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3화 (13/305)

<-- 08. 성장 -->

마법이 폭주했다. 원래대로라면 쓰러진 목책을 일으켜 세우고 단단하게 고정시켰어야 할 마법이 갑작스레 끼어든 이질적인 기운에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어디서 뭐가 어떻게 엉켰는지 통제 불능이 되어 마구 날뛰어대는 마력(魔力)을 보며 이은서는 이를 악물었다.

“오오!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구만!”

유형화된 마력이 이곳저곳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을 본 병사들이 상황의 심각성도 모르고 환성을 내질렀다.

멍청이들아. 죽는다고.

왕실 마법사단의 위용을 과시한답시고 일을 키운 게 도리어 화근이 되었다. 최대한도로 범위를 넓힌 마법은 그만큼 많은 마력을 담고 있었고,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몰려든 구경꾼들 전체를 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손이 덜덜 떨려왔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두려웠던 것은 오점 하나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온 자신의 커리어에 남을 커다란 얼룩도, 마법의 실패로 인한 시기심 강한 동료들의 비웃음도 아니었다.

폭주하는 마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수많은 병사들, 그 생명의 무거움이 그녀를 짓눌렀다.

어쩌면 자신의 실수로 일어날지도 모를 참사를 코앞에 두고 침착함을 유지하기에는 그녀는 경험이 너무도 일천했다.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생을 살아오던 보통의 사람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지금의 시련은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무자비했다.

언젠가 서게 될 전장에 대한 야무진 각오도, 차기 수석 마법사의 긍지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평범했던 과거의 자신으로 회귀하였고, 곧 닥쳐올 끔찍한 결과에 겁을 먹고는 움츠러들고 말았다.

필사적인 통제에 억눌려 있던 마력이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방을 물어뜯는 마력에 휘말린 병사들의 떼죽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넓게 퍼져 금방이라도 이를 드러낼 것처럼 으르렁대던 마력이, 어느 순간 고삐라도 잡힌 것처럼 한데 모여 엉뚱한 곳을 향해 내쏘아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

주둔지의 목책을 우르르 무너트리고도 여력이 남은 마력이 저 멀리 평원을 향해 치닫다가 어느 순간 폭발했다.

“아아...”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은서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댔다. 만약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24연대의 연대장이 부축을 해주지 않았다면 많은 병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추태를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마, 마력이...”

“전장을 나서는 병사들에게 마법사는 패색 짙은 전장에서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요 구원자요. 이은서 경의 약한 모습은 차후 마법사들에 대한 병사들의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오.”

그러니 사정 설명은 나중에, 라고 낮게 속삭인 연대장이 프레드릭에게 눈짓을 주었다. 이 눈치 빠른 중대장은 금세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마법사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마법을 시연해 보이셨다! 저 무적의 철퇴가 바로 아군의 힘이다!”

그렇지 않아도 목책을 보수한다더니 도리어 박살을 내는 행동에 의아해 하고 있던 병사들이 뒤늦게 환호했다.

**

“와아! 마법사님 만세!”

“아덴버그 마법사단 만세!”

모두가 환호할 때 김선혁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프레드릭 중대장의 선동과는 다르게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의도치 않은 사고였음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그야말로 이 사고의 원흉이었으니까.

멀쩡하게 구현되려던 마법이 자신의 기운과 엉켜붙어 폭주헀을 때는 정말로 아찔했다. 그대로 두었다간 수백의 생명이 스러지는 참사가 벌어질 판국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지난 태풍에서 풍아를 사용했던 것처럼 기운을 한데 모아 방향을 틀어냈다. 이은서가 꼭 붙잡고 있던 마력에 대한 통제를 어느 순간 완전히 풀어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속성에 대한 지배력이 한 층 강화되었습니다.]

[속성 지배력이 40에서 50으로 상승했습니다.]

[기존 속성의 특수 효과가 소폭 상승하고 마법에 대한 강력한 내성을 얻었습니다.]

끔찍한 두통과 탈력감에 털썩 주저앉은 그의 귓가로 예의 그 메시지가 들려왔다.

