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포상 휴가 -->
“마을! 마을이다!”
멀찌감치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발견한 김선혁이 환호했다. 먼지 내려앉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환한 웃음,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요새를 벗어난 지 벌써 일주일째, 처음 기대했던 낭만적인 여행 따위는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 여행은 지독스러울 정도로 불편했고, 지루한 여정의 반복이었다.
마을은커녕 보이는 것이라고는 삭막한 평원과 이름 모를 들풀들뿐이었다. 그나마 간간히 마주치는 마을은 쉬어갈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빈궁했다. 그래도 지붕 아래서 잠을 청하는 것이 어디냐며 하루를 쉬었지만, 죽자고 달려드는 이와 벼룩 탓에 동이 트기도 전에 마을을 나서야 했다.
그 뒤로 김선혁은 멀찌감치 마을이 보여도 어지간하면 들르지 않고 지나쳤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마을은 척 보기에도 제법 가구 수가 되어 보이고 집들도 번듯한 것이 하루 쉬어가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빨리 갑시다! 뭘 꾸물대요!”
뒤에서 뭉그적거리는 한센을 보며 독촉을 하니, 한센이 휑하니 뚫린 앞니를 드러내 보이며 그를 잡아 세웠다.
“방정 떨지 마. 갑자기 들이닥치면 사람들 겁먹는다.”
한센의 말에 김선혁이 내달리던 스텔라의 고삐를 잡아챘다.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병사 하나쯤은 가족으로 둔 국경 쪽 마을하고 다르게 이쪽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병사들은 간간히 삥 뜯으러 오는 영주의 병사들뿐이지. 그런데 갑자기 니가 그렇게 번듯하게 차려입고 달려가면 사람들이 놀라겠어, 안 놀라겠어?”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한센답지 않게 배려가 느껴지는 말이기도 했다.
“뭐, 인마.”
“아니. 한센이 좀 달라보여서.”
히죽 웃으며 대답을 하니, 한센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내려서 가죠. 괜히 겁 줘서 좋을 거 없으니까.”
말 아래서 올려다보는 기병의 위압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김선혁이다. 그래서 그렇게 제안을 했더니 한센도 군말 없이 말에서 내렸다.
“아이고. 기사님들. 이런 궁벽한 마을에는 어쩐 일로...”
입구까지 뛰어와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촌로와 마을 사람들, 아픈 허리 부여잡고 말에서 내린 보람이 무색해지는 광경이었다.
“호, 혹시. 전에 말씀하신 건이라면 아직 준비가 덜 됐습니다. 다들 합심해서 손을 보태고 있으니 다음 달이라도 마련을...”
“아니. 우리는 이쪽 영주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대로 두었다가는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한센이 나서서 적당히 자신들을 여행자라 소개했다. 영주의 기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려움과 경계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까지는 그들도 어찌 할 수 없었던지라 포기하고 촌로의 안내를 받았다.
“음.”
멀리서 보기에는 꽤나 그럴싸해 보였던 마을이 막상 내부로 들어오자 판이하게 달랐다. 집은 낡아빠졌고, 사람들의 의복은 구멍을 기우지도 않은 허름한 것이었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고개를 땅에 처박는 통에 제대로 본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눈빛과 얼굴에도 생기가 없었다.
‘직접 보고 확인하게. 주둔지 밖 세상은 자네 생각보다 몇 배는 열악할 걸세. 만약 자네가 전역한다면, 머지않아 자네 역시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겠지. 그러니 둘러보고 돌아올 때는 결정을 내리게.’
떠나기 직전 사령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사령관의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그만큼 사람들의 삶은 빈곤했고, 환경은 열악했다. 자신도 이런 곳에 섞여들어 살 생각을 하니 숨이 턱, 하고 막힐 지경이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김선혁의 표정이 굳자 내내 눈치를 살피던 촌로가 겁을 집어먹고는 손을 비벼댔다. 황급히 아니라고 손짓을 했지만, 한 번 겁을 먹고 나자 가뜩이나 늙어 힘없어진 걸음걸이가 엉키더니, 혼자 넘어지고 말았다.
