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 말 못 타는 기병 -->
이방인 열여섯을 태운 수레는 무려 3주의 시간이 걸려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과가 다르니, 앞으로는 자주 못 보겠네.”
“그러게요. 그래도 가끔 얼굴이라도 볼 수는 있겠죠.”
그 사이 꽤나 친해진 이방인들이 아쉬움을 표하며 서로를 배웅했다.
“선혁이 너도 힘내. 인마. 그래도 기병 쪽이 기사나 마법사 같은 특수 병과 빼고는 가장 대우가 좋다더라.”
“끙. 승마 스킬도 없는데.”
“없으면 배워서라도 익혀야지! 쟤들은 뭐 날 때부터 말 위에서 태어났냐!”
강정태의 위로에 김선혁은 결국 웃고 말았아.
“알겠어요. 형. 형도 꼭 목표한 대로 등급 올리시기를 바랄게요.”
“오냐. 형이 꼭 중급에 올라서 니들 다 챙겨주마.”
그렇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자니, 저 멀리서 인솔자로 보이는 병사가 나타나 이방인들을 하나 둘 어디론가 데려갔다.
“이쪽으로.”
김선혁 역시 느지막히 나타난 병사의 안내를 받아 배속 부대로 향했다.
“자네가 김선혁이라는 이방인인가?”
꽤나 큼지막한 천막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물었다.
“앞으로! 네! 제가 김선혁입니다!”
기초 교육 중에 받았던 대로 가슴을 치며 구호를 외치니 사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 모양이다.
“이방인들이란 놈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왜 그 모양인가. 부르기도 어렵고, 어감도 안 좋고.”
생각지도 못한 트집에 그가 대처할 바를 몰라 눈치를 살피는데, 사내가 여전히 마뜩찮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애송아. 여기서 네가 이방인이라고 특별대우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따라와야 할 거다. 기병대는 애새끼들 놀이터가 아니야.”
어쩐지 이방인에 대한 악의가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그리고 미리 경고하는데 그 스킬인지 스테이터슨지 믿고 나대지 마라. 진짜 기병들은 네놈들 같은 가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사나이들이니까.”
아무래도 스킬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는 이방인들의 힘이 영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김선혁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마음도 컸다. 원치도 않았는데 이계에 떨어져 군역을 치르게 생겼는데, 반발심이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가 지켜볼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않는 사내의 협박을 끝으로 그는 막사에서 쫓겨났다. 나왔더니 처음에 안내를 맡았던 병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병들의 막사는 저쪽에 있습니다.”
저 심사 비틀린 사내가 기병 지휘관인 모양인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고 안내를 맡은 병사에게 물어보아도 별다른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저는 그저 안내를 맡았을 뿐, 기병대 소속도 아니니 그쪽 가서 직접 들으십셔.”
살짝 삐딱한 병사의 말투에서 이방인에 대한 반감을 찾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지내는 게 마냥 쉽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김선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하십셔.”
건들건들 인사를 남긴 병사가 사라지고, 김선혁은 큼지막한 막사 앞에 남겨졌다.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내던져진 숙소, 아마 다른 이였다면 막막함에 한참을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말년 병장의 짬은 거저먹은 게 아니었다.
신병 신고식쯤이야 우습지.
한차례 숨을 내뱉는 것으로 긴장을 털어낸 그가 막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건 또 뭐 하는 새끼야.”
하지만 호기도 잠시였을 뿐이다. 막사를 열기가 무섭게 날아든 날 선 시선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살벌했다.
190센티는 될 법한 덩치에 온몸 그득한 상처를 고스란히 내놓은 거한들은 숫제 병사가 아니라 범죄자라고 해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기어들어와!”
스스로가 한 번도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사내들의 외모가 워낙에 특별하다보니 내심 납득하고 말았다. 자연 그의 말투가 기생오라비의 그것처럼 기어들어갔다.
“시, 신병인데요.”
“오호라. 네놈이 오늘 온다던 그 김 뭐시기 이방인이구만?”
“반가워. 아주 반가워. 내가 너를 아주 며칠 전부터 내내 기다렸거든.”
