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 선봉의 의미 -->
‘진짜로 합니까?’
애송이의 질문은 마치 자신을 따라올 수 있겠냐고 묻는 듯했다. 그래서 그 질문을 들었을 때 클라크는 어이없는 얼굴로 웃고 말았다.
제깟 놈이 힘을 숨기고 있어 봤자지.
잘난 기사들과 함께 전장을 내달린 적도 있었고, 상급 기사의 인도를 받아 적진으로 뛰어들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을 따라가기 벅차다 느낀 적은 없었다. 최소한 말 위에서만큼은 자신들이 최고였다.
그런데 그 생각이 틀리고 말았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이방인은 기마 돌격하는 기사들처럼 무조건적인 파괴에 매몰되어 속도를 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내달리는 것만이 미덕인 경기병들의 그것처럼 가볍지도 않았다.
빠르면서도 무게를 잃지 않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중갑 기병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만약 그게 다였다면 클라크의 자부심이 그리 처참하게 박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병의 돌격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신병과 후열의 기병대원들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려고 했다.
뭐가 저렇게 빨라.
진즉에 최고조에 이르렀음에도 한계를 모르고 더욱 더 속도를 높여가는 이방인의 모습에 입이 쩍 벌어졌다.
과부 제조기가 이 정도로 명마였던가?
스스로의 의문에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무리 발 빠른 준마라고 해도 무거운 마갑과 중무장한 기병을 태우고 저리 달릴 수는 없었다. 이방인의 돌격은 분명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리야!”
클라크는 이를 악물고 말 허리를 걷어찼다. 이대로 가다가는 2열부터가 선두에서 떨어져 나가는 추태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는 그런 치욕적인 역사가 자신들의 기병대의 이름 앞에 놓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건 다른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두가 필사적으로 말을 내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빌어먹을.
클라크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들은 저 괴물 같은 신병의 뒤를 따라잡을 수 없다. 이대로 무리하게 속도를 유지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차징은커녕 대열이 엉켜 기병대 전체가 치명적인 피해를 보는 수가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 그런데 막 수신호를 보내려던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어?”
전방에서 가해져오던 무지막지한 압력이 갑작스레 느슨해진다 싶더니, 가슴을 밀어 젖히던 바람마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했던 애마의 속도가 더욱 더 빨라졌다.
클라크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창을 고쳐 잡은 신병 너머의 세상이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쪼개고 찢어버린 것이다.
신병은 지금 이 순간 바람을 막는 방패였고, 적진을 꿰뚫는 거대한 창 그 자체였다.
“이런 미친!”
비명과도 같은 한마디가 잇새로 새어나오고 마는데, 그 순간 그 거대한 창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
“워. 워. 옳지. 착하다.”
돌격의 여운이 남았는지 거칠게 투레질을 하는 스텔라를 진정시킨 김선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창이 훑고 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훈련을 위해 급조한 임시 허수아비들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단단한 대지는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할퀴고 간 것처럼 흉물스러운 선이 그어져 있었다. 바로 용기병 고유의 스킬, 윈드 피어싱(Wind Piercing)이 남긴 흔적이었다.
“너...”
가만히 그 흔적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다가온 클라크가 말을 걸어왔다.
“이게 지금...”
투구 너머로 들려오는 탁한 소리에 담긴 감정은 모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경악만큼은 그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최선을 다 하라며요.”
용기병이라는 이상한 병과로 전직한 뒤 처음으로 타인에게 스스로의 능력을 공개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뿌듯함이 피어올랐다.
**
그날의 훈련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클라크는 기병대원들을 이끌고 국경 인근에 위치한 마을에 들어섰다. 평소라면 오랜만의 외박이라며 잔뜩 들떠 떠들어댔을 사내들이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아이고. 귀하신 분들께서 어쩐 일로...”
