은 저기 있다고요!”

“한센이랑은 더 같이 못 쓰겠어요. 덩치가 좀 커야지. 불편해 죽을 뻔 했다고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안느가 그가 어떻게 말릴 틈도 없이 능숙한 동작으로 침낭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 그렇다고 나랑...”

“그럼 명색에 내가 남작가의 귀한 딸인데, 저기 사냥꾼들이나 병사들하고 같이 침낭 쓸까요? 괜히 이상한 소문 돈다고요.”

“저는 생판 남 아니랍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한센의 침낭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 벌써 다른 이와 짝을 지었는지 불룩하게 올라온 침낭 속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히익!”

잠깐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칼바람에 차게 식은 손이 대뜸 가슴께를 끌어안고 탄탄한 허벅지가 허리를 감아왔다. 그 생경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기괴한 신음을 내뱉은 김선혁이 몸을 빼려는데, 뒤에서 나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 진즉에 이렇게 할 걸. 이제 좀 살 것 같네.”

험난한 여정에 지친 여행자가 마침내 쉴 곳을 찾았을 때의 음성이 딱 저러하리라. 나른하면서도 짙은 안도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탁 하고 풀려버렸다.

그런데, 왜.

“왜 자꾸 귀에 숨을 불어넣는 겁니까.”

그 말을 자꾸만 숨결 담아 귀에 대고 하는 것일까.

“제가요? 언제요?”

뻔뻔스럽게 지껄여대는 그 말조차도 귓가에 바짝 붙어 숨결과 함께 내뱉는 안느였다.

“그냥 좀 자요. 나도 잘 거라고요.”

말뿐이 아닌지 안느는 잠깐 꼼지락거리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굳어버린 몸으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자꾸만 시간이 흘러갔다. 고단한 몸은 당장에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은데, 정신은 기이할 정도로 또렷해져만 갔다.

그럴수록 등뒤로 전해져오는 말캉한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 미치겠네.

차라리 낮에 그녀가 했던 말을 못 들었다면 그녀의 방문(?)을 순수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을 자빠트리겠다는 선언을 듣고 난 뒤라, 오히려 자꾸만 그녀를 의식하게 되었다.

‘자빠트려야겠네. 자빠트려야겠네. 자빠트려야겠네. 자빠트려야겠네...’

그녀의 음성이 마치 반야심경의 한 구절처럼 반복적으로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쯤 되니 혹시 그녀가 일부러 들으란 듯이 이야기를 한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정신 차려! 이 여자는 여자 한센이라고!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번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피로 앞에 장사 없다고, 3일이나 이어온 산행에 지친 육신의 피로가 마침내 번뇌를 이겨냈다.

만약 그녀가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틀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는 잠이 드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억!”

무심코 신음을 내뱉었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 잠이 든 줄 알았던 안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안 와요?”

귓불을 덥히는 뜨거운 입김, 김선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잠 잘 오는 법을 하나 알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손길을 스윽 움직이는데, 김선혁이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누, 누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한센하고 저는 형제 같은 사이라고요.”

저도 모르게 누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형제 같은 사이지, 진짜 형제는 아니죠.”

“누님.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이러시면...”

“왜 누님이에요. 그냥 안느라 불러줘요. 그리고 좀 조용히 얘기해요. 다른 사람들 깨면 어쩌려고요.”

“그러니까 그만 하시는 게...”

그녀의 말에 저도 모르게 한센의 침낭을 쳐다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칼바람 부는 야영지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없는듯했다. 야영지에는 그저 바람소리와 간간히 섞여 들려오는 사내들 코 고는 소리뿐이었다.

“저희 영지는 보셨다시피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 와중에 뜬금없이 안느가 제 영지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워낙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라 영지민들 중 선대로 올라가면 영주가문의 가계와 얽히지 않은 이가 드물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이니 영주의 직계들은 대대로 자신들의 짝을 외부에서 찾아왔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라 설명해주었다.

“중앙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피를 더욱 진하게 하네 마네, 오히려 반기는 모양이지만 최소한 우리 가문은 그렇지 않아요.”

나름대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영지 밖을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귀족가의 여식으로서는 혼기가 다 지나도록 마땅한 짝마저 찾을 수 없었으리라. 한센 일가의 분위기를 보건데 정략혼이라든지 그런 건 염두에도 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하마터면 그녀의 말에 넘어갈 뻔 했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내내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이곳에 와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욕구는 최고조로 쌓여 있었고, 안느는 그런 사내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양손으로 뺨을 끌어안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는 그녀의 얼굴은 그가 아는 누군가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흔들렸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마음의 평정만으로 이겨내기에는 안느는 너무도 집요했고, 침낭 안은 지나치게 좁았다.

“가만 좀 있어 봐요.”

“이러지 마십시오. 누님.”

그래도 그는 필사적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게 밤이 흘러갔다.

**

“아드드드드!”

야영지의 시작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해가 얼굴을 내밀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호들갑을 떨며 기지개를 켠 한센이 이리저리 몸을 틀다가 김선혁을 발견하고는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어때? 잠은 잘 잤...지 못했군.”

