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 선봉의 의미 -->
24연대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 있기는 하지만 보병대는 정작 아군 기병들의 전투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몸값 비싸고 도도한 기병이란 족속들은 대체로 본진의 좌우를 지키고 있다가 느지막이 전투에 끼어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때쯤이면 보병들은 이미 적들과 뒤엉켜 싸우느라 아군 기병이 돌격을 하는지 단체로 춤을 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쩌다 볼 수 있다고 해봐야 그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드는 적의 기병대뿐, 보병들은 기병대와 전장에서 맞닥뜨리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그런 그들에게 목숨의 위협 없이 기병대의 돌격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당연히 보병들은 이 희귀한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날마다 중갑기병대의 훈련장을 찾았다.
“와. 이렇게 보니 왜 기병 놈들이 그렇게 건방을 떨었는지 이해가 가긴 가네.”
“저거 막는 애들은 진짜 죽을 맛이겠구만.”
그렇게 지켜본 기병대의 돌격 훈련은 왜 기병대야말로 전장의 꽃이라 불리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만큼 기병대의 돌격은 웅장했고 박력이 있었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요즘 저렇게 열을 올리는 거야? 출동이라도 있데?”
다만 의문이 있었다면 평소 이런저런 이유로 그다지 훈련을 해오지 않았던 중갑 기병대가 왜 갑자기 저리 법석을 떠는지 알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달려!”
주변에 잔뜩 몰려든 구경꾼들이 있었지만 기병대원들 중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선두 선회!”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과격해진 훈련은 아무리 베테랑이라고 해도 까딱 잘못하면 목뼈가 부러지고 사지가 절단 나는 살벌한 것이었다.
망할. 이게 아닌데.
그렇게 내달리는 기병대원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것은 후회였다. 단순히 신병을 길들이기 위해 시작한 훈련이 어느 순간 무섭게 따라붙는 신병의 모습에 과열이 되었고, 지금은 그들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누군가 멈추라 말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 같았지만 자존심 강한 기병들은 차마 해맑게 웃으며 ‘오늘도 달려보죠!’라고 외치는 신병의 말에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지경이 되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훈련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뒤에서 바짝 따라붙는 신병에게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 선두가 더욱 속도를 올렸고, 후열은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해 말을 달렸다.
그 중심에는 신병, 김선혁이 있었다.
지독한 놈.
투구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기병대원들은 느낄 수 있었다. 저 빌어먹을 신병이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더 강하게!’를 외치며 웃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열 유지한 채로 속도 낮춰 속보!”
클라크 조장의 말에 기병들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에서 단내가 올라오고 손발이 후들거릴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정지. 하마하고 개인 정비! 각자 말부터 챙겨.”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 말이라면 끔찍이 여기는 기병들은 내리자마자 제 몸보다 말의 상태를 확인했다. 분주하게 말의 편자며 등자 아래를 확인하는 기병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선 중갑 기병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클라크가 얼굴 가리개 아래서 인상을 찌푸렸다.
말 위에서와는 달리 말에서 내리니 제 말의 상태도 제대로 돌볼 줄 모르는 것이 영락없는 신병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신병만이 유일하게 이 안에서 아직 더 달릴 여력이 있어 보였다.
클라크가 고민하는 점도 바로 그점이었다. 처음에는 신병의 기를 죽일 겸 시작한 훈련이고 나중에 가서는 어설픈 돌격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그 훈련을 이어갔다. 그랬던 것이 어느 순간이 되자 자신들이 도리어 신병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걸음마를 배웠을 무렵부터 말에 오르기 시작한 자신들이다. 비록 가문의 뜻대로 기사가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했으나 말 위에서만큼은 꿇리지 않도록 누구보다 노력을 해왔다. 그런 자신들을 얼마 전까지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던 초짜가 추월한 것이다.
박탈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 하지만 클라크는 이내 고개를 저어 찝찝한 감정을 털어냈다.
우리가 말에 미쳤다면, 저 이방인은 훈련에 미친놈이다. 그 경력이 짧다 하여 무시하기에는 이방인이 보인 열정과 집중력이 너무 무지막지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다른 기병들도 일그러진 표정을 차마 보여주지 못하고 투구 속에서 씩씩대며 더운 숨만 뱉고 있는 것이리라.
"저 놈을 어쩐다."
클라크는 고민했다. 명목상 3조의 조장을 맡고 있지만, 1조와 2조의 조장은 실전 경험이 별로 없는 견습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기병대를 이끄는데 있지 않았고, 프레드릭을 도와 혹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적 기사들을 요격하는 데 있었다. 사실상 클라크가 기병 중대를 이끄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이니만큼 이방인에 대해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어중간하게 훈련을 이어갔다가는 박탈감이 미움이 되고 증오가 되어 저 호방한 사내들을 좀먹고 말 것이다. 이방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대원들을 위해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날 훈련이 끝나고 클라크는 따로 김선혁을 불러냈다.
“무슨 일입니까?”
역시나 언제나처럼 개인 훈련을 따로 할 생각이었는지, 자신을 붙잡은 조장이 못마땅해 인상을 쓴 신병을 보며 클라크는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내일 훈련에서 온 힘을 다 해라.”
“네?”
갑작스러운 말에 김선혁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처럼 숨기지 말고 전력을 다 해보라고.”
뒤늦게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바짝 굳은 얼굴, 하지만 이내 그 얼굴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진짜로 합니까?"
클라크는 어이가 없어 차라리 웃고 말았다.
"진짜로 합니다?"
그런 그를 보며 신병이 다시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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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오랜만에 나오니 좋구만!”
한껏 들뜬 한센의 말에 다른 기병대원들이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쳐댔다.
