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기병 잡는 기병대 잡는 기병대 -->
실전의 중압감 따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말을 내달리는 자신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온몸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마치 온 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간 듯한 기분, 손발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정신 차려!”
투구의 뒷면을 후려치는 우악스러운 손길이 없었다면, 어쩌면 김선혁은 그대로 말에서 고꾸라졌을지도 몰랐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피가 베어나오도록 이를 악물었다.
핏대가 선 눈을 투구 뒤에서 부릅떴다.
얼굴 가리개에 뚫어둔 좁은 틈 사이로 저 멀리 먼지를 피우며 급격하게 좌로 몸을 트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온몸을 철갑으로 둘러싼 아군과는 달리 코만 빼꼼 가린 투구를 눌러쓴 적들의 얼굴이 눈에 박혀들었다. 살의와 투쟁심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턱, 하고 숨이 막혀왔다.
“...로!! 좌로!”
다시 한 번 투구 뒷면을 두들기는 손길, 정신을 차리고 급격하게 말머리를 틀었다. 하지만 온몸으로 방향을 틀면서도 시선만큼은 적을 향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극도의 두려움, 단 한 순간이라도 시야에서 놓쳤다가는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은 공포가 온몸을 짓눌렀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반복된 훈련으로 베어버린 일련의 동작들은 그 순간에도 자연스럽게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후욱. 후욱.
잇새로 새어나온 거친 숨결에 투구 안쪽이 불이라도 붙은 듯 달아오른다. 의식이 몽롱해지고 좁은 구멍 사이로 보는 세상이 점차 흐릿해져만 간다.
아...
귀청을 때려대던 말발굽 소리와 2열에서 터져 나온 고함소리가 조금씩 잦아 들어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자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저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과격한 상하운동의 반동뿐이었다.
내가 이동 중에 술을 먹었었나?
몽롱한 와중에 문득 떠오른 의문, 하지만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아니. 근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이유를 떠올려 보려고 해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그때 바로 곁에서 불쑥 튀어나온 물체가 있었다. 삐걱대는 고개를 꺾어 옆을 바라보니, 투구 쓴 사내가 얼굴 가리개를 열고 뭐라고 고함을 친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만 벙긋대는 그 모습이 마치 싸구려 마임이라도 보는 듯했다.
“...!”
다급한 고개짓으로 전방과 이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외쳐대는 사내의 모습이 왠지 우스꽝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뭐라는 거야. 하나도 안 들린다고.
“...! ...!”
얼굴을 일그러트린 사내가 곡예와도 같은 몸짓으로 바짝 붙어 투구를 두들겨 댔다. 그 우악스럽고 다급한 손길이 마치 두개골 안쪽을 때려대는 듯해 온몸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리라고!”
그리고 그 순간, 물속을 유영하듯 생경하기만 했던 침묵이 찢겨져 나가고, 고요했던 세상에 소리가 돌아왔다.
“정신 차려!”
“크, 클라크?”
갑작스럽게 돌아온 현실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얼빠진 음성으로 클라크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열기가 투구 안쪽을 화마(火魔)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 열기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김선혁은 저도 모르게 얼굴 가리개를 젖혀 올리고 말았다.
화악.
갑작스럽게 얼굴을 때려대는 싸늘한 바람에 숨통이 확, 하고 터졌다. 그리고 그제서야 김선혁은 자신이 전장의 한 가운데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멍청아! 바이저(얼굴 가리개) 내려! 곧 1차 사격 간격에 들어간다고!”
다급한 고함소리, 뒤늦게 사스테인 기병단의 존재를 떠올린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아...”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것일까. 짧은 활, 시위에 걸린 살 꼬리의 결마저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이저 내리고, 방패 들어! 자세 낮춰!”
클라크의 지시에 그가 허겁지겁 방패 쥔 손을 들어올렸다.
“한 번! 재수 없으면 두 번! 그것만 견디면 돼!”
