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전장의 여인들 -->
“왕실 기사단 소속, 필그램 경이다.”
“왕국의 방패라 불리는 사령관님과 유능한 참모분들을 만나게 되어 몹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왕실 기사단의 존스테인 필그램입니다.”
제법 여유가 있는 몸짓으로 꾸벅 목례를 해 보인 이방인 사내는 스스로를 존스테인 필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그게 낯 설면서도 신기해 김선혁은 빤히 존스테인을 바라보았다.
이방인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를 한 존스테인은 제법 잘 생긴 얼굴에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그런 사내가 기병대의 제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려한 코트를 입고 있으니 그 모습이 꽤나 수려해, 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필그램 경은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기사이며, 왕실에서 따로 성과 이름을 하사할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다.”
사령관은 애초에 계획되었던 대규모 회전은 무산되었지만, 사스테인의 위협만은 그대로인지라 진즉에 전선으로 지원차 출발했던 이방인들이 돌아가려는 것을 따로 요청해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라 말했다.
“거기에 더해 왕실은 거듭된 실패로 인해 생겨난 이방인에 대한 병사들의 불신이 불식시키고, 모든 이방인이 전선의 이방인들과 같지 않음을 보여 저하된 사기를 만회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령관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던 존스테인이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그 말이 꽤나 당돌하고 도전적이었다.
실제로도 존스테인은 꽤나 도전적인 시선으로 김선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전장에서 무너져 내린 다른 이방인들과 그를 똑같이 취급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사스테인을 전멸시킨 1등 공로자를 의식하여 경쟁심을 표현한 것인지는 모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실적이 있으니 무시당할 이유도 없고, 가는 길이 다르니 저 혼자만의 경쟁의식을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새끼. 귀엽게 노네.
그래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존스테인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상대가 당황할 정도로 지극히 평온하고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필그램 경 외에도 따로 추가된 병력이 있네. 우리는 그중에서도 알짜배기들만 추려서 이번 작전에 포함시킬 생각이야. 사스테인이라는 편식장이 놈들이 적당히 군침을 삼킬 정도로 만찬을 차리고 초대장을 보낼 걸세. 물론 그 메뉴가 소화하기 몹시 버겁겠지만, 그거야 저쪽 사정이 아니겠는가.”
사령관은 그들의 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렸으면서도 무시하고 회의를 진행시켰다.
이 양반이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저 군인의 귀감과도 같은 사내가 마냥 우직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차라, 김선혁은 괜스레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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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병력의 규모가 결정되자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순식간에 사스테인 기병단을 옭아매기 위한 덫이 완성되었다. 과연 국경의 한 축을 책임지는 사령관과 이를 보좌하는 참모들 다운 능력이었고 식견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사스테인이 도로 국경을 넘어가는 건 쉽지 않을 듯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군.”
남은 것은 직접적으로 사스테인과 맞붙어야 할 이들의 몫이었다.
“어떤가. 이 정도라면 만족하는가?”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의 지원입니다. 사령관님의 호의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의 중대장은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의 지원이라는데, 승산이 조금은 올라갔나?”
프레드릭의 대꾸를 건성으로 받아넘긴 사령관이 이번에는 김선혁을 향해 물었다.
“제 대답은 아까와 같습니다. 절대로 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사령관은 이번에도 껄껄대며 그의 말에 기꺼워했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국경을 수호하는 군인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사령관은 친히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으며 격려해주었다.
“부디 자네의 말대로 지지 말게. 사스테인에게 꿇리지 않는 아군 기병대의 존재만으로 우리 병사들은 더없는 용기를 얻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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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테인 기병단을 잡을 전략이 완성되자,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는 빠르게 귀환을 서둘렀다. 혹시라도 시간이 지체되면 웅크리고 있던 사스테인 기병단이 인근을 휘젓고 다니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 탓이다.
“더럽히지 마요. 이거 짜는데 오래 걸렸어요.”
귀환 준비에 한창이던 기병대를 엠마가 찾아왔다. 그녀는 직접 수놓은 것이라며 손수건을 만들어 3조의 사내들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뜻밖에도 그중에는 김선혁을 위한 것도 있었다.
“왜요. 뭐. 받기 싫어요?”
얼떨떨한 얼굴로 수건을 받아들고 있자니,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툭, 하고 쏘듯이 말했다.
“아뇨. 그건 아니예요. 고마워요.”