왠지 자신이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아, 그가 놀라서 부축을 해주려 하자, 노인이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벌떡 일어나 절름거리며 안내를 이어갔다.
“끄응.”
제 딴에는 감히 귀하신 분의 손을 빌릴 수가 없어 한 행동이었다지만, 김선혁이 느끼기에는 꼭 오물이 묻을까 걱정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이게 이 세계의 진짜 삶.
타고난 태생의 귀함보다는 능력과 계급을 중요시하던 부대를 벗어나자 이 세계의 맨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세상 속에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계층간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푸르게 물들인 제복과 구멍 나고 낡아 색마저 바랜 의복의 선명한 대비가 마치 자신의 기로를 보여주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노릇노릇하게 익은 통닭 한 마리와 퍼석퍼석한 빵이 식탁에 올라왔다. 곤궁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제법 그럴싸한 식단, 김선혁은 필시 귀한 몸들이라고 무리해서 준비했을 음식들을 씹으면서도 도통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끔찍하지? 아무리 엿 같고 위험해도 병사들이 부대를 떠날 생각을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당장 자신이 몸을 사리면 제 가족이 금세 이런 꼴이 될 테니까.”
식사가 끝나갈 무렵 한센이 말했다. 국경 지대의 풍요로움은 병사들이 생명을 담보로 제 가족들에게 바친 것이라며, 태어나기를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이런 곤궁함을 피할 수 없다 말했다.
들을수록 암울한 이야기라 입맛마저 떨어져 결국은 식사를 멈추고 말았다.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들어가서 쉬어. 내일 아침에 동이 트기 전에 나설 테니, 그리 알고.”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방으로 향하려는데, 한센이 그를 붙잡았다.
“선혁.”
“네?”
“나는 네가 전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쩐지 자꾸만 평민들의 빈곤한 삶을 강조한다 싶더니, 그가 이런 삶에 겁이라도 집어먹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우직한 한센답지 않게 영악한 행동, 하지만 그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사령관이나 왕실의 사주를 받았다면 모를까. 저 우직한 사내의 어울리지 않는 교활함은 단지 동료와 조금 더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제가 전역하지 않으면, 한센이 내 아래가 될 텐데요? 저 작위도 제안 받았거든요.”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고 그렇게 대꾸를 하니, 한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 니가 조장? 아니지. 작위까지 있으면 못해도 중대장일 텐데.”
혼자서 헤매던 한센이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까짓 거 대장 해. 니가. 너하고 같이 돌격할 수만 있다면, 니 꽁무니를 따르든 뭐하든 무슨 상관이야.”
한센은 자신의 기병 인생에서 그렇게 짜릿했던 차징은 없었노라며 언제고 다시 그 기분을 느끼고 싶다 말했다.
“일단 쉴게요.”
“어. 그래.”
대충 인사를 하고 돌아선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마음이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버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꼼짝 없이 말뚝 박게 생겼다.
내심 투덜거렸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만큼은 홀가분해진 터라, 그는 오랜만에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전날의 피로를 멀끔히 날려버린 얼굴로 말 위에 올랐다.
“그냥 길에서 잘 생각하고, 마을은 들르지 말죠. 최대한 빨리 가요.”
밤사이에 일어난 심경의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음성과 태도, 한센이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지난 두 번의 전투를 통해 레벨도 하나가 더 올라 6이 되었고, 이제는 하급 병과의 힘 정도는 아득하게 초월해버린지 오래였다.
이제는 90에 육박한 지배력 덕인지, 전과는 달리 정신력의 끔찍한 소모는 없었다. 그덕에 달리는 내내 풍신과 풍령의 힘을 유지할 수 있었고, 분란을 피할 수 있었다. 한센이 그토록이나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던, 도적이나 몬스터와의 조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순탄하다면 순탄한 여정, 김선혁은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아티야를 불렀다.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주인님.’