바이저를 내린 탓에 먹먹하게 들려오는 고함소리였지만, 그 의미만큼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견뎌! 어떻게든 견뎌! 간격 안에만 들어서면, 적도 활 대신 고삐든 창이든 잡지 않고는 못 베길 거야!”
쇠 장갑으로 제 머리를 거칠게 두들긴 그가 자세를 낮추고 적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한껏 젖혀진 채 묶여있던 적들의 활시위가 핑, 하는 소리와 함께 풀려났다.
“방패 올려!”
클라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제발. 제발. 제발.
방패 뒤에 숨어 김선혁은 적들이 쏘아올린 죽음의 비가 단 한 발도 자신에게 맞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팅. 팅.
방패 표면을 화살이 긁고 지나갈 때마다 마치 제 몸을 긁히는 것 같아 어깨가 절로 움츠려 들었다. 그럴수록 그는 더 방패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버텨냈다.
왜, 안 끝나!
고작 100여명의 기병이 쏘아올린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섭게 떨어져 내리는 화살비속에서 그는 어서 이 끔찍한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방패 내리고 선두 속도 올려!”
그리고 마침내 그 지옥과도 같았던 시간이 끝났을 때, 클라크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혁!”
“네!”
소란스러운 전장에서도 유독 귀를 파고드는 클라크의 음성에 김선혁이 목에 힘을 주고 소리내 대답했다.
“이 돌격이 실패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아, 알고 있어요!”
시간이 갈수록 지치는 것은 몸이 무거운 중갑 기병들 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친 그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사스테인의 악마들의 맛 좋은 먹이감에 불과했다. 온몸을 감싼 갑주와 마갑은 주변을 맴돌며 날려대는 화살로부터 무한정 그 주인을 지켜줄 수 없었다.
“알면서 왜 그러고 있어! 선봉이 꾸물대면 어쩌라는 거야!”
사나운 고함소리에 김선혁이 와락 인상을 찡그리고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는 온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그 한 올 한 올을 잡아 자신의 창끝에 휘감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사납게 버텨대던 바람의 장벽이 어느 순간이 되자 허물어졌고, 창끝에 꿰인 기운이 조금씩 몸을 불려갔다. 그럴수록 내달리는 말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아직 아니야.
첫 공격으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자 적들은 벌써 저만치 달아나 다시 한 번 간격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킬을 써봐야 허공에 창질일 뿐, 기병대 전체를 감싼 속성의 효과마저 잃고 말 것이다.
지금은 강력한 한 자루의 창보다 열 자루의 창이 필요한 순간, 그는 자꾸만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오로지 속도를 올리는 데만 집중했다.
크르르릉.
손목이 끊어지고 어깨가 떨어질 것만 같다. 한계까지 그러모은 속성의 기운이 당장에라도 풀어달라는 듯 낮게 울어대며 난동을 피워댔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김선혁은 끝도 없이 속성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더! 더! 더!
소리 없이 고함지르며 김선혁은 사스테인의 뒤를 쫓았다.
사스테인 기병단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막강한 방어력을 얻는 대가로 기동력을 희생한 적의 중갑 기병대가 이상할 정도로 떨궈지지를 않자 적지 않게 당황한 모양새였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들이 질주 중에 무리하게 허리를 꺾어 활시위를 당긴 것은. 2차 사격으로 적들의 기세를 약화시켜 다시금 전투를 자신들의 페이스로 끌어가겠다는 심산이리라.
하지만 그건 명백한 악수였고, 치명적인 실패였다.
곡예와도 같은 자세로 허리를 꺾은 사스테인 기병단을 보며 김선혁은 크게 외쳤다.
“돌격!”
선봉에게만 내려진 영광된 특권을 그는 마음껏 행사했다. 그의 한마디에 중갑 기병대의 군기가 요동을 치고, 어느 순간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때 중갑 기병대의 ‘진짜’ 돌격이 시작되었다. 황당하게도 그들에게는 아직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
풍아(風牙)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군기에 반응하여 울부짖었다. 미칠 듯 휘몰아치는 바람이 바로 풍아의 분노였고, 퍼덕거리는 그 소리가 포효였다.
