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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푸어-22화 (22/305)

<-- 11. 기병 잡는 기병대 잡는 기병대 -->

그것은 소리 없는 속삭임이었으며, 형태 없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김선혁은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동쪽?”

그 외의 것은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적들이 존재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파악해낼 수 있었을 뿐이다.

“적들이 옵니다!”

김선혁은 지체하지 않았다. 버럭 소리를 치니, 바삐 움직이던 기병대원들이 그와 프레드릭 중대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거리는?”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하지만 멀지는 않습니다!”

프레드릭의 질문에 굳은 얼굴로 대답하니, 성질 급한 중대장이 풀쩍 말 위에 올랐다.

“전리품 수확은 여기까지다! 전원 기마(騎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부분의 대원들이 손에 쥔 전리품을 내팽개치고는 재빨리 애마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곧장 대열을 갖추고는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클라크의 질문에 프레드릭 중대장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맹스크 요새까지 멈추지 않고 달린다! 최악의 경우 수레는 버리고 말만 챙긴다!”

아무래도 두 번이나 사스테인 기병대와 전투를 하는 건 위험이 너무도 크다고 여긴 모양이다. 다른 대원들도 당연히 그럴 거라 여겼는지 전공에 눈이 멀어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선두는 9조! 비전투 대형으로 신속하게 이동!”

이내 발굽이 지축을 때려대고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 중대는 전장을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했다.

“음...”

붉게 물들어버린 대지, 그 참사의 현장을 김선혁은 몇 번이나 돌아보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기병대를 뒤따라 사라졌다.

**

다행스럽게도 맹스크 요새로 향하는 길은 순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위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남쪽! 동남쪽! 아무래도 추월해서 길을 막으려는 것 같습니다!”

“선두 방향 틀어! 동북쪽 방면으로!”

김선혁이 그 모든 위험을 사전에 감지해냈고, 그때마다 부대는 방향을 틀어 적과의 거리를 더욱 더 벌렸다. 그 바람에 빙 둘러서 맹스크 요새까지 가게 되어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지만,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이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적들은 추격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한창 속도를 올려 접근하던 적의 기척이 어느 순간이 되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몇 번이고 그 사실을 확인한 김선혁이 한 발 늦게 부대에 적의 추격이 떨어져나갔음을 알려주었다.

“여기서부터는 맹스크 요새 소속 장거리 순찰대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길목이다. 아마 적들도 더 이상 욕심을 내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겠지.”

전투 직후 꼬박 하루를 쉬지 않고 달렸다. 말이 지치면 전리품으로 얻은 적 기병대의 말에 옮겨 타고 달렸고, 전리품 가득 실은 수레가 고장 나도 말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사람에게도 말에게도 괴롭기만 한 시간, 하지만 그들은 마침내 해냈고 낙오되는 이 없이 적의 추격을 뿌리칠 수가 있었다.

“선두 속도 낮추고, 이동하며 각자 장비와 말의 상태를 점검한다.”

프레드릭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기병대원들이 한숨을 내쉬며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베테랑 기병대원들답게 제 몸을 돌보면서도 말의 상태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와. 이게 말이 돼? 우리가 이걸 해냈다고?”

기병대원들은 스스로가 이 미친 행군을 무사히 완수해냈다는 게 도리어 신기한 모양인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요새 들어가면 아무도 안 믿으려나? 사스테인 기병대를 전멸시키고, 이틀을 잠도 안자고 달렸다고 하면 허풍이라 하겠지?”

“만약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하는 놈이 있으면 주둥이를 뭉개주마.”

“한센, 너는 주둥이가 아니라 다른 게 뭉개졌... 아니다. 미안.”

뒤늦게 여유를 되찾은 기병대원들이 낄낄대며 농담을 해대는 가운데, 유독 김선혁만이 축 쳐져 말 위에 엎드린 체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뭐, 낙오 안 된 것만 해도 장한 거지.”

“그래 인마. 너는 첫 출전에서 무지막지한 공을 세우고, 전사에 길이 남을 말도 안 되는 행군의 현장에 있었던 거라고.”

동료들의 격려 아닌 격려에 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지쳤는데...

지친 나머지 내뱉지 못한 한 마디를 꿀꺽 삼키며, 그는 말없이 손을 휘저었다.

