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기병 잡는 기병대 잡는 기병대 -->
오랜만에 말을 걸어온 용의 존재가 반가울만도 하련만 김선혁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으며, 오물 가득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을 뿐이었다.
[저들에게는 그대와 그 동료들을 몰살시킬 능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그들이 단지 그대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리라.]
그 말이 꼭 저 죽을 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다며 질책하는 것 같아 그는 울컥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약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은 강자의 도량, 허나 그대에게는 아직 허락되지 않은 것이노라.]
이번 승리가 얼마나 요행에 가까웠는지 그도 느끼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그대가 상대했던 이들과 비슷한 기운이 있으니, 행위에 대한 대가를 벌써 셈하기에는 성급하다.]
주저앉아 있던 김선혁이 몸을 일으켰다.
용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고작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 아직도 자신은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죄책감이니 뭐니를 따지기에는 너무 일렀다.
지금은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살아남거라. 진창을 구르더라도 살아남아 마침내 나에게 이르거라. 그때가 되어야 그대의 긍휼이 오만과 무지의 산물이 아닌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되리라.]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솟구치던 선혈과 육편에 대한 혐오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혹한 세상은 그에게 나아가라 말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세상...”
현실을 받아들인 순간, 솟구치던 욕지기도 혼란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차오른 것은 더 없이 선명한 생존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대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이 감히 창칼 꺼내어 보이지 못하게 하라. 그것만이 그대가 강구하는 평안을 이루는 유일한 길일 지어다.]
광오하기만 한 용의 말에 김선혁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탁하게 바래있던 눈동자에 어느새 빛이 돌아와 있었다.
“그런 거창한 것 따위는 난 몰라.”
바싹 메마르고 가라앉은 음성, 그렇기에 그의 음성은 깊이가 있었다.
“그냥 난 살아남을 거야. 이런 거지같은 세상에서 허무하게 죽지 않을 거라고.”
어딘지 모르게 막연했던 그간의 각오가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대의 바람은 분명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에 속하리라.]
처음으로 들은 온화한 음성이었다.
[지금과 같은 각오를 잊지 않는다면 그대는 반드시 나에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대는 나의 반려로 부끄럽지 않은 전사가 되어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성별을 알 수 없는 음성에 묘하게 간질거리는 것이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김선혁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반려, 반려 거리는데. 너 혹시 암컷이야?”
[...]
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
“선혁.”
용은 그 뒤로 몇 마디 말을 더 건네고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작별을 고했다. 결국 성별에 대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김선혁은 왠지 용이 암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예상이 틀려 용이 수컷이라면, 그건 또 나름대로 소름이 돋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용의 성별이 아니었다. 용은 분명 사스테인과 비슷한 기운의 존재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노라 말했다.
때 마침 클라크가 그를 불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렇게 부르는 곳이 시체 가득한 전장이었던지라 김선혁은 주춤거리고 말았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긴 했지만, 제 손으로 만들어낸 참혹한 현장을 마주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네.”
하지만 언제까지고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가 이를 악물고 클라크에게 갔다.
“이거 봐.”
클라크는 시체 더미를 뒤져 보이며 그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을 했다.
“음...”
일부러 그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충격요법을 통해 그가 지닌 살인의 거부감을 둔감하게 만들려는 것일까. 둘 다 아니었다.
“이놈들 27연대랑 우리랑 만나기 전에 마을 몇 군데를 습격한 모양이야. 너도 이 얼굴 기억나지?”
“호, 혹시?”
자꾸만 다른 곳으로 돌아가려는 눈을 억지로 잡고, 고통에 일그러진 눈을 마주한 김선혁은 신음을 내뱉었다.
“맞아. 전에 우리가 훈련 중에 하루밤 보냈던 그 마을의 촌장이다.”
“어, 어째서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을!”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그들이 기동력을 포기하고 병참을 끌고 다닐 것 같았어? 제 나라의 백성들 것조차 빼앗고 강탈하는 게 익숙한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적국의 백성들을 사람 취급이나 할까.”
김선혁은 순수하게 분노했다. 제 가게를 다 부숴먹은 사내에게조차 국경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하던 순박한 노인이었다. 그런 노인이 무슨 죄가 있어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게 바로 사스테인이고, 이게 녹테인의 방식이다. 만약 우리가 전멸하거나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면, 마을 몇 개쯤은 아마 더 작살이 났을 거다.”