“아씨. 용기병 살 떨려서 못 해먹겠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정말로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

며칠이 지나고 이은서는 보란 듯이 목책을 고쳐냈다. 그녀 스스로도 이번 일을 통해 충격을 받았는지 주둔지에 머무는 내내 막사에서 두문불출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마법의 폭주에 대한 원인을 찾겠다고 나설까봐 전전긍긍했던 김선혁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조용히 주둔지를 떠났다.

“아자!”

미안한 감정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후련함이 컸다. 왠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았지만, 일단 지금 만큼은 그녀가 주둔지를 떠났다는 소식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미친놈.”

갑작스레 환호하는 그를 보며 기병대원들이 머리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려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은서의 존재 탓에 미루어 두었던 속성 효과를 확인해볼 생각에 마음이 온통 쏠렸던 탓이다.

김선혁은 곧장 연병장으로 달려갔다. 마법의 도움을 받아 목책을 완전히 복구하기는 했지만 사람 손이 아예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병사들이 죄 작업에 동원되어 연병장 자체는 한적하기만 했다.

그곳에서 김선혁은 닥치는 대로 무기를 잡고 휘둘렀다. 이제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교본을 따라 흐르는 창의 궤적, 그런데 그 선을 따라 기이한 소음이 새어나왔다.

카르르르.

얼핏 들으면 목 졸린 짐승이 신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얼핏 듣기에는 성난 야수가 으르렁대는 것과도 같은 소리가 내내 창을 따라다녔다.

쑤욱.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수아비를 향해 창을 질러보았다. 그랬더니 억세게 버텨대던 허수아비가 너무도 쉽게 관통되는 것이 아닌가.

‘임의로 무기에 속성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날붙이의 절삭력이 약간 상승합니다.’

전날 들었던 메시지를 떠올린 그가 환하게 웃었다.

“이게 약간이라고?”

훈련용으로 만들어둔 터라 질기고 억세기만 한 허수아비를 단숨에 꿰뚫는 위력에 신바람이 난 그가 창과 칼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쐐에에엑.

그야말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빛이 번뜩이는 신들린 듯한 움직임, 그 대가는 무지막지한 체력 소모였다. 하루 종일 제 몸을 혹사 시키고도 거뜬히 버텨내던 그가 잠깐의 움직임만으로 완전히 나가떨어진 것이다.

“허억. 허억.”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그가 아예 벌러덩 바닥에 누웠다. 지친 몸은 손가닥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의 피로를 호소했지만 정작 그는 웃고 있었다.

“마검사(魔劍士)가 상급이었던가?”

특별한 기운을 빌려 검에 씌우는 마검사 병과가 당당히 상급을 받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런 마검사의 스킬과 지금 자신의 속성 효과가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병과를 상대로 스스로의 힘을 가늠하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었지만, 그만큼 속성의 효과는 미완임에도 더없이 날카롭고 위력적이었다.

“다 꺼지라고 해.”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가 다시 한 번 창을 주워들고는 허수아비를 노려보았다.

쾅!

태풍이 불었던 그날 보았던 풍아의 진정한 위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위력,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허수아비는 흔적도 없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

“잘 해라! 신병!”

“이번에 성공하면 다시는 무시하지 않으마!”

시장통이라도 된 것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 김선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개의 눈동자를 보며 구시렁거렸다.

“아, 가라고요! 좀! 애, 흥분하잖아요!”

사람들이 몰려들자 점점 숨을 거칠게 내뱉는 스텔라를 두둔하는 모양새가 벌써부터 이 성질 사나운 전마를 길들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근데 이걸 어쩌나. 아가씨는 점점 달아오르는 데 조금 있으면 남자가 허리가 아작 나게 생겨서.”

제 딴에는 제법 괜찮은 농담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낄낄대는 한센의 모습이 얄밉기만 했다. 아니, 얄미운 건 기병대원들 전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 김선혁이 스텔라에 승마를 시도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구경 나온 그들은 이제 돈까지 걸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그의 성공을 기원하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9배라는 압도적인 배당은 당연하게도 실패하는 쪽에 건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과부 제조기의 악명은 높았고, 말 못 타는 신입 기병의 어리버리함은 유명했다.

