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1화 (11/305)

<-- 07. 출세의 롤모델 -->

“환영식에 참석할 수 있게, 미리 준비하고 있도록.”

“네?”

막사에서 쉬고 있다가 중대장의 난데없는 호출에 불려왔더니,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했다.

“꼭, 두 번 말하게 하는군. 오늘 저녁에 이은서 경의 주둔지 방문 환영회가 있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아니. 참가하는 건 너 하나뿐이다.”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환영식에 참석하는 주둔지의 이방인은 자신 혼자였다. 김선혁은 그에 대한 의문보다 먼저 낮에 보았던 마법사의 말간 눈이 떠올렸다. 그게 못내 께름칙하기만 했다.

“복장은 기병대 정복으로 준비하고, 인근 요새의 높으신 분들도 시간 맞춰서 당도하신다고 하니 행여 심기가 상하지 않도록 각별히...”

“그거 꼭 참석해야 하는 겁니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대뜸 물어오는 김선혁의 태도가 당돌했는지, 프레드릭 중대장이 일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황당함은 금세 분노가 되었고 이내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고는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금 명령에 불복종하겠다는 건가?”

척 보기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듯한 중대장의 모습에 김선혁은 순간 갈등했다.

귀찮은 일이라면 귀신같이 먼저 알고 피해내는 말년 병장의 감각은 주둔지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런 그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고.

찰나의 마주침에 불과했지만 기이할 정도로 거부감이 들던 마법사 여인의 시선,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가, 감히! 이방인 따위가!”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들 것처럼 분노한 중대장을 보며 순간 심장이 뚝,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눈 딱 감고 그 기세를 버텨냈다.

“보시다시피 꼴이 이래놔서 괜히 분위기만 잡칠 것 같아서...”

붕대 감긴 팔을 내밀며 적당히 핑계를 댔지만 중대장의 분노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평소에도 이방인이라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중대장의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으니 당장 맞아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김선혁도 믿는 것이 있었다. 그게 바로 모든 이방인들의 후원자를 자처하던 아덴버그 왕가의 존재였다. 모든 이방인들은 가장 낮은 하급의 병과일지라도 왕실의 관리 하에 있었다.

아무리 주둔지의 실세인 프레드릭 중대장이라고 해도 함부로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평소 보여왔던 이방인에 대한 감정을 보건대 자신은 진즉에 험한 꼴을 당했어도 몇 번이나 당했어야 했다.

하지만 중대장은 그를 고까워하면서도 쳐내지 못했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보내지도 못했다. 그 말은 이방인이 어느정도 치외법권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후우.”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다. 치솟을 대로 치솟은 분노 탓에 온몸을 떨어대던 중대장이 어느 순간이 되자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주 건방져. 군인정신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아.”

착 가라앉은 음성 그 어디에도 흥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욱 한기를 느꼈다. 목소리에 칼을 품을 수 있다면 딱 저런 형태이리라. 그만큼 중대장의 음성은 살벌했다.

끙. 이거 잘못 건드렸나.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중대장과는 새삼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없는 마당에 미운 털이 조금 더 박히는 게 대수겠는가. 굳이 불편한 환영식에 참석해서 귀찮은 일을 자처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이래서 이방인들을 싫어하는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중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따로 원하는 게 있나?”

**

“오늘 중대장한테 불려갔다며?”

오늘따라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김선혁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달을 내는 강정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오늘 저녁에 환영식이 있다고 참석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그렇지. 그래도 동향에 훈련소 동긴데 그렇게 매정하게 할 리가 없지.”

말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김치국을 들이마신 강정태의 얼굴이 확, 하고 밝아졌다.

“아뇨. 전부 참석하는 건 아니고...”

“어? 그럼?”

대충의 정황을 설명해주니 강정태가 대번에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너만 부른 거구나.”

하지만 금세 왜 하필 김선혁만 불렀을까 의아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근데 왜? 혹시 너 그 여자랑 원래 알던 사이였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저도 굳이 왜 저를 부르는지는 모르겠네요.”

아예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래 들어 주변을 맴돌며 떠나지 않는 속성의 기운,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보이지 않는 힘을 이용한다니 어쩌면 그녀는 그가 지닌 풍 속성의 힘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갈 거야? 부상도 아직 다 안 나았는데. 우리 왕실 소속이잖아. 싫으면 거부할 수 있잖아.”

짐짓 생각해주는 척 하지만 강정태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질투에 가까웠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지만 ‘왜 이런 놈만...’이라는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본성을 보이는 강정태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나 자신이나 이 외딴 곳에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으니까. 굳이 그 얄팍한 처세술과 가식을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네. 그래서 저도 싫다고 했어요.”

“그치? 가봐야 뭐 있겠어? 그냥 높은 사람들 들러리나 하는 거지.”

다만 금세 태도를 달리 하는 모습이 조금은 우스웠을 뿐이다.

“근데 그냥 가보려고요.”

일견 과격하게만 보였던 프레드릭 중대장은 생각보다 유연한 사내였다.

“약속했거든요.”

그래서인지 명령이 통하지 않자 곧장 회유책을 꺼내들었다.

