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논공행상 -->
목적지에 도착한 기병들을 반겨준 것은 보병대가 다 빠져나가고 거의 비어버리다시피 한 연대 주둔지의 모습이었다. 다소 텀을 두고 출진했던 보병대가 비워둔 자리가 컸던 탓에 승전보와 함께 당당하게 돌아온 기병대를 반겨주는 병사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당분간은 그 어떤 훈련도 출동도 없다. 따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자율적인 휴식을 허락한다. 단 엉뚱한 짓 하다가 걸리는 놈이 있으면, 순찰 뺑뺑이 돌릴 테니 그리 알도록.”
프레드릭 중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부대를 해산시키려다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 수고했다. 잘 싸워주었고, 잘 살아남아주었다.”
평소의 중대장답지 않은 따뜻한 말은 아마도 돌아오지 못한 기병대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으리라.
정확한 전과와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클라크가 중대장을 따라 사라지고, 이방인들은 미리 마련해둔 주둔지 어딘가의 막사로 안내되었다. 남은 기병들 역시 마구간에 말을 넣어두고는 곧장 막사로 도착해 곯아떨어졌다.
긴장이 풀리고 나자 극심한 전투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김선혁 역시 막사의 침상에 몸을 내던지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강인한 체력으로도 정신적 피로는 만회할 수 없었고, 거의 하루를 꼬박 자고 나서야 김선혁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고도 침상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 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치열한 전장 속에 있다가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니 왠지 붕 뜬 듯한 기분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평화롭게 주둔지를 오고 가는 병사들의 모습이나 마치 출정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대는 동료들의 모습이 영 현실감이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자리가 비어 있는데...
일견 매정해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웃고 떠들어대는 사내들의 눈빛이 깊게 잠겨 있는 것을 보면 저게 바로 저들 나름의 애도이고 추모이리라.
김선혁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는 그들 사이에 끼어 함께 떠들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한참을 떠들다보니 요나슨이 불쑥 질문을 던져왔다. 앞뒤 다 잘라낸 말이었지만 의미를 알아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공을 세우고 전역하는 데까지만 생각했지, 사실 그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당시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궁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막상 전역이 현실이 되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포상금도 빵빵하게 나올 텐데, 그걸로 뭐 가게라도 차릴까요?”
“아서라. 물정도 모르는 얼뜨기가 어디 가서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해. 사기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김선혁은 자신이 세상 물정에 그리 밝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 이쪽 세상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냥 돈이나 까먹으면서 살까요.”
결국 나오는 대답이라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뭐,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꼭 전역해야겠어? 네가 살던 세상은 어떤지 몰라도 이쪽은 그냥 혈혈단신으로 살아가기에는 만만치 않아서. 평민들 삶이라는 게 니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고.”
“돈이 작위고 돈 많은 놈이 귀족이라지만 넌 그것도 아니잖아. 왕실에 진 빚 갚고 나면 얼마나 네 손에 떨어지겠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직업 군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한센과 요나슨은 그의 전역을 만류했다. 이방인이 홀로 살아가기에는 이쪽 세상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빚 없이 새로 시작하면 되잖아? 후원금에 기대지 말고, 진짜 군인이 되라고.”
영문도 모르고 이 세상에 떨어진 뒤로 처음으로 정을 주고받은 사내들이다. 그 말에 흔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다 저렇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대신 애매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끙. 그래. 생각 많이 해봐. 어차피 시간도 좀 남았을 테니까.”
마법사의 전보를 통하더라도 전장에서의 전과와 상황이 왕실에 도달하기 까지 며칠은 필요했다. 그리고 왕실에서 다시 전공에 대한 포상과 여러 가지를 궁리를 끝내고 전방에 전달되기까지의 시간이 또 한참이었다. 못해도 생각할 시간이 한 달은 남은 것이다.
“그러죠. 뭐.”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 클라크가 막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좋은 소식이다. 중대장님이 외박을 허락하셨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의 대화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갑시다!”
