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34화 (34/305)

<-- 16. 서리 봉우리 -->

프로스트베그문트 영지는 1년 내내 서리가 내려앉은 서리 봉우리를 품고 있음에도, 그 이름이 무색하게 날씨는 비교적 선선한 편이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냉막한 산골도 아니었고, 사시사철 새하얀 눈송이 날리는 척박한 땅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의외인 것은 프로스트베그문트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누대에 걸쳐 일대를 다스려왔던 귀족답지 않게 소탈했고, 또 담백했다.

“이 코딱지만한 영지에서 무슨 귀족놀이야. 건너건너 아저씨고, 그냥 이름만 귀족이지.”

솔직한 감상을 말했더니, 한센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무리 아버지라지만 영주를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니라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눈치를 살폈다.

“맞네. 쉽게 말하면 촌장 같은 거지. 왕실에서 인정해준 세습되는 촌장 직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게야.”

하지만 프로스트베그문트가문의 수장이자 한센의 아비인 볼프마이어 남작은 한 술 더 떠 자신을 촌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스스로의 재치가 만족스러운지 몇 번이나 같은 말은 반복했는데, 그때마다 입안의 음식물이 튀어나왔다. 그 모습 어디에도 귀족다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손님 앞에서, 체통 없이.”

슬며시 곁눈질을 하며 질책하는 볼프마이어 남작 부인의 손이 자연스럽게 접시를 덮어, 튀어나오는 파편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너무나 정답고 친근하기만 했다.

“그런데 자네는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나? 나름대로 신경을 썼는데, 먹는 게 영 시원찮군.”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산더미처럼 음식을 쌓아두고 아구아구대는 한센 일가의 식성이 부담스러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한센이 중간에 나서서 원래 입이 짧다고 변호를 해주었다. 사실을 따지고 들면 이쪽이 입이 짧은 게 아니라, 자신들이 대식가에 가까운 식성을 갖고 있는 것이었지만 김선혁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쯧. 사내는 모름지기 잘 먹어야 하는데. 그러니 몸이 그리 부실한 게지.”

자꾸만 자신의 가족들을 기준으로 삼는 볼프 마이어 남작은 어딘지 생각이 남다른 듯했다.

“오히려 나보다 자네가 더 귀족 같아. 자네 정도의 식사 매너라면 중앙 사교계에서도 꽤나 기품있다 말하겠어. 나는 그 기품이라는 게 사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럴 것 같군.”

오히려 볼프마이어 남작은 김선혁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하기야 어려서부터 이런저런 식사 예절의 강박 속에서 자라온 한국 남성이 어디 가서 식사 매너가 빠지는 편은 아니었다. 하물며 귀족의 음식이라고 해도 저쪽 세상의 다채롭고 질 좋은 식사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이족 세상 기준으로 성찬을 앞에 두고도 여유작작한 김선혁의 모습은 다소 눈에 띄는 것이었다.

“혹시 귀족 출신인가?”

“선대에 나랏일을 하신 분들이 좀 계시긴 합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 성씨 중에 선대에 위인을 조상으로 두지 않은 집이 없었다.

“역시! 내 그 고귀함을 한 눈에 알아보았지!”

“어쩜. 여기서도 곧 작위를 얻는다니, 우리 안느랑 딱 짝지어주면 그만인데.”

느리게나마 식사를 이어가던 김선혁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센이 누나도 있었어요?’

‘있지. 그것도 아주 제 놈이랑 빼다 박은 누나가.’

‘아서라. 한센. 괜히 막내 데려갔다가 너희 누나가 보면, 미래가 위험해진다고!’

‘막내 너도 조심히 다녀오고. 한센 누나 조심해라!’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동료들의 당부, 괜스레 한기가 돋는데 한센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누나는 어디 갔어요? 동생이 왔는데 코빼기를 안 보이네.”

“일찍도 물어보는구나. 아까 나갔으니, 이제 슬슬 돌아올 때가 됐...”

때마침 볼일이 끝났는지 한센의 누나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런데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안느의 모습이 상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센을 꼭 빼닮았다 하여 우악스러운 여인의 모습을 상상했건만, 막상 확인한 그녀의 모습은 늘씬한 체구에 자유분방하게 늘어트린 갈색 머리가 잘 어울리는 미녀였다.

“한센 왔다며!”

“누나!”