그 음울한 분위기에 겁먹은 마을의 촌장이 달려와 안쓰러울 정도로 굽실거렸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이방인이 보인 능력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크으. 이게 얼마만의 술이냐.”
그중에서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것은 오직 신병뿐이었다. 하지만 이 거친 사내들은 고민을 속에 담아두고 오래 앓는 법이 없었다. 촌장이 마련해준 자리는 빈궁한 마을이 다 그러하듯 술도 싸구려고 음식도 궁색하기만 했지만, 굳어버린 분위기를 풀기에는 충분했다.
“너, 인마!”
벌컥벌컥 병째로 술을 들이부은 한센이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며 일어났다.
“네?”
“대체 너 정체가 뭐냐? 이방인들은 다 그래? 원래?”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탓에 농담으로라도 말주변이 있다 말하지 못할 한센의 질문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복잡하기만 한 기병대원들의 심정을 잘 표현해줄 수 있었다.
“인마.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말을 탔다고 해도 뻥이 아니야. 근데 넌 대체 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한센의 모습에서 상대적 박탈감과 허무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너무나도 쉽게 성장하고 강해지는 이방인들에 대한 반감 역시 담겨 있는 한마디였다.
“선봉이라는 건 가장 위험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가장 영광된 자리이기도 해.”
말주변 없는 한센을 대신해 요나슨이 나섰다.
“제일 앞에서 기병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적에게 창을 내지른다는 건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지.”
가장 위험하기에 가장 가치 있다 여기는 거친 사내들만의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부심이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신병의 돌격은 기병의 상식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 앞에서 자신들이 중요하다 여기던 그 모든 게 무의미해진 것이다.
목숨을 건 돌격? 웃기지 말라 그래. 저런 무식한 힘 앞에선 강도 높은 훈련도, 엄정한 군기도 전부 개소리야.
모두의 마음이었다. 그건 굳이 이방인에게만 한정되는 반감이 아니었다. 그들이 초인이라 부르는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온갖 강자들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거부감이었다.
“그 단 하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평생을 훈련해왔어. 그런데 넌, 널 보고 있자면, 우리가 해왔던 모든 노력이 전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처럼..."
“아, 진짜 듣자듣자 하니까.”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신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군 시밤. 여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보여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나한테 와서 지랄들이야!”
처음으로 보이는 신병의 감정적인 모습, 기병대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태어나서부터 말 타고 훈련했어? 까는 소리 하고 있네. 누구는 이 능력 거저 얻었어? 엉덩이에 피딱지가 굳고 벗겨진 손바닥은 물집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고. 니들이 잘 때도 미친놈처럼 말에 매달려서 살았다고!”
시뻘개진 얼굴로 이리지러지 삿대질을 하는 이방인의 모습에서 억울함이 느껴졌다.
“고작 그 정도로...”
“까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 니들은 한 번이라도 내 생각 해봤어? 내가 왜 여기 끌려와서 이 거지 같은 짓을 해야 하는지. 내가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뭘 하던 놈인지 한 번이라도 물어봤냐고오오오!”
처음으로 듣는 저쪽 세상의 이야기에 인상 쓰고 끼어들었던 기병대원이 입을 다물었다.
“노력? 노오오력? 좋지. 누군 안 해봤어? 근데 내가 태어나서 평생을 노력했던 건, 니들 세상에서는 하등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네? 다 잃고 새로 시작하는 그 기분 니들이 알기나 해?”
한 번도 헤아리지 못했다. 이방인들도 이쪽 세상으로 넘어오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운 좋게 스킬과 전직이라는 능력을 얻어 쉽게 쉽게 사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 꺼지라고 해. 이딴 능력 그렇게 좋아 보이면 니들이 가져가. 그리고 날 그만 좀 내버려두라고.”
“음...”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던 이방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저 새끼, 취했었네.”
