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친구와 주인의 차이 -->
난생 처음으로 들어본 정령의 음성 따위,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김선혁은 생각할 것도 없이 정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음이 가자 곧 지배력이 일어났고, 이제껏 그의 지배력에 강렬하게 저항하던 정령은 거부하지 않고 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아티야. 그게 제 이름이랍니다.’
[하급 바람의 정령 아티야(Atiya)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메시지가 채 끝이 나기도 전에 아티야가 불쑥 창끝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
창끝에 꿰뚫린 아티야가 짤막한 눈인사를 남기고는 그대로 흩어졌다. 그렇게 흩어진 아티야의 기운이 순식간에 창을 휘감았고, 부족했던 스킬의 기운을 충당시켜주었다.
“아...”
어린 소녀가 창에 꿰여 흩어지는 모습을 본 김선혁은 순간적으로 멍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적은 이제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고 적 상급 기사의 검광은 거의 완성 직전의 단계였다. 그는 애써 아티야의 모습을 지워버리고는 내지르는 창에 더욱 더 힘을 주었다.
쐬에에엑.
콰아아앙.
찢어지는 파공성과 폭발음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오고 그 사이로 오색찬란한 검광이 쏟아져 나왔다. 다시 한 번 검광과 바람이 충돌했다. 방금 전과 똑같은 상황, 하지만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검광은 소용돌이를 완전히 흩어내지 못했고, 여력이 남은 에너지는 고스란히 적의 선두를 덮쳤다.
“선두 충돌!”
사스테인의 선봉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김선혁이 외쳤다.
“충돌 대비!”
오직 선봉의 등만 바라보며 우직하게 달려오던 중갑 기병대의 대원들이 그의 말에 복창하듯 따라 외쳤다.
**
선봉을 꺾었지만, 적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인마들을 뛰어넘으며 김선혁은 창을 내질렀다. 때 마침 선봉이 무너지고 무방비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 사스테인 기병이 황급히 창을 마주 내밀어왔다.
하지만 선두를 완전히 뭉개고도 파괴력이 조금도 줄지 않은 24연대의 돌격 앞에서 저항은 무의미했다.
“끄악!”
적은 달려오는 속도에 무게가 더해진 그의 창에 갑주 채로 꿰뚫린 채,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제길.
팔이 꺾이기 전에 서둘러 창을 내던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하지만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김선혁은 끔찍한 파육의 감촉에서 전해져 오는 살인의 감각을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꼈다.
하지만 아직 전장의 한 가운데 있었던 탓일까. 그도 아니면 지난 실전의 경험이 그를 다소 무디게 만든 것일까. 그는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훈련받은 대로 자연스럽게 마상용 장검을 꺼내들었다.
“하압!”
꼬꾸라진 인마 너머에서 나타난 새로운 적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검을 치켜올렸다. 방금 전에 공방을 주고받았던 상급 기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섬광,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중갑의 기병을 베어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적의 검이 가슴께를 후벼 파낼 듯이 찔러왔다.
“흐읍!”
김선혁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비틀어 공격을 피해내고는 적을 향해 검을 내지르려다가 주춤 손을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공격한 사스테인 기병이 이미 자신을 스쳐 사라졌던 것이다.
“속도 줄이지 마! 무리해서 마무리 할 생각 하지 말라고!”
빠르게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이 과격한 전투는 진득하게 공방을 주고받을 여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김선혁은 곧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쾅!
이번에는 서로를 향해 내지른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번에도 사상자는 없었다. 그저 서로에 대한 살의만을 확인하고는 아무런 소득 없이 스쳐 지났을 뿐이었다.
“크아악!”
등 뒤로 적의 것인지 아군의 것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에라도 고개를 돌려 아군의 건재함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저 눈앞에서 정신없이 밀려드는 적들의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며, 필사적으로 마주 검을 내지르는 게 최선이었다.
후욱. 후욱.