“이야. 조장. 그 깐깐한 중대장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군인이 훈련한다는데 뭐 이유 있나. 그냥 애들이 한창 불 붙었으니 지금 제대로 안 풀어주면 사고 칠지도 모른다고 했지.”
거칠고 자존심 강한 기병들이기에 가능한 핑계였다.
“적당히들 해. 놀러 나온 거 아니야. 오늘 제대로 해보자고 나온 거니까.”
“그래도 훈련 끝나고 나면 근처에 마을 정도는 들릴 수 있잖아. 어차피 복귀는 내일까지 아니야?”
“그건 네놈들 하는 거 봐서. 굼뱅이처럼 꾸물거리면 곧장 주둔지로 복귀할 테니 그리 알도록.”
그 말에 기병대원들이 가슴을 두들기며 과장스럽게 군례를 취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유독 김선혁만이 그 즐거운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갑작스레 자신을 불러냈던 클라크가 한 말이 내내 머리에 남았던 탓이다.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 건지, 나는 이방인이 아니라서 잘 몰라.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지. 지금의 네놈처럼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는 놈들은 전장에서 얼마나 어이없게 죽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클라크의 말은 차라리 악담에 가까웠다.
‘그리고 네놈이 얼마나 먼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중대장이 출세를 위해 얼마나 안달이 나 있는지 전부 관심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저 싸우고 이기고 살아남는 것뿐이야.’
하지만 악담이라고 하기에는 그 어투가 너무도 덤덤하고 조곤조곤했다.
‘그러니 머리 굴리지 마라. 만약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탁해. 능력을 숨기고 싶은 것이라면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야. 나와 우리 대원들이 중대장의 눈을 가려주마.’
사실 필사적으로까지 힘을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왕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고 그로 인해 가중될 빚이 꺼려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능력을 숨기고 있었더니, 그게 도리어 가슴 뜨거운 사내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친 기병대의 조장은 제 꿍꿍이를 숨긴 놈과는 함께 달릴 수 없다며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전원 돌격 준비. 대형은 웻지(Wedge-쐐기꼴).”
기병이 달리기에 적당한 곳에 도달하자 클라크가 지시를 내렸다. 기병대원들은 능숙하게 대열을 맞추고 창과 방패를 움켜잡았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게 있었다.
“선봉은 김선혁이 맡는다.”
클라크가 선봉을 김선혁에게 맡긴 것이다.
“조장!”
“에이. 농담이지?”
“신병이 무슨 선봉이야!”
기겁을 하고 난리를 피워대는 기병 대원들을 보며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껏 휘저어보라고 하더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확실히 선봉이라면 다른 기병들을 신경 쓸 필요 없이 온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열의 선두로 말을 몰았다.
“너, 미쳤어? 니깟 놈이 뭐라고 선봉에 서!”
“뒤로 안 빠져? 어디 신병 새끼가 여기까지 기어나와!”
근래 들어 제법 동료 대우를 해주던 사내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어깨를 잡아챘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전부 뿌리치고는 대열의 앞에 섰다.
“선봉은 김선혁. 그리고 한센과 요나슨 내가 곁과 뒤를 맡는다. 나머지는 평소대로 뒤를 받치도록.”
“조장! 선봉에서 어리버리 치면 뒤에 다 엉키는 거 몰라? 아무리 훈련이라지만 죽을 수도 있다고!”
“번복은 없다. 더 이상의 의견은 항명이라 생각하겠다.”
서슬 퍼런 클라크의 경고에 기병대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분노와 불만은 그대로였다. 김선혁은 그렇게 모인 기병대원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등 뒤로 느낄 수 있었다.
끄응. 이거 영 불편하구만.
적이 아니라 자신의 뒤통수를 후벼팔 듯 찔러오는 험악한 기세에 그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들의 분노가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기병에게 대열의 선봉이란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기병들에게 허락되는 자리, 기병대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신병에게 양보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봐야 네놈은 끝까지 어정쩡한 위치에 남게 될 뿐이다. 동료로 인정받을 수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외인이 될 수도 없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실력으로 찍어 눌러서 다른 놈들이 찍 소리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라.'
클라크의 말이 떠올라 절로 어깨가 무거워졌다.
“엄청 부담 주네.”
농담이 아니라 자신의 뒤만 보고 달려올 기병들의 투기는 무지막지한 부담이었다. 실전도 아닌데 앞에서 거치적거리면 바로 짓밟고 갈 거라는 의지가 그대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는 서서히 말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등뒤로 따라붙는 수십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그는 탁 트인 시야를 보았다. 대열의 후미에서 늘상 보아왔던 갑갑한 광경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 그는 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이야!”
김선혁은 말허리를 걷어차며 자세를 더욱 낮추었다. 스텔라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힘차게 대지를 박차고 어느새 주변의 풍경이 흐릿해지고 만다.
선봉이 이렇게 기분 좋은 자리라면. 포기할 수가 없잖아.
끝까지 남아있던 망설임이 그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온전히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럼 소원대로.”
전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모두 그의 기운이 되었고, 소용돌이치는 속성의 힘이 창끝에 엉겨 붙었다.
“제대로 날뛰어주지.”
스텔라의 속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김선혁이 낮게 속삭였다.
“윈드 피어싱(Wind Piercing).”
눈부신 섬광이 창끝에서 피어오르고 이내 소용돌이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피어오른 광폭한 기운이 그와 스텔라를 집어삼켰다.
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창이 되었다.
이제껏 숨겨져 있었던 용기병만의 무지막지한 돌진력이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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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말고 신랄한 비판이라고 해도, 그 어느 것이든 곱씹어 읽고 소중하게 머릿속에 담아 더욱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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