그리고 끝내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고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신병을 보며 요나슨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취한 놈 붙들고 뭔 소리를 한 건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요나슨의 얼굴이 복잡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날이 서 있던 눈빛은 누그러져 있었고, 태생적인 반감과 상대적인 박탈감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시바아아아암!”
그런데 그때 갑자기 완전히 곯아떨어진 줄 알았던 신병이 다시 벌떡 일어났다.
“다 덤벼. 내가 시밤. 대한민국 병장이라고!”
“으억!”
갑작스러운 돌발 사태에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한 사이, 신병의 주먹이 바로 곁에 있던 요나슨을 강타했다.
“오늘 다 같이 죽어보자!”
그렇게 외치는 신병의 눈이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
“으으...”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통증에 김선혁은 신음을 내뱉었다. 질 좋은 저쪽 세상의 술만 먹다가 조잡하고 독하기만 한 이곳의 술을 먹었더니 숙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억!”
하지만 숙취에 끙끙댈 여유가 없었다. 뒤늦게 전날의 기억이 떠오른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술에 취해 고래고래 악을 쓴 것 같은데, 그 뒤의 기억이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그게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었다.
“너, 이 새끼...”
그때 요나슨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 멀끔하던 사내의 얼굴이 푸르고 빨갛게 물들어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어, 얼굴이...”
“너 다시는 술 먹지 마라.”
**
“죄송합니다.”
요나슨에게 전날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 들은 김선혁은 곧장 클라크와 기병대원들이 모인 홀로 나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단풍이라도 내린 듯 붉고 푸르고 노란 대원들의 모습을 보니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뭐해? 어제 그렇게 퍼마셨으면, 속 풀어야지.”
그런데 그를 보는 기병대원들의 눈빛이 생각과는 달리 그리 사납지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죄인처럼 주춤거리고 다가가 테이블에 앉으니 클라크가 피식 웃어보였다.
“너, 주사 있더라?”
“죄송합니다.”
유달리 심하게 부어오른 클라크의 얼굴을 차마 쳐다 볼 수가 없어 다시 사과하니, 클라크가 손을 휘저었다.
“사내들끼리 술 먹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의외로 이 거친 사내들은 전날의 난동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김선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한센이 어깨동무를 하며 친한 척을 해왔다.
“인마. 힘들면 앞으로 형한테 말해라.”
그렇게 말하는 한센의 앞니가 팔푼이처럼 빠져 있었다.
**
“잘 먹고 갑니다.”
촌장은 유달리 김선혁을 어려워했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전날의 난동에서 가장 미친개처럼 날뛰어대던 게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건 어제 제가 좀 술에 취해서, 뭘 좀 부쉈는데...”
“아이고!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사내들이 술 먹다 보면 그럴 수도 있습죠. 뭘 또 이리...”
수십의 거한들이 달려들어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두들겨 맞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도무지 눈앞에서 공손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를 허투루 대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어제 있었던 일을 어디 가서 말하지 말도록.’
게다가 보상이라면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사내에게 넘치도록 받았다. 사내는 전날의 패싸움(촌장의 눈에서는 일방적인 구타)에 대해 함구해줄 것을 부탁했고, 촌장은 당연히 그러마 하고 대답했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리 용맹한 분들께서 국경을 지켜주신다니 오히려 마음이 든든할 지경입니다요.”
손사래를 치는 촌장을 보며 김선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호라. 이쪽 세상은 술 먹고 한 실수에 굉장히 관대한 모양이군.
멋대로 결론을 내린 그가 촌장을 일별하고는 도로 기병대의 숙소로 돌아왔다.
“선봉은 앞으로도 너다. 선혁.”
클라크의 선언에 김선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작품 후기 ==========
*다음편부터 전개속도 쭈우욱 올라갑니다. 다음 챕터는 '최강의 기병대'입니다. 많은 기대와 성원 부탁드립니다.
*서평 이벤트도 잊지 말아주세용. 아무도 참여 안 하면 글쟁이 수치사.ㅜㅜ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