미칠 듯이 뛰어대는 심장, 전장의 소란에 완전히 마비 되어버린 청각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우우웅 거리는 이명 속에서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그때마다 불길처럼 투구 속이 뜨거워져만 갔다. 그 열기와 흥분, 그리고 살의 속에서 그는 숨이 막혀왔다.
잘 따라오고 있겠지? 설마 나 혼자 남은 건 아니겠지?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굳어간다.
제발. 제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살기 가득한 적의 면면뿐, 그는 부디 자신이 혼자가 아니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한계에 달했을 때, 등 뒤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적을 돌파했다!”
그 순간 한없이 좁아졌던 시야가 확, 하고 넓어지며 몇 남지 않은 적 기병 뒤로 보이는 탁 트인 평원의 모습이 보였다.
**
사스테인 기병단의 기병들은 과연 악명 그대로였다. 조밀하게 짜여진 중갑 기병대의 대열 사이로 파고드는 기마술과, 떨쳐내는 검마다 피어오르는 빛무리는 왜 그들이 근접전에서조차 최강이라 불리는지를 증명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아덴버그 왕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말 위에서만큼은 어지간한 견습 기사 이상으로 강력하다 평해졌던 검력은 존스테인 필그램을 비롯한 정규 기사들에게 봉쇄되었고, 믿었던 마법사는 안유정의 정령에 발이 묶여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사스테인 기병단은 중앙을 돌파당한 채 파도처럼 밀려드는 중갑의 기병들에게 완전히 분쇄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덴버그 왕국군이라고 해서 멀쩡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백에 달했던 중갑 기병대의 기병들은 전투가 끝이 났을 무렵, 그 수가 40여명 남짓만이 남아있었을 뿐이다. 맹스크 기병대 역시 단지 전투를 보조했을 뿐임에도 절반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만큼 전투는 흉험했고 살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는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200에 달하던 사스테인의 악마들 중 살아서 돌아간 이들의 수는 불과 30여기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대승이었다.
“우리가 또 이겼다!”
누군가가 갈라진 음성으로 승리를 외쳤고, 남은 이들이 뒤따라 포효하듯 승리를 부르짖었다.
“추격은 무립니다. 말도 병사들도 전부 한계,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격전의 중심을 피해간 덕에 체력을 비축했던 맹스크 기병대였지만, 더 이상의 공을 욕심 내지는 않았다. 단지 언저리를 맴돈 것만으로도 절반의 병력을 잃었던 차라 도무지 저 무지막지한 적의 뒤를 따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제길. 그 상급 기사 놈. 제대로 마무리 했어야 했는데.”
당연히 압살당했을 거라 생각했던 적 상급 기사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대열의 중심에서 살짝 빗겨난 채로 얄미울 정도로 24연대를 괴롭혀댔다. 그나마 프레드릭이 나서 요격을 하지 않았다면 피해는 더욱 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상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프레드릭은 적 기사의 발목을 잡아두는 게 고작이었고, 전투가 끝나갈 무렵 거의 탈진 직전의 상태로 도주하는 적을 지켜봐야만 했다.
“필시 이름 없는 기사는 아니겠지요. 저 정도의 검력이라면 아마 녹테인에서도 꽤나 이름이 알려진 기사일 겁니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전공이라면 차고 넘치도록 올렸는데.”
맹스크 기병대의 중대장이 전장에 즐비한 사스테인의 전마와 무구들을 가리키며 프레드릭을 위로했다.
“게다가 저놈들이 살아서 국경을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사령관님께서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저놈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개전 초기 발 빠른 경기병 하나가 요새를 향해 출발했고, 전투가 끝이 난 지금 또 하나의 기병이 전령이 되어 요새를 향해 달려갔다. 진즉부터 덫을 파고 있었을 사령관은 적의 잔당 규모를 확인하여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을 것이다. 사령관은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그대들도 모두 수고했소.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번 전투는 우리가 패배했을지도 모르오.”
아쉬움을 털어낸 프레드릭이 안유정과 존스테인 등의 기사들을 불러 공을 치하했다. 중대장의 말마따나 그들이 사스테인 기병들의 막강한 공세를 완화시켜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피해가 나왔을지 몰랐다.