“아, 정신없어.”

아무리 가라고 손짓을 해도 가지를 않으니, 결국 포기한 김선혁은 스텔라의 앞에 섰다. 눈을 부라리고 서서 예의 그 의식과도 같은 말들을 중얼거렸다.

“내가 네 주인이다. 내가 네 주인이다.”

“저 새끼는 말 길들이라니까 아주 최면을 걸고 앉았네.”

주변에서 비웃거나 말거나 그는 오직 스텔라만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 이를 딱딱 거리던 이 순백의 전마는 비교적 얌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모습에 속을 뻔 한 게 벌써 일곱 번이다. 섣부르게 올라타려다 걷어차일 뻔 한 게 세 번, 튼튼한 건치에 팔뚝을 물린 게 두 번이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무식한 몸통 박치기에 이 세상을 하직할 뻔 한 게 한 번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만큼 김선혁은 신중했다. 내뱉은 말에 의지가 실리고 마침내 언령이 되어 스텔라에게 닿기를 기도하며 그는 스텔라를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 뒤에 아른거리던 미세한 반항기가 조금씩 희미해져간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더 흘렀지만, 여전히 보이는 변화는 미미하기만 하다. 여느 전마들처럼 무릎을 꿇는다거나 복종의 자세를 취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모두에게 까칠하지만 나에게만 특별한 미인은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지 않은가. 김선혁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염(念)을 보냈다.

푸르릉.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텔라가 먼저 움직였다.

“피해!”

“도, 도망쳣!”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앞발을 들어올린 스텔라의 사나운 몸짓에 기병대원들이 기겁을 했다. 개중에 김선혁과 나름 그가 과부 제조기와 연을 맺는 데 책임이 있다 생각했던 한센과 요나슨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들기 까지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펄쩍 발을 들어 올린 스텔라가 슬며시 몸을 틀어 제 등을 보인 것이다.

“설마?”

이제껏 있어왔던 무수한 도전과 실패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은 단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기병대원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김선혁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오늘을 위해 몇날 며칠이나 연습해온 안장의 장착, 그가 부드럽게 순백의 전마 위에 안장을 실고 고삐를 씌웠다. 생소한 안장의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스텔라가 투레질을 했지만, 평소처럼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다.

“헉!”

그때 김선혁이 날아오르듯 안장 위로 올라탔다. 기병대원들이 헛숨을 들이키며 입을 쩍 벌렸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성공, 심지어 그의 성공 쪽에 돈을 걸었던 소수의 기병들마저도 얼 빠진 얼굴을 해보였다.

“누가 이런 이쁜 놈을 과부 제조기라는 험악한 이름으로 불러.”

그렇게 얼 빠진 기병대원들의 앞을 보란 듯이 활보하는 김선혁의 콧대가 한껏 높아져 있었다.

“넌 앞으로 스노우 화이트다. 좋지?”

한껏 들뜬 그의 말에 뒤늦게 정신 차린 기병대원 하나가 무심코 말했다.

“완전 구려...”

아무래도 신입 기병대원은 억센 말을 길들이고 올라탈 정도로 배짱이 있었지만, 작명에 대한 감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게. 완전 구리다.”

“스노우 화이트가 뭐냐. 부르기도 힘들게. 멀쩡한 이름 두고.”

“와. 진짜 얼굴 화끈 거린다.”

떨떠름한 얼굴로나마 기병대원들은 그의 성공에 축하의 말을 해주었다. 비록 거칠고 투박한 말투 어디에도 축하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얏호! 배당이 얼마냐! 신병 고맙다!”

뒤늦게 달아오르는 분위기, 거친 사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법석을 떠는데 그 사이로 억, 하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한센이 병신 같이 말에 채였어!”

“우우. 채여도 하필이면 또 거기에!”

무모하게 김선혁에게 다가서던 기병대원 하나가 좋지 못한 곳을 발로 채여, 과부 제조기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빼면 완벽하게 평온한 하루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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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분들의 소중한 피드백은 모두 확인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글이 되는 밑거름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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