‘잘 훈련된 1급 전마(戰馬) 한 필과 전마를 무장시킬 마갑과 장비 일체, 그리고 기병에게 제공되는 모든 무장을 제공하도록 하지. 그리고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가급적이면 들어주겠네.’

얼음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음성이었지만, 상급 기사로 승급을 앞둔 절박함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더 강짜를 부리는 건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자존심을 굽히고 한 제안까지 거절하는 건, 그야말로 프레드릭과 원수를 지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애초부터 그는 완전히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가 딱 그가 바라는 정도의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는 프레드릭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덕분에 급료 대신 받아왔던 왕실의 후원금으로도 살 수 없었던 값 비싼 군마 한필과 기병의 필수 장비들을 무상으로 얻어낼 수 있었다.

행보관을 상대로 다져온 배짱과 언변이 가져온 쾌거였다.

“나, 나도 데려가 줄 수는 없어?”

자신도 데려가 줄 수는 없는지 매달려오는 강정태의 모습에 김선혁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리라는 사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는지 강정태는 몇 번 더 매달리다가는 실망한 얼굴로 돌아갔다.

강정태가 떠나간 뒤, 홀로 남겨진 김선혁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은서라는 마법사가 용기병의 숨겨진 힘을 알아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운이 좋다면 단 번에 중급으로 등급이 조정되어 중앙으로 불려갈 수도 있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우를 받으며 안락한 환경 속에서 훈련에 전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왕실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들은 빚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할 것들이다. 대우가 후하고 지원이 풍족할수록 그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갚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굳이 자처해 빚을 늘리고 거기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하급 병과가 짊어져야 할 빚 정도라면 나중에 갚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프레드릭 중대장이 이번 거래를 통해 훈련의 자율성마저 보장해주었으니 더욱 거리낄 게 없었다.

“지금이 딱 좋지.”

김선혁은 하늘을 올려보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준비를 서둘렀다.

**

“이렇게 미래의 대마법사와 마주하게 되었으니, 평생의 행운을 이번에 다 쓴 모양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이은서 경이라고 하면 왕실 마법사단 수석까지 내정된 인재가 아닙니까. 왕년의 수석마법사도 저 나이에 그 위치에 오르진 못했었습니다.”

“아덴버그의 방패라 불리는 사령관님과 함께 있는 걸 보니, 왕국의 앞날에 비친 서광이 보이는 듯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낯 부끄러운 말을 떠들어대야 직성이 풀리는지 되도 않을 언변으로 서로에게 금칠을 하는 작자들을 상대하고 있자니 안면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김선혁이라는 이방인이 멀찌감치 앉아 있지 않았다면 진즉에 여독을 핑계로 일어났을 것이다.

“저 같은 애송이가 뭘 알겠어요. 그저 경험 많고 유능한 여러 분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생겨 기쁘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적당히 다른 이들의 말을 받아주면서 이은서는 구석자리에 앉은 다소 격 떨어지는 복식의 사내를 보았다.

훈련소에서부터 말이 많았던 용기병이 이런 오지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기야 하급의 병과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게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용기병의 이름과 낮에 보았던 특이한 기운이 신경 쓰여 그녀는 김선혁이라는 사내를 관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낮에 보았던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분명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기운이라는 게 하도 미약하고 보잘 것 없어 굳이 중대장이라는 자에게 부탁까지 해가며 자리에 참석시킨 스스로가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저 정도의 기운이라면 드물긴 해도 아예 찾지 못할 정도로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은서는 금세 그에 대한 흥미를 잃고 말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마법사의 연약한 육신을 헤아려 양해 부탁드려요.”

**

“몸이 좋지 않아서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마법사의 연약한 육신을 헤아려 양해 부탁드려요.”

“이거 우리가 너무 우리 생각만 했구만.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시오.”

자리가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은서의 모습이 보였다. 적당히 인사를 주고받고는 뒤도 보지 않고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김선혁은 못마땅한 얼굴을 해보였다.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불러낼 때는 이렇게 가버린다는 말인가. 몇 번 눈이 마주친 것을 제외하고는 말 한 마디 섞지 않고 사라져버린 그녀의 행동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인근 요새의 사령관과 연대의 지휘관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간 힘을 써대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출세한 이방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음.”

하지만 잡념은 길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속성의 기운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던 탓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끙. 불러 모으는 것보다 흩어내는 게 몇 배는 더 힘드네.

어떻게든 관심을 피하기 위해 해본 시도였는데,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흩어낼라 치면 금세 뭉쳐서 들러붙는 속성의 기운에 몰두하다 보니 불편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커흠.”

억지로 만들어낸 듯한 헛기침 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프레드릭이 손을 휘휘 저어보이고 있었다. 이은서도 떠난 마당에 볼 일이 끝났으니 썩 꺼지라는 신호였다.

간다. 가. 치사한 놈아.

불편한 자리에 두통까지 생기긴 했어도 임기응변으로 달갑지 않은 관심을 벗어났고, 생각지 못한 이득을 보기까지 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름대로 만족한 얼굴로 상 위에 올려져 있던 닭다리 하나를 부여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레 환청과도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새로운 방식의 훈련은 꽤나 효과적이었습니다.]

[벽에 도달했던 속성 지배력의 성장이 다시 가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작품 후기 ==========

조금 늦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