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 뜻밖의 스킬 -->
한참을 말을 달리느라 고단했던 육신에 새로운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 활기의 근원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연이어 들려왔다.
[레벨 업 했습니다.]
[근력과 지구력, 민첩성 각 수치가 2씩 상승합니다.]
[눈물 겨운 반복 훈련 끝에 새로운 스킬을 얻는데 성공했습니다.]
[기마술 항목이 새로 생성되었습니다.]
[보유 스킬 목록에 초급 기마술 항목이 추가되었습니다.]
[스킬은 이후에도 꾸준히 연마하여 발전시키는 게 가능합니다.]
다른 병과로 전직한 이방인들은 등급의 고하에 상관없이 레벨 업을 했다. 하지만 정작 김선혁은 용기병으로 전직한 뒤에 한 번도 겪지 못했던 현상이다. 그간 흘린 땀이 얼만데 왔어도 진즉에 왔었어야 했다. 그런데 오지를 않으니 사실상 체념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떡하니 레벨 업 메시지가 들려오니 차라리 얼떨떨한 기분마저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생경한 감각은 금세 환희가 되었다. 그는 정말로 오래간 만에 스테이터스 창을 확인 해 보았다.
[김선혁]
□ Level. 2
□ 용기병(Dragon Rider)
□ 고유 속성
-풍(風)
□ 근력 19 / 지구력 18 / 민첩성 21
□ 보유 스킬
-드래곤 테이밍
-드래곤 라이딩
-차징(Charging)
-초급 기마술
: 초급 기마술 + 차징 = 어설픈 차징
근력을 비롯한 모든 수치가 2씩 상승했다. 거기에 더해 초급 기마술 항목이 생겨났고, 추가적으로 어설픈 차징이라는 스킬까지 생성되어 있었다.
“아...”
감동이 몰려왔다. 포기했던 레벨 업의 꿈이 다시 현실이 되었다. 짧은 순간에 오고 간 수많은 생각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의 현상을 겪게 된 과정을 돌이켜본다.
레벨 업은 분명 달콤했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도 지난했다. 그래서 김선혁은 슬펐다.
결국은 노가다가 답인가.
어렵지 않게 도출된 결론, 용기병은 다른 병과에 비해 어마어마한 노가다가 필요한 병과가 분명했다. 어쩌면 용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만남의 그날을 특정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다 포기했던 용과의 접점도 생겼고 레벨 업까지 했다. 궁상맞게 움츠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김선혁은 뒤 늦게 활짝 웃었다.
**
“저, 저거 완전 미친놈 아냐? 갑자기 또 혼자 히죽히죽 웃는데?”
한참 중얼중얼 거리며 말을 달리더니, 이제는 또 기괴하게 웃고 있다. 그런 김선혁의 모습은 절대로 정상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근데 좀 뭔가 갑자기 자세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어설프지만 리듬도 타이밍 맞게 타고 있고.”
원래부터가 김선혁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클라크인지라 금세 그 변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요나슨도 뒤늦게 변화를 알아차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방인이라 그런가? 뭔 변화가 이렇게 매번 갑작스러워.”
감탄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말이었지만 두 사내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이방인의 모습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감탄할 것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말 위에 탄 김선혁이 갑작스레 훈련용 창 하나를 줍더니 가르치지도 않은 차징 자세를 취한 것이다.
“설마?”
옆구리에 낀 창, 잔뜩 낮춘 자세가 영락없는 차징이었다.
“야, 인마! 할 거면 제대로 겨냥해! 완전히 엉뚱한 쪽이잖아!”
“창끝을 똑바로 보고, 달려야지! 그렇게 해서 맞겠냐!”
자세는 제대로인데 방향이 엉뚱하다. 저대로 가면 훈련용으로 세워둔 허수아비들을 그대로 빗겨갈 모양새라 그들은 저도 모르게 응원인지 호통인지 모를 말을 외쳐댔다.
“아오, 두 걸음! 딱 두 걸음만 방향을 틀라고!”
말은 그리 하면서도 전속력으로 돌격하는 와중에 방향을 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클라크였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열등생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무심코 한탄하고 말았다.
표적이 스스로 제 몸을 가져다 받치지 않고서야 창끝이 제대로 박힐 일은 없으리라.
“어?”
그런데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쐐에에엑.
창끝에서 두 걸음 정도 옆으로 치우쳐져 있던 허수아비가 강풍에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창끝을 향해 몸을 눕힌 것이다.