기병대원들은 자신들이 완수해낸 무지막지한 질주가 마냥 자랑스러운 모양이었지만, 그는 그들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도 안 되는 질주의 성공 뒤에 그의 처절한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풍신(風身)

김선혁은 이틀간 말을 내달리는 동안 단 한 번도 풍신의 능력을 해제한 적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지친 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고, 기력 고갈된 기병들에게 활기를 북돋았다. 중간중간 풍령을 통해 파악한 적의 접근을 알려준 것은 덤이었다. 그러한 그의 노력 덕분에 누구 하나 낙오되지 않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 노력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기병대원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얄미워져 그는 풍신의 능력을 해제했다.

“으억! 갑자기 몸이...”

“어? 말이 왜 이래?”

갑작스레 무거워진 몸, 활기를 잃은 말의 걸음에 기병대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킬킬대며 웃어대던 그가 다시 풍신의 능력을 불러일으키려다 포기했다.

아. 이젠 진짜 손 하나 까딱하기 싫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갑작스레 찾아온 피로에 도무지 능력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음?”

그렇게 말목에 머리를 파묻고 나아가기를 한참, 접근하는 소규모 부대가 느껴져 고개를 드니 빠르게 접근해오는 익숙한 복색의 기병들이 보였다.

“맹스크 순찰대다!”

**

“앞으로!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도착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것 같아 사령관님도 걱정하시던 참입니다. 이렇게 무사하신 것을 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퇴각한 27연대의 전령을 통해 이미 소식이 전해졌는지, 순찰대의 대원은 24연대 기병대의 무사함에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령관님께 심려를 끼쳐드렸군. 하지만 이쪽도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지.”

“들어 알고 있습니다. 27연대처럼 큰일을 당하지 않아 다행...”

알 만 하다는 표정으로 프레드릭 중대장의 말을 받던 순찰대원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대화 도중에 프레드릭 중대장이 불쑥 전리품이 가득 실린 수레를 가리킨 것이다.

“오는 길에 교전이 있었다. 저건 전리품이지.”

“사스테인 놈들 말고도 국경을 넘은 적이 있었군요! 사령관님께 어서 알려야...”

호들갑을 떨던 순찰대원이 또 입을 다물었다. 수레 위에 실린 전리품 더미 안에서 붉은 깃 달린 투구를 발견한 탓이었다.

“저, 저건... 설마?”

“맞아. 사스테인의 것들이다.”

그렇게 말한 프레드릭이 잠시 뒤를 돌아보며 김선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순찰대원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 1개 중대 규모의 사스테인 기병단의 기습을 받았으나 큰 피해 없이 격퇴했다. 사스테인 놈들 중 생존자는 없다.”

“아...”

생각지도 못한 승전보에 입을 쩍 벌린 순찰대원을 보며 프레드릭은 애써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잡고는 근엄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대에게 묻겠다! 강대한 적을 맞아 더 없는 용맹과 투지를 보이고 마침내 승리한 우리는 맹스크의 개선식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있습니다.”

“허면 지금 뭐 하고 있는가! 당장 달려가서 이 크나큰 승리를 알려 지친 병사들을 위무하라!”

프레드릭의 호통에 순찰대원이 찔끔 놀란 얼굴로 대원 몇을 선별해 맹스크 요새 방향으로 보냈다.

**

과연 사스테인의 악명은 드높았다. 그간 수십의 기병대를 잡아먹고 그 만큼의 국경 마을들을 초토화시킨 기병들은 아덴버그 왕국군이라면 누구나 증오해 마지않는 악마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악마들을 비록 1개 중대라지만 압도적으로 전멸시킨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의 업적은 근래 보기 드문 승리였다.

“최강 기병대! 24연대 소속 중갑 기병대 만세!”

“프레드릭 실더프 기사님 만세!”

입구까지 나온 맹스크 정예 부대의 사열식을 받으며 요새 내부로 들어선 김선혁을 반긴 것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열렬한 환호였다. 물론 대부분의 환호는 부대를 승리로 이끈 중대장을 향해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눈초리로 기병대원들을 보고 있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들의 환호를 바라보던 그를 본 클라크가 슬쩍 다가와 말했다.

“맹스크 요새 소속 병사들 대부분이 국경 인근 마을에서 차출된 이들이야. 그들 중 사스테인 놈들에게 제 누이와 형제 부모를 잃지 않은 사람이 없어.”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들을 맞이하듯 도를 넘어선 환호에 얼떨떨해 있던 김선혁은 그제서야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알겠어? 우리는 저들에게 있어 제 피붙이의 복수를 해준 영웅들이라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틀을 꼬박 내달리며 지친 육신도, 속성을 사용하느라 고갈된 기력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펴고 창을 높게 쳐들었다.

“손 한 번 흔들어줘. 중대장이 그래도 널 젤 앞에 세운 건 나름대로 네 공을 예우해준 거니까.”