짙게 베인 여인의 향기에 그가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콱 움켜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손수건에 새겨진 수를 보았다.
“불사의 기병대?”
차갑고 도도한 엠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문구,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가 얼마나 이 사내들의 무사함을 기원하는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유치한 이름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엠마가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기왕 받은 거니 잘 쓰겠습니다.”
잽싸게 그 손을 피해 손수건을 챙겨든 그의 말에 그녀가 입을 비죽이다가 다른 사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거 피 묻히지 마요. 물 안 빠지니까. 절대로.”
“오냐. 노력하마. 내 피는 최소한 안 묻히마. 이 어르신만 보면 덜덜 떠는 적군의 피라면 모를까.”
“어련하시겠어.”
역시나 부드럽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이 없는 사내들과 여인의 모습,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따뜻하기만 했다.
“절대 죽지 마요! 죽으면 지옥까지 따라가서 따질 테니까!”
“어쩌냐. 내가 죽어서 갈 곳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인데! 괜히 헛걸음하지 말고 얌전히 가게나 지키고 있어!”
한센이 제 딴에는 재치를 발휘한답시고 대답한 말에 기병들이 재수없는 말을 했다고,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해댔다.
“아직 따라오고 있는데요?”
“내버려둬. 잠깐이야 허전하겠지만, 그래도 강한 아이니 잘 이겨낼 거다.”
멀찌감치 물러서서 한참이나 뒤를 따르는 엠마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렇게 말하니, 기병대원들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발걸음이 느리기만 한 것이 자신들도 뒤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끙. 울고 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겠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고운 뺨에 새겨진 눈물자국이 선명해 김선혁은 괜히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놈들아! 꼭 살아서 돌아와! 나 시집가는 거 보고 죽는다던 약속 꼭 지켜!”
“그럼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겠네! 너 같은 여자애를 누가 데려 가냐!”
결국 울먹임이 가득한 고함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기병대원들은 억지로나마 엠마를 두고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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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서 파견 나온 지원 병력 중 이번 작전에 포함된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구성원이 절대로 녹록치 않은 인물들뿐이었다.
“반갑습니다. 김선혁씨라고 했죠? 저는 이번 파견대의 지휘를 맡은 안유정이라고 해요.”
의외로 파견대의 리더는 존스테인이 아니었다. 책임자랍시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곱게 올려 묶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인으로 귀티가 줄줄 흐르는 미녀였다.
“병과는 정령사입니다.”
잠시 그 고운 얼굴에 눈이 팔렸던 김선혁은 그녀가 스스로의 병과를 밝히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위치를 납득하게 되었다. 기사로 전직한 이들이 전부 중의 등급을 받았다면, 정령사는 마법사와 함께 상의 등급을 몇 안 되는 병과 중 하나였다.
등급이 전부인 이방인들의 대우에서 그녀가 무리의 리더를 맡은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반갑습니다. 김선혁입니다. 제 병과는...”
“알아요. 용기병이죠?”
말허리를 자르고 툭, 하고 지르는 말에 다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그 미묘한 기색에 발끈했을 김선혁이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병과가 그 어떤 병과보다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웃는 얼굴로 도리어 그녀를 도발했다.
“그런데 기병대의 이동이 꽤나 거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말은 이곳에 모인 네 명의 이방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곳 세상의 기사라는 존재들은 사실상 기마 상태의 전투보다 하마하여 제 검술을 발휘하는 것을 선호했고, 당연하게도 승마술이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콕 짚어 물으니, 이번에는 저쪽에서 웃으며 대꾸를 해왔다.
“왕실에서 그런 것도 감안하지 않고 저희를 보냈을까요. 여기 있는 모두 기마술 스킬이 상급인 사람들이에요.”
“아, 유정씨도?”
기사 병과의 사내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정령사인 그녀마저 상급 기마술 스킬을 갖고 있다는 말이 의외라 그렇게 물으니, 그녀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저는 이쪽 세상에 넘어오기 전에 이미 승마가 취미였는걸요.”
어쩐지 얼굴에 귀티가 줄줄 흐른다 싶더니, 원래가 금수저였던 모양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만 있자, 그녀가 뒤늦게 용건을 밝혔다.
“이방인들은 모두가 왕실 직속이라는 거 잊지 않으셨죠? 따지고 보면 선혁씨도 제 책임 하에 있답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 앞으로 저를 부를 때는, 유정씨가 아니라 자작님이라 불러주세요.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잖아요?”