“윈드 피어싱.”
팔목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김선혁이 창을 내질렀다. 그 순간 최고조에 이르렀다 생각했던 중갑 기병대의 돌격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쾅!
지축을 울리는 발굽소리와 고함소리를 단 번에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충격파가 전방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피가 솟구치고 살점이 날았다. 말머리와 함께 부서지고 잘려져 나간 인간의 육신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
두려움과 흥분으로 치솟던 아드레날린이 그 순간, 뚝하고 끊겼다. 잠시나마 물고 뜯다 이내 삼켜버렸던 전장이라는 괴물이 제 배만 채우고 자신을 내뱉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내동댕이 쳐진 김선혁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부서진 육신이 사방에 가득하다. 예전에는 살아 움직였을 인간들이 붉은 진창에 몸 누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부릅뜬 눈으로 죽은 사자(死者)와 운 없게 즉사하지 않은 생존자들의 비명소리가 귀청을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으어. 사, 살려줘!
하지만 그 소리는 광폭하게 짓밟는 말발굽 소리에 이내 먹혀버리고 말았다.
“아...”
피냄새에 흥분해 멋대로 내달리는 스텔라 위에서 김선혁은 넋을 잃었다.
“추격해! 이대로 마무리까지 간다!”
누군가의 고함소리, 아슬아슬하게 폭발의 범위를 빗겨간 사스테인 기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상처 입고 피투성이가 된 그들의 붉게 물든 뒷모습에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내, 내가...
살인의 충격에 그가 절망하는데, 갑작스러운 충격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여기서부터는 우리에게 맡겨!”
가리개 들어올린 클라크의 표정이 승기를 잡았다는 기쁨보다는 우려가 더욱 컸다.
“빠져! 신병이 그 정도 했으면 할만큼 다 한 거야!”
“새끼야! 너 아니었으면 우리가 죽었다. 네가 우리 중대를 살린 거라고!”
쾅, 쾅!
연달아 뒤통수를 후려치고 가는 우악스러운 손길.
“고맙다! 그리고 네가 자랑스럽다!”
투기 가득한 얼굴이지만, 그 너머에 어른거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그들은 지금 분명 안도하고 있었다.
전장에 누운 것이 자신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이 거친 사내들조차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죽이지 않았으면 우리가 죽었어!”
상투적이고 식상한 말,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선혁은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것이 간략해지는 것을 느꼈다.
약육강식.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고 앞으로 자신이 지켜나가야 할 율법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얼굴로 전장에 우두커니 멈춰선 채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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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겼다!”
“우리가 사스테인 놈들을 꺾었다고!”
전투는 승리했다. 꼬리를 잡힌 사스테인 기병대는 차라리 정면승부를 벌이느니 못한 결과를 자초했고, 끝내는 전멸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아덴버그 왕국과 녹테인 왕국의 전사(戰史)에 길이 남겨질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 모든 승리의 주역이 바로 김선혁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이 순간 어쩌면 왕국에게 진 빚이 전부 탕감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손으로 거두어들인 십수명의 생명만이 머리에 남았던 것이다.
말없이 말에 오른 채 승리를 외치는 중갑 기병대를 멍하니 바라보던 김선혁은 스르륵 무너지듯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곧장 허리를 숙이고 토악질을 시작했다.
“우웩!”
아무리 게워내도 비워지질 않는 속이 오물이라도 집어삼킨 것 같아 그는 끊임없이 토악질을 해댔다.
[반려여. 그대는 아직도 너무나 나약하구나.]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릿속으로 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벤트 딱지 전부 발송했으니, 전에 댓글 이벤트 당첨되신 독자분들은 선물함 확인 부탁드립니다.
*서평 달아주신 오덕군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ㅜㅜ 서평에 써주신 점 명심하면서 앞으로도 완결까지 열심히 쓰겠습니다.
[두 개의 서평이 시너지를 일으켜 조만간 연참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기가 언제일지 모른다는 게 문제일 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