눈 밑은 거뭇거뭇하게 죽어 있었고, 뺨은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다. 초점마저 사라진 검은 눈동자가 한센을 보고는 마치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마구 떨렸다.

“남자 한센. 여자 한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김선혁을 보며 한센이 인상을 쓰더니, 뒤편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안느를 불렀다.

“얘, 왜 이래.”

“얘라니. 아무리 동료라지만, 너무 막 부르는 거 아니니?”

기묘하게 김선혁을 두둔하는 안느의 음성, 화들짝 놀란 김선혁이 벌떡 일어나 짐을 챙기겠다고 부산을 떨었다.

“뭐야. 혹시...”

눈치 없는 한센마저도 알아차릴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였다.

“혹시 저 사람 몸에 문제 있어?”

“그렇지는 않을 걸.”

“그런데 왜 넘어오지를 않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느와 그 앞에서 똑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한센, 남매의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아마도 두 남매는 앞으로도 김선혁이 거부하는 이유를 영영 알 수 없으리라.

“뭐, 일단 침은 발라뒀고, 돌아가는 길도 있으니까.”

김선혁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안느를 보며 한센은 도리어 응원을 해주었다.

**

밤사이 큰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일정은 변하지 않았다. 김선혁은 사냥꾼이 넘겨준 로프와 갖가지 등반 장비를 챙겨들고는 일행에게 잠시간 안녕을 고했다.

“무리다 싶으면 돌아와. 저 위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어.”

“저도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한센의 인사가 끝이 나자 안느가 다가왔다.

“몸조심해요.”

“네, 네.”

주춤거리며 대답을 하니 그녀가 슬쩍 다가와 포옹을 해주었다.

“난 아직 끝을 보지 못 했다고요.”

그 말에 대답도 않고 김선혁은 도망치듯 서리 봉우리로 향했다.

**

과연 서리 봉우리를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암벽 등반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김선혁에게는 더더욱 험난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아티야의 도움을 받아 로프를 걸고, 높은 근력 수치를 이용해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었다.

거의 한나절을 꼬박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고생을 하고 나서야 겨우 봉우리의 절반 쯤 올라갈 수 있었다.

"후우."

적당한 디딤돌을 찾아 엉덩이를 걸친 김선혁이 숨을 몰아쉬었다. 뻐근한 팔다리와 뭉쳐버린 근육을 보니, 오늘 더 올라가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는 주변에 돌출된 돌들을 찾아 로프를 걸고 제 몸을 묶었다. 그렇게 한참을 쉬다가 겨우 숨을 돌린 그가 위를 올려다 보았다.

"더럽게 높네. 진짜."

아직 정상 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이한 감각이 자꾸만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용의 말이 아니어도 저 위에 뭔가 있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음?”

그렇게 한참을 위를 쳐다 보고 있던 김선혁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드레이크는 날지도 못한다면서 여기는 또 어떻게 올라갔지?”

하지만 의문은 의문이었을 뿐, 그는 다시 봉우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찢어지고 물집이 생길 정도로 험한 여정,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으엇!”

‘조심하세요.’

집중력이 떨어진 탓인지 순간적으로 발을 헛 딛었다. 아티야가 타이밍 좋게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모골이 송연한 경험, 그는 이를 악물었다.

계속해서 나아가기를 한참, 이제는 자신이 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건지마저 헷갈릴 판이었다. 굳이 드레이크를 찾지 않더라도 용기병의 능력은 어디 가서 꿇리지 않았고,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자꾸만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에도 이미 늦은 상황, 까마득한 봉우리 아래는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끔찍했다.

이래서야 차라리 위만 보고 오르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악으로 깡으로 겨우 버틴 끝에, 김선혁은 마침내 목적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그곳에 그가 그토록이나 찾던 드레이크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연참한다는 말이 갑자기 3연참 5연참으로 왜 불어나는 겁니까;;; 완전체지만 그런 엄청난 이적을 발휘한다는 건 무리라구요. ㅂㄷㅂㄷ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완.전.체.입니다. 지구인들의 공격은 저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후후후.

*설문 투표란에 독자분들 연령대에 대한 설문과, 캐릭터 인기 투표 설문을 등록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드래곤 푸어 제목 바꿀 생각입니다. 주변 작가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나오는 제목들이 전부 고자스러운 것들 뿐입니다. '없어용'이라든지 '용기병go'라든지, '없어용기병'이라든지... 그래서 독자분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꼭 드래곤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 용기병이나 마땅한 단어를 넣어서 의견 제시 부탁드려용. 만약 그중에 바꿀 제목을 찾는다면 딱지로나마 꼭 보답하겠습니다. 찡긋.

*다음 챕터 '서리 봉우리의 드레이크'입니다. 많은 기대와 성원 부탁드리며,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공,후,백,자,남의 서열에 관해 댓글 달아주신 독자분이 계셔서 후기에 써둡니다. 공작과 백작 남작은 당당한 영주이자 지배자고, 후작과 자작은 대리인 또는 실무자라는 설정입니다. 이는 중세 초기의 작위 체계를 모티브로 쓴 글이며, 중국식 공후백자남 서열과는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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