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4화 (4/305)

<-- 03. 용의 목소리 -->

‘그 어떤 땅 짐승도 그대가 등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 또한 그들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감히 그들은 거부할 수 없을 것이노라.’

이제는 정말 스스로가 미친 것이 아닐까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기왕 미친 것, 미친 짓 하나를 더 추가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래서 김선혁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훈련장에 나와 군마를 붙잡고 눈싸움을 시작했다.

‘말하라. 선언하라. 부족하다면 몇 번이고 반복하라. 그리 하면 그것이 약속이 되고 언령(言令)이 되리라.’

“내가 네 주인이다. 내가 네 주인이다. 내가 네 주인이다. 내가...”

환청이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너는 나를 거부할 수 없다. 너는 나를 거부할 수 없다. 너는 나를...”

결과는 놀라웠다. 번번이 난동을 부리던 말이 거짓말처럼 얌전해진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경배하듯 고개를 숙이고 등을 내보이니 그간의 고생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후우.”

그래도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어 소심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말 등에 올라 한참이나 마음을 졸이다 용기를 내어 몇걸음 앞으로 나아가 보았다. 말은 여전히 얌전했고, 이번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 속도를 올려보았다.

난동의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김선혁은 환호했다.

“해냈다!”

한 발 늦게 마침내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슴을 꽉 채웠다.

이히이잉.

버럭 소리를 지르니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헙.”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화들짝 놀란 그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봤냐! 봤냐!

혹시나 말에서 떨어질까 호들갑을 떠는 대신 거들먹거리며 클라크와 다른 기병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클라크는 어쩐지 말이 없었고, 그 대신 기병이 한마디를 보탰다.

“기병이랍시고 이제까지 말 못 타던 게 창피한 일이지.”

기병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제 고작 말에 올라탄 채 몇 걸음 내딛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마냥 기뻐하기에는 다른 기병들과 그의 출발선이 너무나 달랐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쁨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를 이다지나 기쁘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승마에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정한 자격을 갖추는 그날까지, 내가 그대를 인도하리라.]

전날 들었던 음성은 환청도 꿈도 아니었다.

진짜 용이었어! 용이 있었던 거야!

재수 없게 꽝에 걸렸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병과가 사실은 대박이었던 것이다.

“저, 저거 미친놈. 저러다 또 떨어지지.”

말위에 앉아 히죽히죽 웃어대는 그를 보며 기병이 손가락질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신이 딴 곳에 간 사이에 얌전하던 말이 다시 성질을 부릴 조짐을 보였다. 그 사실을 다시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말 등에서 또다시 내동댕이쳐진 뒤였다.

“컥, 낄낄. 콜록. 크흐흐.”

하지만 통증 따위 느껴질 리가 없다.

“진짜 있었어! 진짜로!”

기침하다 웃다 기침하다 웃는 그를 보는 이들의 시선이 꼭 미친놈 보듯 했다.

**

말 등에 오르는데 성공했지만 김선혁의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천덕꾸러기였고 동료들은 그가 이룬 작은 성과에 전혀 무관심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던 용이 실존 함을 알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머리가 꽉 차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너는 어디 있지? 우리는 언제 만날 수 있지?’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음이니, 그대는 훗날의 만남보다 오늘을 가치 있게 여기라.]

용은 말을 참 어렵게도 하는 재주가 있었다. 결국 간추리자면 아직은 만날 때가 되지 않았고, 그 스스로가 자격이 부족하다 말이었다. 대체 그날이 언제인지는 용도 정확하게 모르는 듯해 그도 더는 묻지 않았다.

용은 이런 식의 대화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의 그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며, 자칫 잘못하면 만남의 그날이 더욱 미루어질 거라 말했다. 덕분에 대화를 길게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얻은 게 적지는 않았다. 당장 번번이 낙마하기 일쑤였던 자신이 말에 올라타는데 성공했고, 없는 줄 알았던 용이 실존함을 알게 됨으로서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용은 한 가지 선물을 더 주었다.

[그대는 아직 너무나 약하도다. 원래 그대에게 약속되었던 능력 하나를 앞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리라. 당장은 다스리는 것조차 힘에 겨울 것이나 나는 그대가 이로 말미암아 크나큰 시련을 이겨낼 것이라 추측하노라.]

새로운 능력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얻으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 거라 으름장을 놓았다.

[속성창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테이터스에 ‘풍(風)’ 속성이 추가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장은 속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용의 말을 듣고 추측컨대 그 속성의 힘을 제한적으로나마 발휘하려면 환경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을 말하는 것인지는 조금 더 궁리해봐야 할 일이었으니, 앞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리라.

용과 대화를 나눈 뒤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느 정도 타성에 젖어 있던 그가 의욕적으로 훈련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만사 의욕만으로 되는 일은 없었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오. 저도 드디어 갑옷이 나온 겁니까?”

김선혁은 제 몸에 맞게 치수가 조정된 갑옷을 보고는 반색을 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윽!”

주변의 도움을 받아 걸친 갑옷은 미친 듯이 무겁고 갑갑했다.

“흠, 사이즈는 대충 맞는 거 같군.”

“작은 거 같은데... 엄청 갑갑합니다.”

“원래 그렇게 입는 거야. 여기서 더 넉넉하게 하면 돌격 중에 벌어진다. 바이저(Visor-얼굴 가리개) 내려 봐.”