순식간에 채비를 마친 기병대원들이 우루루 막사를 나섰다. 때 마침 건너편 막사에서도 기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먹고 마시고 죽자!”
되도 않을 구호를 외치며 기병들이 마구간을 향해 질주했다. 김선혁 역시 한센의 억센 손에 이끌려 내달려야 했다.
“이 새끼들아! 곧 정식으로 포상 휴가 나올 테니까, 벌써부터 힘 빼지 말라고!”
짐짓 엄하기만 한 클라크의 엄포였지만, 정작 본인도 동료들에게 뒤질 새라 내달리고 있었다.
**
주둔지 인근에는 마을이 몇 개 있었다. 그게 주둔지가 생기고 생겨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마을이 있던 곳에 주둔지가 생긴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주 수익원이 24연대의 병사들이라는 것만큼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마을사람들의 생업은 전부 군인들의 기호에 맞춘 것들 뿐이었다.
“엄청나네요.”
사창가와 술집, 그리고 여관들까지. 오가는 행상도 그다지 없는 변두리 마을 치고는 지나치게 향락적인 분위기라 김선혁은 입구에서부터 질려버리고 말았다. 저쪽 세상에도 이런 분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쪽 세상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물어볼 거 있나! 여기가 바로 낙원인데!”
요나슨의 대답에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니, 앞니 빠진 한센이 바람 새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각자 취향대로 흩어지고! 밤까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여관’으로 모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가자더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딘가의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수상하고 조야한 이름에 김선혁이 실소를 머금었다.
“우리는 일단 밥부터 먹자. 짬밥만 보면 아주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야.”
그중에서도 3조의 사내들은 식당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간의 부실했던 식사를 만회하기라도 할 것처럼 엄청난 양의 식사를 주문했고, 또 그걸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아. 배부르다. 요즘 취사반 놈들이 영 신경을 안 써서 속이 허했는데, 간만에 포식했네.”
“이제 그럼 제대로 시작해볼까.”
김선혁은 그렇게 처먹어놓고도 이제야 시작한다는 말에 황당한 얼굴을 해보였다가, 그들이 말한 시작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쭉쭉쭉! 술 들어간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통에 흘려대는 술이 절반, 하지만 뭐가 좋은지 사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이 새끼, 잔 밑에 깐 거 보소.”
“내가 너보다 세잔 더 마셨거든?”
“술도 젤 못하는 놈 둘이 아주 난리들이네. 다 내 밑으로 무릎 꿇어.”
여느 사내들이 그렇듯이 주량을 겨누기도 하고, 웃고 떠들고 욕도 하고 끝내는 다시 낄낄대며 웃어대는 그들의 모습에서 생기가 흘러넘쳤다. 그 어디에도 끔찍했던 전장의 그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분위기가 너무도 기껍고 자연스러워 김선혁도 어느 순간 그 틈에 끼어들고 말았다.
“자! 마셔요! 마셔요!”
몇 잔 술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가 잔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그 순간 술집에 정적이 찾아왔다.
“어떤 새끼가 저놈 술 먹였어!”
“술 뺏어!”
지난 주사를 떠올린 사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오. 짜증나.”
다행스럽게도 김선혁의 일탈은 미수에 끝이 나고 말았다. 놀란 기병대원들이 술잔을 빼앗고 법석을 떨어대는 통에 취할 새가 없었던 것이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제 앞에 놓인 정체 불명의 무알콜 음료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화장실!”
버럭 소리를 지르니 사내들이 별 것도 아닌 말에 낄낄대며 웃어댔다.
**
술판은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적게나마 몰래 마신 술도 완전히 깨어버린 김선혁은 적당히 틈을 보다 미리 잡아둔 숙소로 올라갔다. 기병대원들은 그를 잡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더 심통이 났다.
완전 애 취급이네.