벌떡 일어난 한센이 반가운 얼굴로 양팔을 벌리고, 안느가 포옥 안겼다. 그야말로 다정한 남매의 모습, 하지만 김선혁은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겹쳐놓고 보니 동료들이 말이 이해가 갔던 것이다.

한센의 누나, 안느는 미녀는 분명 미년데, 놀라울 정도로 이목구비가 한센과 닮아 있었다. 그게 왠지 모르게 거북스러워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억, 하고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봐. 나랑 닮았지? 우리 누나야.”

“아. 반가워요. 한센이랑 같이 왔다던 동료가 바로 그쪽이시군요. 아리아네 폰 프로스트베그문트예요.”

뒤늦게 손님 앞에서 실례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살짝 떨어져 인사를 해 보이는 안느의 모습에 김선혁은 뒤늦게 감탄하고 말았다.

아리아네 폰 프로스트베르그문트, 안느는 다른 의미로 확실하게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것 같았다. 볼프마이어 남작과 한센이 넓은 어깨와 커다란 키로 우월한 신체를 지녔다면, 그녀의 우월함은 다분히 여성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풍만한 편인 이곳 세상의 여인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볼륨은 어지간한 사내라면 시선을 뗄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가 없었으니, 보면 볼수록 그녀의 얼굴과 한센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안느는 딱 예쁜 여자 버전의 한센이었다.

**

“그래. 서리 봉우리에 볼 일이 있다고?”

안느가 자리에 앉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볼프마이어 남작이 넌지시 물었다.

“시기가 좋지 않은데. 그래도 꼭 가봐야겠나?”

남작은 근래 들어 봉우리의 위쪽에서나 보일 법한 몬스터들이 아래까지 내려와 설쳐대는 통에 영 정신이 없다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에 김선혁은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입장, 몇 번이나 설득하던 남작도 결국은 납득하고 조력을 약속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야. 사냥꾼 이야기로는 지금의 상황이 딱 상위 포식자가 자리를 꿰차면서 나머지가 밀려나는 현상이라고 했거든. 지금까지는 크게 위험한 놈이 없었지만, 가장 꼭대기에는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일세.”

김선혁은 차라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 상위 포식자라는 게 아무래도 드레이크일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탓이다.

“안내역을 맡을 사냥꾼과 병사 여럿을 붙여주지. 나름대로 사냥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니, 도움이 될 걸세.”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한센이 그러더군. 자네가 아니었다면 사스테인 놈들에게 당했을 거라고. 그렇게 따지면 자네는 아들이 생명의 빚을 진 셈이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생명의 빚이라는 말에 김선혁이 찔끔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센의 생명은 구했지만, 미래에 태어날 생명은 구하지 못했다. 자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게!”

한센의 하체에 일어난 사고(?)를 아직 듣지 못한 게 분명한 남작은 그의 속도 모르고 자꾸만 칭찬을 해댔다.

**

그날 저녁 김선혁은 다시 한 번 용의 음성을 들었다. 용은 그가 길을 잘못 잡지 않았노라 칭찬해주었고, 가장 높은 곳에 용의 아종이 있을 거라 말했다.

“시간이 없어.”

김선혁은 서둘러 탐색 준비를 마쳤다. 정해진 휴가 기간은 한 달, 이미 이곳까지 오며 10일이라는 시간을 썼으니 돌아갈 걸 생각하면 탐색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남작이 약속한 조력자들은 금세 준비되었다.

안내역을 자처한 늙은 사냥꾼 하나와 비교적 젊은 사냥꾼 둘, 그리고 경험 많은 병사 여섯이 영주성의 입구에서 김선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아네님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그런데 그 사이에 불청객이 끼어 있었다. 사냥꾼이라도 되는 양 복장을 갖춘 안느가 활을 꺼떡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나, 활 잘 쏴. 아마 우리 영지에서는 활로는 누나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을 걸?”

“안느님의 활 솜씨는 영지 제일입니다요. 안느님 말고 저 무지막지한 활을 쓸 사람은 최소한 이 근방에는 없습지요.”

그러고 보니 안느가 꽉 움켜쥔 활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1.5미터는 되어 보이는 초대형 장궁, 살의 길이만 해도 어지간한 남성의 팔뚝보다 훨씬 길어 보였다.

“뭐, 상관 없겠지요.”

김선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제 한 몸 지킬 실력은 충분하다는 말일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가 너무도 쉽게 허락을 하자 오히려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 안느 역시 만약을 대비해 이런저런 말들을 준비했었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몇 번이나 벙긋댔다.