왜 갑자기 출진 하루 전날, 자신을 불러냈나 했더니 서열 정리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애초에 금수저로 태어나 떠받듬에 익숙해 보이는 태도가 그 확신을 더했다.
“기분 나쁘셔도 이게 이곳의 법이라네요.”
“네. 앞으로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자작님.”
“...”
김선혁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애초에 그녀가 직급도 더 높고 등급도 더 높다. 게다가 작위까지 있으니 그녀의 말을 거부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주의니 만인평등이니, 저쪽 세상에서나 부르짖던 가치다. 그나마 그쪽에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가치 없는 것을 이곳에서까지 고집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것은 상명하복이 원칙인 군대에서 생활하다 온 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아니었으며,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안유정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뭔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안달이 난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지만 트집 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는 너무도 간단하게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었으니까.
“앞으로 제 지시를 따르도록 해요. 저 야만적인 현지인들보다는 우리끼리 함께 행동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 테니까요.”
“그건 어렵겠는데요.”
장단을 맞춰주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끌려 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적당한 선에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사령관님께서 제 소속을 분명히 24연대 중갑 기병 중대로 정해주셨고, 제 직책은 중대의 선봉입니다. 만약 그게 마음에 안 드시면 사령관님께 따로 요청을 하시죠. 명령이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무리 왕실 소속의 이방인들이라 해도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다. 요새의 최고 책임자인 사령관의 명령을 번복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음흉한 양반은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이런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의 말을 쉬이 들어줄 위인이 아니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가능할 텐데요.”
“제가 원하지 않으니까요.”
딱 잘라 선을 그은 김선혁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을 보았다. 존스테인 필그램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와 아예 소개조차 받지 못한 기사 병과의 사내들이 셋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못마땅한 얼굴로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뭉쳐야 하지 않냐며 불만을 표했다.
같은 처지?
이미 왕국이 베푸는 후의에 젖어 벌써부터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에 절여진 그들과 한데 묶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직 능력으로 사람을 판단하던 이은서가 차라리 귀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만큼 그는 이들이 거북스웠다.
“이번에 세운 공이 있으니, 곧 중앙으로 불려 올 텐데. 우리 말고 믿을 사람이 없을 텐데요?”
애써 부드러운 말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건 그녀의 타고난 태생이 귀하고 스스로의 고상함을 유지하기 위한 습관일 뿐 존중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영 자신과 맞지 않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제가 원래 시키는 건 잘 하는데, 굳이 나서서 뭘 챙기고 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요.”
굽히지 않는 모습에 그녀가 못마땅한지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혹시 바람 속성 정령을 다루십니까?”
뜬금없는 그의 말에 안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딱히 공개적으로 능력을 퍼뜨리고 다닌 적은 없는데. 제 친화력이 그쪽으로 특화되었다더군요.”
그녀의 질문에 김선혁이 씨익 웃었다.
“친화력 말입니까?”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질문에나 답해요.”
“글쎄요. 그냥 그게 느껴지네요.”
저쪽은 친화력, 이쪽은 지배력이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굳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퇴고하다 보니 ㅜㅜ
*이벤트 종료되었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는 글쟁이의 좋은 단백질원입니다.
*제목 드래곤 푸, 아니 드래곤 푸어 김선혁에서, 드래곤 푸어로 줄였습니다.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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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 이 글과 구작 하나를 붙들고 잠을 거의 못 자는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깜박 졸고 말았습니다. 사과드리며 너른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ㅜㅜ
그럼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서 22화~25화까지의 댓글 이벤트 당첨자 발표합니다.
이클립스월드팬 / 캠폐 / 나는야솔로 / 젠포문
당초 말씀드렸던 3분보다 1분 늘어난 4분을 추첨했습니다. 추첨기가 멋대로 4분을 뽑으셨... 하지만 저는 상남자라 돌아보는 법이 없습죠. 데헷. 그냥 4분으로 하겠습니다. 쾅쾅. 끗!
당첨되신 독자분들 축하드리며, 쪽지 보내주시면 확인하여 17일까지 딱지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첨되지 않으신 분들도 실망하지 말아주세용. 조만간 훨씬 많은 분들을 대상으로 이벤트를 할 예정입니다. 그럼 저는 다음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