그 말에 슬쩍 손을 들어 올리니, 과연 클라크의 말대로 병사들이 자지러질 듯이 환호했다.

“최고다! 니들이 진짜 사나이다!”

“나중에 우리 마을에 오면 밥 한 번 제대로 대접할 테니, 언제든 오라고! 24연대!”

“잘생겼다! 사랑해! 난 당장에라도 대접할 용의가 있어!"

중간에 뭔가 위험스러운 반응이 섞여 있었던 것 같지만 기분 탓이리라.

**

요새에 도착해 짐을 풀고 쉬고 있자니 듣기 싫어도 최전방의 상황이 들려왔다. 국경으로 전진 배치된 적 연대 탓에 맹스크 요새의 병력은 발이 묶였고, 국경을 제 집처럼 휘저어대는 사스테인 기병단을 보며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차에 김선혁이 속한 24연대 중갑 기병대가 국경을 넘은 사스테인 기병대를 전멸시키는 바람에 전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그 사스테인을 잃을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중대 하나를 통째로 잃은 사스테인 기병대는 감히 더 국경을 휘젓지 못하고 도로 본대와 합류하였으며, 더 이상 추가적인 도발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군 경기병대도 당했지만, 그래도 피해를 최소화해서 부대가 붕괴되는 것만큼은 막은 모양이다. 서로 주고받긴 했는데 이쪽이 훨씬 더 이득을 본 셈이지.”

사람 목숨을 그리 쉽게 저울질하고 셈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김선혁은 그저 말없이 클라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곳 세상은 이런 세상, 싫어도 적응해야 했다.

“가자. 통 큰 사령관님께서 우리 기병대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셨단다.”

“끄응. 그냥 쉬었으면 하는데.

그나마 말도 안 되는 강행군 끝에 도착한 기병대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면, 어제 불려갔을 것이라며 클라크가 그를 억지로 잡아 끌었다.

그렇게 불려간 요새의 홀에는 벌써부터 술냄새와 고기냄새가 진동을 했다. 지친 나머지 식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시큰둥했던 김선혁마저도 군침이 돌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향이었다.

“오오! 사스테인 악마들을 처단한 용사들이 왔구만!”

“어디 그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맹스크 요새의 사람들 탓에 한참이나 진땀을 빼고 있던 김선혁과 부대원들을 도와준 것은 사령관이었다.

“사령관님 나오십니다!”

“부대 차려어어엇!”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경례를 하니, 사령관이 흐뭇한 얼굴로 그들에게 웃어보였다.

“편하게 쉬도록. 이러자고 만든 자리가 아니니까.”

군데군데 희끗한 머리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요새의 사령관은 더없이 강건해 보였다. 정기 넘치는 눈동자 하며 근육질의 몸이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움츠려들게 만들 정도였다.

“자, 음식 앞에 두고 길게 이야기 하는 것만큼 보기 싫은 건 없지. 그러니 간단하게 말하겠네.”

지난번에 주둔지에서 이은서와 함께 보았을 때와는 달리, 꽤나 담백한 모습이었다.

“귀관들의 승리가 자랑스럽고 기쁘다. 오늘만큼은 그 어떤 추태를 보여도 흠 잡지 않을 터이니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와아! 사령관님 만세!”

짧은 건배사 끝에 기병들이 사령관 만세를 부르고는 난장판을 벌였다.

“선혁.”

기병들 사이에서 막 신나서 고기를 물고 뜯던 김선혁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잠시 사령관님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단다.”

“저 같은 일개 기병을 왜...”

이미 프레드릭 중대장과 입을 맞추어 모든 영광은 중대장이 가져가기로 하지 않았던가. 난데없는 호출에 김선혁이 고개를 돌리니 프레드릭이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자네가 바로 그 친구로군.”

주춤거리며 다가가 군례를 올리니 사령관이 호탕하게 웃으며 친한 척을 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지나쳐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사령관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그래. 자네가 이번 승리의 주역이었다고?”

그대로 굳어버린 그가 프레드릭 중대장을 향해 사나운 눈길을 보내니, 중대장이 걱정 말라고 눈짓을 보내왔다.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코멘트는 사랑입니다. T^T

*이벤트는 계속 진행됩니다.

*현지인과 이방인들의 능력치, 궁금해 하시는 분이 많아 설정 란에 따로 추가했습니다.

*모든 댓글은 몇번씩 곱씹어 읽고 있습니다. 짧고 긴 감상들과 격려, 그리고 조언과 비판 모두 뼈에 새기고 앞으로 글이 비틀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토리에 관계된 질문은 답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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