시키는 대로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니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시야까지 가려진다. 게다가 답답하기는 얼마나 답답한지 숨도 쉬기 힘들어 당장에라도 투구를 벗어던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거 꼭 내려야 합니까?”

“돌격 하다가 면상에 화살 꽂히고 싶으면 올리고 다니든지.”

클라크가 킬킬거리며 대꾸했다.

“이거 너무 무거운데.”

꽤나 높은 근력수치를 자랑하는 그였지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묵직한 철갑을 두르고 나니 금세 파김치가 되고 말았다.

“그 갑옷이 우리가 쓰는 것 중에 제일 가벼운 놈이다. 넌 체구가 작은 편이니까.”

참고로 이쪽은 대한민국의 평균 키보다 조금 큰 178센티의 키다. 병장이 되어 한참 관리를 한 탓에 몸도 어디 가서 비리비리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끙. 이쪽이 작은 게 아니라 그쪽이 무식하게 큰 거라고.

그나마 스테이터스의 보정을 받지 않았다면 갑옷의 무게만으로도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엄살 피우지 마. 실제 전투에서는 그것 말고도 챙겨가야 할 게 많아. 고작 그 정도로 헉헉대면 나중에 피똥 싼다.”

“마법도 있는 세상에서 이런 무식한 물건을...”

온갖 이적을 몸소 시행하는 마법사라는 무리도 있는 곳인데 왜 이런 부분에서는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것인지 의문이 가 물었더니 클라크가 혀를 끌끌대며 찼다.

“마법사가 손을 본 갑옷은 눈알 튀어나오게 비싸지. 그리고 비싸지 않더라도 우리 부대에는 그런 거 쓰는 정신 나간 놈 없어.”

“어째서 말입니까?”

“우리가 뭐라고 생각하냐. 중장기병(Heavy Cavalry)이야. 중장기병. 무슨 말인지 알아? 우리는 무게가 곧 파괴력이라고.”

그제서야 김선혁은 납득할 수 있었다. 저쪽 세계에서 중세의 중장기병들이 중량으로 적진을 분쇄한다는 이야기를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끙. 묘한 부분에서 현실적이네.”

“헛소리 말고, 지금부터 승마 훈련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 갑옷을 입고 있도록 해. 한센을 꺾은 네 놈 힘이라면 금방 익숙해질 거다.”

그나마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그가 혹시나 낙마해 큰 부상을 입을까봐 배려를 해준 것이 감지덕지였다.

“나도 보모노릇 지겹다. 그러니 그만 징징거리고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넵.”

그 말을 끝으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

클라크는 괴물이라도 보듯 김선혁을 바라보았다. 말에 제대로 올라타지도 못하던 것이 불과 2주 전, 그런데 지금의 그는 어설프긴 하지만 나름대로 기병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리듬 타는 거랑, 기본적인 건 조금 더 배워야겠지만 저 대로라면 금방 실전에서 써먹을 정도는 되겠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감탄을 토해내는 요나슨의 말에 클라크가 고개를 저었다.

“맨몸으로 타는 정도야 보병들도 좀만 배우면 하는 거지. 진짜 기병이 되려면 아직도 배워야 할 게 산더미야. 당장 돌격도 못 하는 기병을 어디다 써먹어.”

말과는 달리 그의 음성에도 은은하게 감탄이 섞이고 만다.

이게 이방인의 힘, 경이로운 성장 속도다.

기병이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그게 중장기병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곳에 모인 기병대원들 모두가 제 발로 걸은 걸음보다 말을 타고 걸은 걸음 수가 더욱 많을 정도로 오랜 시간 기마술을 연마해왔다.

그런데 2주 전까지만 해도 영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이방인이 단시간에 그 간극을 메우고 있으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끙. 근데 그냥 타면 안 되나? 먼지 죄 들이마시면서 다니네.”

다만 한 가지 기이한 것이 있다면, 김선혁이 끊임없이 입을 떠벌거린다는 점이었다.

“이랴! 이쪽으로 가자!”

“이번에는 저쪽으로!”

“합! 빨리!”

몸으로 할 것도 저리 말로 전부 때우니 보고 있기가 심히 괴로웠다.

“나중에 돌격할 때도 저러는 건 아니겠지? 가자, 왼쪽으로, 더 빨리, 틀어라.”

“그럼 볼 만 하겠네.”

클라크의 혼잣말을 들은 요나슨이 낄낄대며 웃었다.

**

요나슨과 클라크가 지켜보는 사이 김선혁은 정신없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워낙에 고속화된 세상에서 살다 왔던지라 차보다 느린 말 따위 빨라봐야 얼마나 빠르겠냐고 얕보았던 건만, 실제로 말을 타고 달리는 속도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말발굽소리와 바람소리에 귀는 먹먹하고 하체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은 온몸을 쉬지 않고 때려댄다. 엉덩이는 아프고 허리는 욱신거리고, 저쪽 세상의 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투박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게 거북스럽기는커녕 도리어 신바람이 났다.

“이랴!”

그 상태로 한참을 달리다보니 느껴지는 건 바람이요, 들리는 건 말발굽소리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의 상태, 그때 귓가로 환청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피나는 훈련으로 마침내 한계를 돌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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