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논공행상 -->
이미 사령관을 통해 훈장이자 그 자체로 권위를 상징하는 훈작사를 받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김선혁의 얼굴은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왕실이 훨씬 더 높은 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귀관에게 수여된 작위는 자작의 위다.”
아무런 실리도 없이 그저 준 귀족이라는 신분만을 나타내는 훈작사와는 달리, 자작의 위는 진짜 귀족의 자리였다. 비록 봉토 없이 고위 귀족의 곁에서 대리인 역할을 하는 실무자에 가까운 위치이기는 하나, 경우에 따라서는 어지간한 영주들 이상으로 발언권이 센 작위이기도 했다.
한 번 받으면 물릴 수도 없으며, 빼도 박도 못하고 아덴버그 왕국 귀족 일람에 이름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소속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다른 이방인들이 그러하듯 중앙에 남아도는 이름뿐인 단체 중 하나를 적당히 맡게 되겠지.”
이쯤 되면 왕실과의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제 의사는 상관없는 겁니까?”
잔뜩 인상을 찌푸린 김선혁의 질문에 중대장은 원칙대로라면 개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으나, 이방인이라는 특수한 위치상 어떤 식으로 일이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대답했다.
그 뒤로 프레드릭이 임시적으로 부여된 등급이 중급이며 곧 왕실의 등급 책정관이 정확한 등급을 확인하기 위해 방문할 거라는 등의 설명을 해주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식으로 작위를 수여받기 이전까지는 중갑 기병대의 일개 대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행동에 각별히 주의하도록.”
결국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여긴 프레드릭이 한마디 주의를 주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막사를 나선 김선혁은 거칠게 땅을 걷어차며 욕설을 내뱉었다. 괜스레 사령관이 나서서 전공을 그대로 올리는 바람에 굳이 받지 않아도 될 작위를 받고 왕국에 발이 묶이게 생겼다.
원망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령관 역시 그러한 점을 예상했던 것일까. 사령관이 기병대 하나만을 이끌고 주둔지에 방문했다.
“너무 고깝게 여기지 말게. 귀족의 작위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살아가기 훨씬 수월한 것일세.”
방자하게도 잔뜩 성질이 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김선혁을 보며 사령관이 건넨 첫마디였다.
“원치 않아도 족쇄를 차게 생겼는데, 어떻게 좋게 생각합니까.”
그의 삐딱한 대답에도 사령관은 화를 내지 않았다.
“자네가 그토록 화를 내는 이유가 뭔가.”
“그야 당연히 왕실의 호의를 받으면 받을수록 빚이 늘어나는...”
“자네 아주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군.”
생각할 것도 없다는 투로 바로 튀어나온 대답을 사령관이 자르고 나섰다.
“자네가 이제까지 받아온 왕실의 지원은 분명 빚이 맞아. 아무 것도 모르는 혈혈단신의 이방인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네. 그 당시의 이방인들을 거두어 제 몸 지킬 힘을 기를 수 있게 해주었고, 자리를 잡기까지 지원을 해준 건 분명 크나큰 은혜가 맞아. 그건 반론할 여지가 없지.”
“그래서 더 은혜를 입기 싫다는...”
“하지만 말이야.”
여전히 불만에 찬 얼굴을 한 그를 보며 사령관이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네는 벌써 빚을 청산하지 않았는가.”
사령관의 음성은 단호하기만 했다.
“이후에 자네에게 주어질 포상과 작위, 그 모든 것은 모두 자네 스스로 이룬 전공에 대한 합당한 대가일 뿐이네.”
경륜 있는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 이방인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군.”
나이답지 않게 맑은 눈동자를 살짝 휘어 올리며, 사령관이 말했다.
“외상값 다 갚았네. 이제 왕실이 자네에게 빚을 갚을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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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은 오래 머물지 않고 돌아갔다. 전황이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 주둔지를 순회하며 장병들을 위무할 겸 해서 나선 걸음이라 했다. 안유정과 그 일행도 시기를 맞춰 사령관과 함께 주둔지를 떠났다.