지은 죄가 있어 항의하지도 못하고 그는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린 그는 웬 야시시하게 생긴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녀는 아래 아저씨들이 따로 보냈다며, 웃어보였는데 김선혁으로서는 황당할 지경이었다.
아니. 하나만 하라고.
술도 못 마시게 하고 애 취급하더니 이제는 또 여자를 보냈다. 종잡을 수 없는 동료들의 태도에 한숨을 내쉰 김선혁이 정중하게 여인을 돌려보냈다.
“진짜 후회 안 해요? 나 이 가게 에이슨데?”
화장 떡칠한 얼굴에 촌스러운 색조로 눈두덩이를 덮은 여인, 그것도 자세히 보니 이모 뻘은 되어 보이는 여자가 눈웃음을 치며 애교를 부리는 것은 차라리 끔찍한 기분이었다.
“후회 안 합니다. 그러니 안녕히 가세요.”
오는 여자 마다하는 사내는 없다지만, 그는 아니었다. 외모를 떠나서 저쪽 세상의 청결함에 익숙해진 그가 견디기에는 이곳 사람들의 체취는 지나치게 강렬했다.
“내가 진짜 잘해줄 수...”
“아, 좀! 가시라고요!”
**
“이 새끼. 돈 귀한 줄 모르고.”
“이 고자새끼. 아주 한센보다 더한 놈이야.”
요란스럽던 외박이 끝이 나고 돌아가는 길, 김선혁은 내내 동료들의 타박을 받아야 했다. 선배들이 아끼는 마음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여자를 붙여줬더니 거부를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 진짜. 그럴 거면 차라리 한센이 하지 그랬어요!”
순간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기병들이 입을 다물더니, 이내 야유를 퍼부었다.
“너 말이 너무 심했어.”
“당장 한센한테 사과해.”
가장 앞서서 구박하는 한센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동료들의 맹공을 받고 말았다. 저들끼리는 고자니 뭐니 잘도 놀려대면서 이렇게 몰아가는 걸 보면 확실히 일백이 하나처럼 돌격하는 기병대다운 팀워크였다.
“인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하루살이들이 뭘 그리 따지는 게 많아. 그저 살아 있을 때 즐기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이쁜 여자도 품고, 다 그렇게 사는 거야.”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김선혁으로서는 억울하기만 했다. 이쪽도 취향이라는 게 있고 기준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보기에 어제의 그 여인은 그 두 가지 모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 여자를 두고 기껏 이쁜 여자를 걷어찼네 뭐네 떠들어대는 기병대원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눈이 낮다.
이모뻘은 될 법한 여인을 두고 음담패설을 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본 김선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외박을 보낸 김선혁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프레드릭의 호출이었다.
“우리 중대가 이번 전쟁에서 전공서열 1위를 차지했다.”
프레드릭의 말은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악명 높은 사스테인 기병단을 완전히 괴멸시켰으니, 크고 작은 승리들 중에서도 24연대 소속 기병 중대를 따를 자들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귀관의 공이 가장 크다는 게 상부의 판단이다.”
역시나 고지식한 사령관이 있는 그대로 전공을 보고한 모양이다. 이미 각오한 일이라 그는 담백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보상이 꽤 크겠군요.”
“크겠냐고? 아직 귀관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프레드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심이 없는 건지, 그도 아니면 그냥 생각이 단순한 건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한 건 요새에 가봐야 알겠지만, 일단 확정된 포상만 해도 역대 최고라 할 수 있다.”
“오! 그럼 포상금이!”
다른 건 몰라도 자립할 자금이 많아지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다. 그제서야 관심을 보이는 그를 보며 프레드릭이 지금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며 말을 이어갔다.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귀관에게 작위가 수여됐다. 또한 하급이었던 등급이 재조정되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긴장감 완화 겸 다소 쉬어가는 느낌의 편이 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 또 빡세게 달리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는 글쟁이에게 원기옥과 같습니다. 차곡차곡 모여 언젠가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고 연참에 필요한 에너지가 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지구의 독자님들아, 저에게 힘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