클라크가 손짓으로 주인 잃은 말들을 가리켰다. 한 때 용맹하고 무자비한 사스테인 기병을 태우고 평원을 내달렸을 말들, 그 옆구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머리통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알겠어? 그 참사를 네가 막은 거다.”
이들을 죽인 것은 죄가 아니라 말하는 클라크의 모습이 마치 면죄부라도 발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그러니 어깨 펴고, 자랑스러워해라. 네가 우리를, 그리고 그 마을들을 지켜낸 거야.”
비겁하다 욕해도 좋았다. 간사하다 비난해도 상관없었다. 클라크의 말이 그에게 위안이 된 건 사실이었으니까.
조금은 그늘이 걷힌 김선혁의 얼굴을 본, 클라크가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중대장한테 가봐라. 아저씨 몸 달아서 아까부터 너 찾더라.”
“중대장이 왜...?”
“왜긴 왜야.”
그의 질문에 클라크가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얼굴을 해보였다.
“전공 때문이지.”
**
클라크의 짐작이 맞았다. 프레드릭 중대장이 김선혁을 부른 것은 전공 때문이었다.
“힘을 숨기고 있었더군.”
공을 세웠다고 하루아침에 대우가 달라질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아, 추궁하려는 건 아니야. 그저 그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지.”
중대장은 더 이상 그를 강압적으로 대하지도, 그렇다고 대놓고 타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귀찮은 일? 이를테면?”
“저는 24연대가 좋고, 지금의 동료들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딱히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답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중대장이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거두고 답지 않게 온화한 얼굴을 해보였다.
“귀관의 동료애가 감탄스럽군.”
중갑 기병대의 대원들은 하나 하나가 십인대를 이끄는 지휘관의 자격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단 한 번도 그를 사관 취급 해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아주 좋아. 귀관 같은 유능한 기병이 있다는 건 왕국의 홍복이고 우리 연대의 자랑이야.”
당장 태도부터가 달라진 중대장의 모습이 언뜻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 같았지만, 김선혁은 그 너머에 보이는 탐욕과 출세욕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단 한 순간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안타까워. 왕실은 귀관과 같은 인재가 국경에서 썩기를 바라지 않거든. 모르긴 몰라도 그대의 전공이 알려지면, 왕실은 귀관을 불러들이겠지.”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정하고 몇 번이나 클라크를 비롯한 기병대원들과 입을 맞추어 놓았다. 그는 왕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혹은 단 번에 빚을 청산하고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중대장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한참동안 그의 이야기를 듣던 중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명예라는 것은 귀관의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대단한 것일세.”
“상관없습니다. 저는 속물이라 실리만 챙길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중대장이 껄껄대며 웃었다.
“속물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지. 나처럼 허영심이 넘치는 자보다 귀관 같은 성격이 더욱 실속이 있는 법이야.”
“그럼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그대가 요구한 모든 것들을 성실하게 지킬 것이다.”
“거래 성립이군요.”
김선혁의 말에 중대장이 웃는 낯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앞으로 잘 해보도록 하지.”
“아, 근데 말입니다.”
그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국경을 넘어온 사스테인 놈들이 또 있는 것 같습니다.”
한창 훈훈하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단 번에 냉랭해졌다.
“그걸 어떻게 알지?”
“이방인에게 주어진 능력이라고 여겨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지금 만큼 이방인이라는 위치가 좋은 핑계거리가 될 때가 없었다. 그의 말에 중대장은 더 캐묻지 않았다.
**
“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가능하면 값나가는 것만 챙기고 소소한 건 나중에 회수하도록 한다.”
프레드릭의 지시에 전장을 정리하며 주인 잃은 말들과 무기들을 챙기던 기병들의 손이 더욱 더 빨라졌다. 특수하게 제작된 사스테인 고유의 활과 말을 우선적으로 챙겼고, 나머지는 온전히 개개인의 선호대로 물건을 챙겨들었다.
이제 많이 평정을 되찾았다지만, 아직까지 시체를 뒤져 전리품을 챙길 정도는 아니었던 김선혁은 멀찍이서 그렇게 부산을 떠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 건 우리가 알아서 제일 좋은 놈으로 챙겨줄게. 말이랑 활이야 위에서 관리하겠지만, 그 외에는 줍는 놈이 임자일 테니까.”
그런 그에게 클라크를 비롯한 기병 대원들이 걱정 말라며 훠이 훠이 손을 내저었다.