“정규군의 전투라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과격하군요.”
기병들 간의 살벌한 전투에 완전히 질려버린 존스테인 필그램과 기사들의 모습은 비록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전날 보였던 치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 아수라장을 겪고도 전원이 살아남았으니 애초에 이들의 비범함은 증명이 된 것이다.
“자작 역시 수고하셨소. 마법사의 마법을 막아준 덕에 우리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소.”
과도한 힘의 사용으로 완전히 탈진해버린 안유정은 대답할 힘도 없는지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렇게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복잡 미묘하기만 했다.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기병들을 향했다.
“새끼야! 잘 했어!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니! 장하다고!”
“혹시 몰라서 언제든 대열 바꾸려고 준비하고 있었더니, 아주 뒤도 안 돌아보더라.”
“한 아홉 놈쯤 니가 떨군 거 같던데?”
제 몸에서 난 핀지, 그도 아니면 다른 이의 핀지 구분도 가지 않을 정도로 피칠갑을 한 사내들이 한 사내를 둘러싸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김선혁이 있었다.
“용기병이 왜 하급 병과로...”
드러난 전공만 해도 일개 하급 병과의 이방인이 이룰 수 없는 엄청난 것, 하지만 안유정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녀는 정령사, 정령의 냄새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에게서 옅게 풍겨오는 정령의 향기를 느꼈다. 그런데 그 정령의 냄새라는 게 또 하필이면 전투 중에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당했던 자신의 정령이 풍기던 그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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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의 생목숨이 사라진 전투가 끝이 났을 때, 김선혁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죄책감도 전사자들에 대한 슬픔도 아니었다. 그저 한계 이상으로 혹사시킨 육체와 정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끔찍한 탈력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살았기에 느낄 수 있는 것, 결국 살아남고야 말았다는 안도감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 자리에 누가 섰어도 너만큼 하지는 못했을 거야.”
상처입어 만신창이가 된 동료들이 찾아와 격려해주었을 때도 그는 투구를 벗지 않았다. 이 환희와 안도감이 전사자들을 모욕하는 것 같아 그는 바이저를 꾹 내린 채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잘 했다. 잘 해줬어. 정말 잘 했어.”
하지만 클라크와 요나슨을 비롯한 기병대원들은 그쯤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한 얼굴로 몇 번이고 그에게 잘 해주었노라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시간이 지난 뒤에 조금이나마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는 말리는 동료들의 손을 뿌리치고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했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 온전하지 못한 동료들의 시신을 모아 하나로 맞추고, 그들의 무기를 그 곁에 두었다.
당신들이 제 뒤를 지켜줘서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들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몇 번이고 고맙다고 되뇌었다. 그렇게 그는 마음속에 동료들의 죽음을 묻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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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이라는 괴물은 작은 상처조차 물고 늘어지며 마침내 죽음으로 이끌었고, 덕분에 살아남은 이들은 전원이 경상에 그쳤다. 그 때문인지 밤사이 운명을 달리 한 이는 없었다.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전장 정리와 전리품의 수거를 돕기 위해 달려온 보병 중대는 사투 끝에 승리를 거머쥔 기병대의 용맹함에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맹스크 5연대의 추격 끝에 사스테인 기병단은 전멸했고, 부대에 합류해 있던 상급 기사 하나와 마법사를 생포했습니다.”
아무래도 적들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맹스크의 정예들에게 덜미를 잡힌 모양이었다. 이로서 완벽하게 사스테인의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지게 된 것이라며 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24연대의 용투를 치하했다.
그렇게 후속 부대가 전장을 정리하고 축하의 말을 건네는 사이, 김선혁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불러줘서 고마워요. 나의 주인님.’
전날 소멸 되었던 줄 알았던 정령 아티야가 허공을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허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전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전날 보았던 어린 소녀는 온데간데없고, 웬 성숙한 여인이 발가벗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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