“요새에서 봐요.”
홀가분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안유정은 작별 인사를 했고, 그는 그간의 호의에 고마웠다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렇게 손님들이 떠나고 남겨진 김선혁은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언제부터 자꾸만 도망치고 벗어날 생각만 하게 된 것일까. 분명 처음 훈련소를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기왕 다른 세상에 온 거,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한참을 궁리한 끝에 그는 자신의 생각이 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생존의 압박감이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여기게 만든 모양이었다. 저쪽 세상에서도 이루지 못한 전역에 대한 미련과 열망이 다소 영향을 미친 부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네가 군에 남기를 바라지만, 굳이 억지로 잡아둘 생각도 없네. 설령 자네가 생각을 바꿔 군에 남더라도 왕실에 충성을 강요하지 않을 걸세. 그저 내가 바라는 건 자네가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기를 바랄 뿐이지. 결국은 그런 마음이 하나로 모여 왕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줄 거라 믿고 있네.’
사령관이 떠나기 전에 건넨 말을 떠올린 김선혁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망할 영감탱이. 우직하게 생겨서 엄청 달변이야.”
솔직하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이곳에 떨어진 뒤로 자신이 늘 조급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네는 나와의 약속을 더없이 훌륭하게 지켰어. 이제는 내가 자네와의 약속을 지킬 차례군.’
노회한 지휘관은 말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데도 능숙했다.
‘아덴버그 왕국 서부군의 총사령관이자, 왕국의 변경백인 나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는 이방인 김선혁에게 내 영지의 일부를 영구히 봉토로 수여하네. 이는 왕실과 맹스크가(家)의 맹약이 보장한 온당한 권리이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적법한 절차임을 천명하는 바일세.’
사령관, 비텐펠트 로이엔 맹스크는 놀랍게도 봉토를 수여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봉토를 가진 귀족은 왕실의 부름을 거부하고 자신의 영지를 운영하는데 집중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말해주었다.
‘그리고 만약 원한다면 자네가 지금의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겠네.’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이곳저곳에 깔려 있으니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자네가 작위를 수여 받은 후에나 가능한 일들이네.’
사령관은 봉토에 대한 대가를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을 거라 약속했고, 그는 솔직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아덴버그 왕국에서 시작한 새 인생, 계속해서 전역을 고집하고 그간의 인연에 안녕을 고하기에는 차려진 밥상이 너무나 먹음직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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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혁이 즐겁다면 즐겁고, 골치 아프다면 아픈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전선으로 지원 갔던 24연대의 보병들이 돌아왔다.
큰 격전은 없었는지 눈에 띌 정도로 인원이 비어보이지는 않았지만, 귀환한 보병대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그 중에는 무사히 생환한 박수홍과 강정태의 모습 역시 찾을 수 있었다.
“잘 돌아왔어요.”
그간의 감정과 관계가 어떻게 됐든 간에 그들의 생환이 반가운 것만큼은 사실이라 먼지 투성이의 사내들을 안아주니, 그들이 지친 음성으로 대꾸했다.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축하해.”
“축하해요.”
전에 보였던 질투 따위는 온데간데없는 음성, 초점을 잃은 탁한 눈동자를 한 그들의 맥없는 모습은 차라리 폐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수고했어요. 살았으면 된 거예요.”
자신도 이미 비슷한 경험을 했던지라 김선혁은 그들을 위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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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대가 귀환하고 며칠이 지나고, 김선혁을 비롯한 중갑 기병대는 맹스크 요새로 다시 떠났다. 전날 요새로 향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 그들은 그 어떤 위협도 걱정하지 않고 맹렬하게 말을 내달렸고, 이틀만에 요새에 도달했다.
“쩝. 금방 오네.”
사실은 이렇게 짧은 거린데,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전날의 기억이 이제는 생소하기까지 했다.
“맹스크 요새는 영웅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바이네.”