“끙.”
익숙하지 않은 노동 현장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스테이터스 창을 열었다.
[김선혁]
□ Level. 5
□ 용기병(Dragon Rider)
□ 고유 속성
-풍(風) / 속성 지배력 80
:풍아(風牙)
:풍신(風身)
:풍령(風靈)
□ 근력 25 / 지구력 24 / 민첩성 27 / 마법 저항력 34
□ 보유 스킬
-드래곤 테이밍
-드래곤 라이딩
-차징(Charging)(風)
-윈드 피어싱(Wind Piercing)(風)
-속성 무기술(중급)
-상급 기마술
: 상급 기마술 + 차징 = 혼연일체의 차징(風)
-왕국 표준 창술(상급)(風) 〈-〉 왕국 표준 기마창술(상급)(風)
-왕국 표준 검술(하급)(風) 〈-〉 왕국 표준 기마검술(하급)(風)
-중갑 기동(30Kg) 〈-〉 중갑 기마 기동(75Kg)
-보병 방패술(상급) 〈-〉 기병 방패술(상급)
-상급 작업 기술(토목)
정신없는 와중에 얼핏 레벨 법 했다는 메시지를 들었던 것 같더니, 그게 사실이었을 줄이야.
“5레벨...”
단 번에 레벨이 한 계단 상승했고, 창술을 비롯한 몇몇 스킬들의 등급이 올랐다. 역시나 실전이야 말로 가장 좋은 훈련이라는 말은 정말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스테이터스를 확인하던 김선혁이 속성 항목의 풍아 아래 생겨난 새로운 항목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풍신이 뭐야. 풍신이...”
어감이 몹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감과는 별개로 그는 이내 얼굴을 펴고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게 그건가.”
언제나처럼 설명 한 줄 없는 불친절한 스테이터스, 그는 본능적으로 풍신의 효과를 알 수 있었다. 속성을 통해 몸을 가볍게 하고, 더 나아가 동료들마저도 그 효과를 함께 누릴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의 이름이 아마도 풍신이리라.
막연하게 쓸 수는 있었지만 항목으로 정리되어 이제는 한 결 사용하기 편해졌을 풍신, 소득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풍령(風靈).
새롭게 추가된 속성의 힘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용의 말처럼 멀지 않은 곳에서 접근하는 적이 있음을 끊임없이 알려주었다.
========== 작품 후기 ==========
*가장 많은 분들이 관심을 주셨던 '반려'라는 단어는 짝이 되는 벗, 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혼인 시에 흔히 말하는 남녀 간의 결합과 관계를 칭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용의 성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의 정신적 방황과 이로 인한 미숙한 모습에 대한 독자분들의 의견 잘 보았습니다. 하여 조금 다수의 분들께서 더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약간의 보강 작업을 했으며, 훈련의 노력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 오해가 없도록 묘사를 수정하였습니다.
*비난이 아닌 비판과 비평, 조언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독자분들의 수많은 피드백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가로 설명을 드리자면, 첫 실전의 묘사와 심리는 세계 각지에서 실전을 겪는 미 해병대와 군의 실제 PTSD 사료와 첫 실전 경험담, 인터뷰를 조사하여 근거로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근접전이라 할 수 있는 시가지 전투와, 타겟을 눈으로 확인하고 노려서 제거하는 저격수들의 사례를 토대로 냉병기 전투 상황에 맞도록 각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쟁이의 능력이 부족한 관계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상황, 묘사가 부족하다거나, 어그러짐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꾸준히 전편을 되돌아보며 지속적으로 수정하여, 차후 오해와 거부감이 없도록 수정하고 보강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멘트와 추천은 주저앉은 글쟁이를 다시 불러 일으키는 기적의 힘입니다.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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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이벤트 다시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22~25편에 달린 댓글들을 추첨하여 26편에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드래곤 푸, 가 아니라 드래곤 푸어에 바라는 점이나 간단한 감상, 또는 글쟁이에게 하고 싶은 말씀 등등 그 어떤 말이든 상관 없습니다.
**이벤트 참여를 원하시는 독자분들께서는 반드시, @참여. 라는 말을 써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해당 키워드를 검색하여 리스트를 추릴 예정이라 문구가 빠지면 리스트에 누락됨을 알려드립니다. 추첨 상품은 딱지 50매이며 추첨 대상은 3분입니다.
*서평 이벤트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