그리고 산에 오른지 딱 하루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김선혁이 반대를 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정지. 앞쪽에 뭔가가 있습니다. 혹시 다른 길이 있습니까?”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있긴 있습니다.”

“그럼 그리로 가죠.”

영문을 몰라 눈만 껌벅거리는 일행에게 한센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냥꾼 하나가 물었다.

“이상하지 않아? 산이 변하기 전에도 이쯤이면 몬스터 한 두 마리쯤은 만났어야 했잖아.”

“그것도 그렇...”

“그게 다 저 친구 덕이야.”

사람들은 반신반의 했지만, 이틀이 다 지나도록 몬스터와 만나는 일이 없자 차라리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

몬스터에게 시달리느라 발목이 잡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행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험해지는 산길, 나중에 가서는 위험천만한 낭떠러지를 기듯이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몬스터가 나타났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기가 아니면 전부 절벽을 기어 올라가야 해요.”

가파르고 협소한 잔도,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사냥꾼이 난색을 표했다. 몬스터와 드잡이질을 하기에는 주변 지형이 너무도 좋지 않았던 탓이다.

“그럼 그냥 가죠.”

하지만 김선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이 신비로운 손님이 또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몬스터와 만났다.

“제길. 바바예티 무리입니다!”

흡사 성성이와도 같은, 온몸에 억센 털을 두른 괴물을 본 사냥꾼이 비명을 질렀다.

“위험한 놈들입니까?”

이 세상의 몬스터에 대해 무지한 김선혁이 그렇게 물으니, 사냥꾼이 창백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유별나게 강한 놈들은 아니지만, 이런 지형에서라면 위험합니다. 저놈들은 우리와 드잡이질 하는 대신, 일단 밀어서 우릴 떨어트리고 시체를 주워 먹으려고 할 테니까요.”

성성이처럼 긴 팔을 이용해 절벽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바바예티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지형적으로 많이 불리하긴 할 것 같았다.

“당장 내려가야 합니다. 요 아래 공터라면 차라리 승산이 있어요!”

“아니요. 우린 내려가지 않습니다.”

“이익! 다 죽는다고요! 저희야 언제 죽어도 괜찮지만, 도련님과 아가씨만큼은!”

“아무도 죽을 일 없습니다.”

비명처럼 외쳐대는 사냥꾼을 보면서도 김선혁은 태연했다. 그 여유작작한 모습에 화가 난 사냥꾼이 억지로라도 일행을 돌리려는데, 그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아티야.”

‘부르셨나요. 나의 주인님!’

작게 읊조자 허공에 불쑥 아티야가 나타났다.

“모조리 밀어서 떨어트려.”

아티야는 바람의 정령, 비록 하급이라고는 하지만 바바예티들을 낭떠러지로 밀어낼 정도의 힘은 있었다.

이곳은 바바예티에게만 유리한 사냥터가 아니었다.

‘까르륵! 굴려요! 데굴데굴 굴려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음성이 울려퍼진다 싶더니, 이내 바바예티들이 요란한 비명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가장 앞서 달려오던 바바예티 한 마리가 아티야에게 덜미를 잡혀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크아아악!

섬뜩한 비명소리, 하지만 이내 그마저도 멀어져 가고 새로운 비명소리가 그 빈자리를 대신 채웠다.

“이게 대체...”

갑작스러운 이변에 발길을 돌려 내려가려던 사냥꾼과 병사들도 걸음을 멈추었다.

**

사냥꾼의 우려가 무색하게 바바예티 무리는 너무도 손쉽게 처리되었다. 엇, 하는 사이에 하나 둘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피떡이 되더니, 나중에 가서는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조리 추락사한 것이다.

“가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하는 김선혁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빠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잖아?”

“우리 선혁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래. 맞아. 대단하네.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어.”

뒤를 따르며 안느와 한센이 작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자기들 딴에는 바람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나름대로 조심한 모양이었지만, 바람은 김선혁의 눈이고 귀였다.

“자빠트려야겠네.”

안느의 혼잣말에 보무도 당당하게 잔도를 오르던 김선혁이 순간 휘청거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참을 확정하고 나니, 독자분들의 코멘트와 추천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지금의 저는 완전체입니다. 그 어떤 공격도 면역이죠. 크큭.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음껏 추천과 코멘트로 저를 공격하십시오. 저는 즐기겠습니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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