쾅!
그리고 충돌, 단순한 차징만으로는 생겨날 리 없는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꽤나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무심코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강렬한 충돌이었다.
뒤늦게 흙먼지가 가라앉고 훈련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허수아비는 멀쩡했다. 분명 창끝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듯한 광경을 본 것 같은데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허수아비는 여전히 꼿꼿하기만 했다.
“뭐지? 내가 헛것을...”
저도 모르게 눈을 비벼보았지만, 애초부터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던 허수아비가 움직였을 리가 없다. 결국 제 눈이 잘못 된 것이다.
“조, 조장! 이방인이!”
뒤늦게 요나슨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클라크의 눈에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린 김선혁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라면 낙마의 충격 따위 기침 몇 번 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을 그가 어쩐 일인지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이런 망할! 사제, 사제부터 불러!”
하얗게 까뒤집은 눈을 본 클라크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
“내가 분명 이방인의 관리에 신경 쓰라고 했을 텐데.”
성난 프레드릭은 숫제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그야말로 전장의 멧돼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사나운 기세, 클라크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억지로 펴며 최대한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써야 했다.
“그럼 그냥 훈련 중에 일어난 단순 사고는 아니라는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프레드릭은 그의 보고를 듣고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김선혁이 차징시에 보였던 위력은 어지간한 견습기사님들의 차징보다 강해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프레드릭은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이 되었다. 그 스스로도 각고의 노력 끝에 초인이라 불리는 기사의 경지에 달한 자, 그런 그가 듣기에 클라크의 말은 기사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일반적인 병사와 기사를 지망하는 이들의 격차는 인간과 초인의 경계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심기가 상한 프레드릭의 날카로운 눈빛이 클라크를 해부할 것처럼 쏘아져 나왔다.
“견습 기사들이 비록 완숙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나 분명 그들 역시 초인의 초입에 발을 딛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 이방인 나부랭이가 견습기사 만큼의 힘을 보였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다. 혹시 그 말에 책임 질 수 있나.”
행여라도 과장을 섞어서 기사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판단이 들면 팔 하나 쯤은 가져갈 듯한 기세였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킨 클라크는 망설였을지언정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만약 원하신다면 직접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보지 않을 이유가 없군.”
단호하게 몸을 일으킨 프레드릭이 클라크를 따라 훈련장으로 향했다.
“여깁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채 메워지지 않은 커다란 구덩이를 본 프레드릭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만약 이곳에 적이 있었다면...”
단단하게 세워진 방패가 터져 나가고, 길게 내밀어진 대 기병용 장창이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희한하군. 이런 놈이 왜 가장 낮은 등급을 받은 거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장에서 이만한 위력을 똑같이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행여라도 엉뚱한 곳으로 차징을 시도했다가는 멀쩡하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동료 기병들을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본인 역시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해 낙마했다가는 창을 부여잡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창병들의 밥이 될 뿐이었다.
“결국 요는 어떻게 놈을 활용하느냐가 문제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프레드릭이 낮은 음성으로 당부했다.
“당분간은 이번 일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지 말도록.”
프레드릭의 당부에 클라크가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 도로 닫았다.
마치 바람에 빨려 들 듯 몸을 눕혔던 허수아비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지만, 이내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허수아비의 머리 옆에 길게 무언가가 스쳐지나간 듯한 자국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기분 탓으로 치부했다.
그만큼 그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가봐. 이방인이 깨어나면 나한테 알리도록 하고.”
“네. 알겠습니다.”
복잡한 심정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클라크가 떠나갔다.
클라크 놈. 건방지게 기사를 들먹인다싶었더니 그마저도 내 눈치를 보느라 낮춰 말한 모양이다.
홀로 남은 프레드릭이 거대한 무언가가 할퀴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길게 파인 구덩이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차징의 위력을 가늠했다.
이 정도면 최소한 서임 받은 기사급의 차징이다.
짐덩이를 떠맡은 줄 알았더니 의외로 쓸만한 놈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프레드릭이 진하게 웃었다.
**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놈이 뛰려고 하니 그런 사고를 치지.”
정신을 차린 김선혁은 호되게 욕을 먹어야 했다. 레벨 업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흥분하여 제 멋대로 일을 벌이다 나가떨어진 것이니 어디 가서 억울하다 호소할 수도 없었다.
“당분간은 시키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괜히 쓸데없는 짓은 말고.”