언제 봐도 화끈한 아티야의 모습,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한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없는 일반인이 아티야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센은 조금의 낌새도 눈치 채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느긋하게 아티야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까르륵.’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아티야가 앞장을 섰다. 대번에 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약해지고, 눈을 뜨기가 수월해졌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앞장 선 아티야의 아찔한 뒤태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는 것뿐이었다.
[속성 지배력이 1 만큼 상승했습니다.]
아티야를 꺼내놓고 달리기를 한참, 90에 도달한 이후로 정체되어 있던 속성 지배력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지배력이 오를수록 아티야의 모습은 선명해졌다. 물론 유달리 흐릿한 아티야의 신체 어딘가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는 이성을 잃지 않고 억지로나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속성 지배력이 등급 한계치인 99에 도달했습니다.]
[속성 지배력이 등급 한계치를 돌파하려면 특별한 계기가 필요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더욱 또렷해진 형체, 아티야가 환호했다.
‘주인님. 저 뭔가, 이상해요. 뭔가가, 뭔가가 오려고 해요!’
필요한 말 이외에는 그다지 말을 하지 않던 아티야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내 안에서 뭔가 변하고 있어요!’
혹시나 안유정이 말했던 정령의 성장이라는 게 일어나려나 싶어 한참이나 아티야를 보았지만, 기다렸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속성 지배력이 조금 더 올라야 그녀가 성장할 것 같았다.
“음.”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지배력을 통해 아티야가 성장할 수 있다는 실마리를 찾은 지금, 언젠가는 그녀가 변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뭐, 지금 이 대로도 충분히 나쁘지 않아.
유달리 또렷해진 아티야의 뒤태를 보며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
내내 말을 달린 끝에 김선혁은 한센의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때? 이제껏 봐왔던 마을들하고는 비교가 안 되지?”
잘 정비된 도로와 깔끔한 집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영주성까지 한센의 고향은 그가 처음으로 접하는 제대로 된 영지였다.
“와. 한센. 부자집 자식이었네요.”
“우리집이 좀 잘 사는 편이지.”
감탄해 한마디를 하니 우쭐대는 꼴이 평소의 한센과 같았다. 이런 번듯한 영지를 지닌 귀족가의 자식이면서 하고 다니는 꼴은 건달과 같으니, 더욱 더 정이 갔다.
“도, 도련님?”
잘 정리된 논과 밭에서 허리 굽히고 있던 사내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한센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만. 잘 지냈어?”
“도련니이임!”
“어, 어디? 어디?”
꽤나 오랜만에 방문한 것인지 한센을 보는 영민들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경계보다는 반가움이 큰 것이 아무래도 한센 일가는 제법 좋은 영주인 모양이었다.
“도련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전쟁 소식에 다들 걱정이...”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김선혁은 우악스럽고 흉악한 인상의 한센이 도련님이라 불리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 제 몸만 긁어댔을 뿐이었다.
“아, 참. 내 정신 좀 보게. 영주님은?”
“아까 잘만이 뛰어갔으니, 곧 기별 받고 나오실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달려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장년의 사내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인, 그리고 그보다 젊어 보이는 여인과 사내들까지, 보는 순간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한센, 네 이노오옴!”
“아버지이이!”
격하게 포옹을 하는 한센과 영주, 그리고 다른 일가족의 모습이 놀라울 만치 한센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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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들었소. 이번 전쟁에서 이방인 하나가 큰 공을 세웠다지. 그게 바로 그대였구려.”
재회의 기쁨도 잠시 뒤늦게 김선혁을 떠올린 한센이 소개를 하자, 영주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프로스트베그문트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프로스트베그문트. 김선혁은 마침내 드레이크가 잠든 서리 봉우리의 초입에 도달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자료 조사하다가 업데이트가 30분 정도 늦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번 주 내로 연참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만들 고정하시라능. 폭등하는 추천과 코멘트가 평소 두배. 연참 의무감도 두배... 하지만 늘어난 코멘트와 추천수가 압박을 주면서도 몹시 기분이 좋습니다. 찡긋.
*다음편에 독자분들이 그토록이나 고대하셨던 한센의 누님이 등장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아티야의 대사를 어디서 본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탓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마음속의 음란마귀를 쫓아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