전보다 몇 배는 거창한 환영인파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내내 아덴버그 왕국을 괴롭혀왔던 사스테인 기병단을 궤멸시킨 승리자에 대한 예우였다. 사령관 역시 환호하는 병사들 앞에 서서 그들을 반겨주었는데, 그 치하하는 말이 어찌나 거창한지 듣는 사람이 다 민망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꽤나 열렬했던 환영식이 곧 끝이 나고 김선혁은 숙소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김선혁과 기병대원들은 사령관의 호출을 받았다.
“불편한 이야기 하려고 부른 거 아니니, 먹으면서 편하게 듣게.”
언제나처럼 소탈한 사령관의 말에 기병대원들이 여지없이 아구아구대며 고기를 물고 스프를 들이마셨다.
“조만간 정식으로 공문이 내려오겠지만, 자네들 모두 큰 포상을 받게 될 걸세. 아마 상당한 금전과 특진 정도가 기다리고 있겠지. 중대장 같은 경우에는 아마 별 탈 없이 상급 기사로 승급하게 될 테고.”
쩝쩝거리며 식사에 열중하던 사내들도 포상 이야기가 나오자 조용히 사령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왕실이 충성스럽고 용맹한 병사들에게 내리는 당연한 대가일 뿐이네. 하여 나는 거기에 더해 사령관의 권한으로 그대들에게 한 가지 상을 더 줄 생각이야.”
사령관의 말에 기병들이 기대에 찬 얼굴을 해보였다.
“전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친구들로 알고 있는데, 고향 생각이 많이 나지는 않든가.”
“으아! 사령관님 만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급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사령관은 이를 나무라지 않으며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기간은 한 달, 그 안에 가족 얼굴이라도 보고 오게. 돌아온 뒤에는 꽤나 바빠질 거야. 왕실의 사절도 그때쯤 해서 온다니, 늦는 사람은 특진도 포상도 물 건너 간 걸로 알도록.”
“만세! 사령관님이 최고십니다!”
“인자하신 사령관님께 충성을!”
신이 난 기병들이 아우성을 떨어대는 사이, 김선혁만 어색한 얼굴로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은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었으므로.
우울한 얼굴로 괜스레 접시만 깨작거리고 있던 그에게 갑자기 기병대원들이 달려들었다.
“나랑 같이 가자!”
“무슨 소리야! 우리 집에 가자고. 이미 편지에 막내 데려갈 거라고 써서 보냈다고!”
“쯧쯧. 궁벽한 시골에 뭐 있다고 손님까지 데리고 가. 우리 동네처럼 번화한 곳이라면 모를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겉도는 듯한 소외감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김선혁은 앞 다투어 자신의 고향에 함께 내려가자는 동료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짓고 말았다.
“다 찌그러져 있어. 막내는 내가 데려갈 거야.”
“아서라. 한센. 괜히 막내 데려갔다가 너희 누나가 보면, 미래가 위험해진다고!”
조금은 위험한 제안도 있었지만, 어쨌건 간에 그는 동료들로 말미암아 금세 우울함을 털어낼 수 있었다.
**
당장 결정을 내릴 사안은 아니기에 김선혁은 대답을 보류했고, 기병대원들은 마치 홍보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고향을 소개하며 온갖 말로 그를 구워삶으려 했다.
이건 또 이거대로 골치 아픈 상황, 어디가 좋은지를 모르니 순전히 친분 따라 결정을 해야 했는데 하나를 결정하면 다른 이가 서운할 만도 해 그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으니, 그날 저녁에 용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북쪽으로 향해라.]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편 코멘트와 추천수를 보니 연참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미친듯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을 노리셨다면 제대로 성공하셨습니다. 조만간 틈을 봐서 기습적으로 연참하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자초한 감이 있지만, 연참 안 하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서;;; 갑작스레 불어난 코멘트와 추천수가 이렇게까지 무서웠던 건 처음입니다. 가급적이면 오늘도 내일도 이 부담을 느끼게 해주소서. 데헷.
*서평 이벤트 개별적으로 쪽지 보내고 딱지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해주신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