클라크는 몇 번이나 경고를 했고, 그는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크게 경고를 귀담아 듣는 것 같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제 손바닥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건 대체 뭐였지?
충돌 직전의 순간 손끝을 감아오던 이질적인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는 순간 주변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어느 순간이 되자 그 바람이 창끝을 타고 휘몰아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미 맞출 수 없을 거라 판단했던 표적을 빨아들였다.
닿을 리 없다고 포기했던 표적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공격은 원래대로라면 허수아비의 근처에도 도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분명 두 걸음과 한 끗 차이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다.
그저 착각이 아니었다. 연병장에 나가 확인해보니, 역시나 허수아비의 머리 옆으로 길게 찢겨진 자국이 있었다.
‘당장은 다스리는 것조차 힘에 겨울 것이나 나는 그대가 이로 말미암아 크나큰 시련을 이겨낼 것이라 추측하노라.’
창끝을 휘감고 몰아치던 바람이 공격이 빗나간 순간 역으로 그를 빨아들였다. 그 결과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용의 말 그대로였다. 스스로가 제어하지 못하는 힘은 오히려 제 몸을 상하게 만들고 말았다.
자칫 잘못하면 목뼈가 꺾여 죽을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지만, 그는 섬뜩함보다는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환경적이라는 도움이라는 게 설마, 이런 거였나.
빠르게 달리는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바람과 함께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풍 속성을 활용할 방법을 찾은 그의 얼굴이 더없이 밝기만 했다.
“이런 게 하급이라고?”
단호하게 가장 낮은 등급을 주며 용 따위는 세상에 없다 말했던 교관의 얼굴이 떠올라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기다려라. 네놈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알려줄 테니.
**
용기병의 대단함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놀라지 마라. 형, 벌써 9레벨 찍었다.”
우연히 만난 강정태는 대뜸 자신의 레벨을 자랑했다.
“아, 그럼 스테이터스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무리 이곳에 오기까지 친분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강정태는 자신의 성장이 어지간히 자랑스러운지 거들먹거리며 제 스테이터스를 전부 늘어놓았다.
“나 근력 13, 지구력 13, 민첩성 14. 레벨 업을 해도 별로 오르지를 않네.”
그런데 그렇게 자랑삼아 늘어놓은 스테이터스 수치라는 게 고작 2레벨에 불과한 자신만도 못했다.
“음...”
애매한 그의 표정을 본 강정태가 뒤늦게 부연설명을 했다.
“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레벨을 올려도 근력 지구력 민첩성 중에 하나만 1씩 오르니, 능력치 올리는 게 영 쉽지가 않다.”
레벨 업을 하며 오른 수치도 보잘 것 없기만 하니, 김선혁으로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힘내, 인마. 너도 언젠간 올릴 수 있을 거야.”
“아, 네. 고마워요. 형.”
제법 친해졌다 해도 결국 그들이 있는 곳은 약육강식의 세계, 되도 않을 위로 너머로 알량한 승리감이 언뜻 나타났다 사라졌다.
“갈게요. 형.”
“그래. 힘내! 너무 의기소침해 있지 말고!”
그다지 기분 좋은 대화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유익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내친 김에 다른 이방인들을 만나 그들의 레벨과 스테이터스를 물었다. 어지간하면 대답해주지 않았을 이들도 질문을 한 당사자가 가장 가망성이 없는 용기병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굳이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대답해주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라도 자신의 성장을 자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왜 하급 병과들이 천대 받는지 알겠네...”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종합해본 결과 주둔지에 파견된 이방인들의 평균적인 능력치는 강정태와 대동소이했다. 레벨 업을 할 때마다 주어지는 능력치의 상승도 총합이 1에 불과했으니, 덜컥 6이나 한꺼번에 올라버린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때 우리 훈련소에서 제일 먼저 상급 병과 받은 누나 기억나요?”
“어, 마법사로 전직했던 그 여자 말하는 거지?”
“네, 맞아요. 형. 내가 위에서 이야기 하는 거 어쩌다 들었거든요.”
이방인 중 막내를 자처하던 박수홍을 만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 누나는 한 번 레벨 업 할 때마다 4씩 상승한다던데요?”
대체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둘째 치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그는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당첨금을 수령하려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뭐, 그래도 선금으로 받은 것만 해도 꽤 대단한 편이지.”
김선혁은 제 손가락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가는 바람을 만끽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