아니,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쩐지 말과는 달리 표정은 당장에라도 자신을 회쳐 먹을 것만 같은 기세에 그가 주춤 물러났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이런 이쁜이가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왠지 모르게 바지춤을 부여잡게 되는 거한의 말에 김선혁이 다시 한 발 물러났다.
**
“끄응.”
당장에라도 뭔가 일을 벌일 것 같았던 거한은 뜻밖에도 몇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더하고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그는 유일하게 비어있던 침상 위에 슬그머니 몸을 눕혔다.
말똥, 말똥.
잠이 오지를 않는다. 막 자대 배치 받았던 과거의 그날 느꼈던 암담함과는 달랐다. 지금 그는 명백하게 공포에 떨고 있었다.
설마 자는데 덮치지는 않겠지.
유달리 이쁜이라는 말을 강조하던 거한의 말이 계속해서 머리를 울려댔다. 이대로 잠이 들었다간 평생 후회할 만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쌓인 여독이 그의 눈꺼풀을 짓눌렀다. 결국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고 말았다.
“야. 야.”
한참 꿈속을 헤매고 있던 정신이 작은 소음에 조금씩 선명해진다.
“이 새끼, 정말 자는데?”
“멍청한 거야. 아니면 깡이 좋은 거야.”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김선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휴우.”
저도 모르게 바지춤을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컥!”
그때 눈앞에 번쩍, 별이 터졌다. 그리고 한발 늦게 배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따라왔다.
“일어나. 이 새끼야. 신고식 해야지.”
“아니, 왜 할 거면 아까 하지. 오밤중에...”
몽롱한 정신에 갑작스러운 통증까지, 경황이 없던 김선혁이 무심코 입을 나불대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 들었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이 새끼 지금 잠투정 한 거야?”
“낮에는 더워서 냅뒀다. 새끼야. 지금 딱 좋지 않냐? 푸닥거리 하기에?”
험상궂은 거한들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씨. 엿 됐다.
와락 인상을 찡그린 김선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새끼를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말에 묶어서 한 두 시간 정도 달릴까?”
“아니면 예전에 왔던 얼치기 놈처럼 그냥 거꾸로 매달아버릴까.”
“그때 거꾸로 매달았던 얼치기가 나거든? 이 개자식아.”
“아, 그게 너였냐? 이 새끼 그새 사람 됐네?”
잠깐 정신을 수습하는 사이에 저쪽에서는 벌써 자신을 어떻게 요리할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영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이야기들뿐이다.
“좋아. 결정했어.”
도대체 뭘 어떻게 결정했다는 건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김선혁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골라.”
“기왕이면 제일 약한 걸로...”
어차피 싫으나 좋으나 당분간은 이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상황,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신고식은 치르고 지나가야 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체념하는 마음이 되어 사내의 말을 받아주었다.
“뭔 소리야. 고르라고.”
“그러니까 제일 약한 걸로...”
“이 새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우리 중에 누구랑 붙을지 고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 덩치 큰 사내를 보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김선혁이다.
“그럼 우리가 땅개 새끼들처럼 다구리라도 칠 줄 알았어? 우리 자랑스러운 기병연대에는 그런 거지같은 전통은 없다.”
아니. 지금 이런 것도 충분히 거지 같은데...
차마 내뱉지 못한 한마디를 꾹 삼킨 김선혁은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쪽...”
워낙에 다들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이라 누구를 골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아무나 골랐다.
“지금 저 새끼가 나 고른 거 맞지?”
“겁나 눈썰미 좋네. 어떻게 우리 중에 제일 허접한 놈을 골라냈지? 요나슨, 니가 말해줬냐?”
“그럴 리가. 척 보면 척이지. 딱 봐도 한센이 우리 중에 제일 약해 보이잖아?”
지목당한 사내, 한센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는데 주변의 기병들은 좋다고 낄낄대고 있다.
“진짜냐? 너 내가 만만해 보여서 고른 거야?”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듯한 반응, 김선혁은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너 이 새끼, 오늘 죽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병 사내들이 침상을 치우고 막사 한 가운데 공간을 만들었다. 그 와중에 무거운 침상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사내들의 모습이 들어왔지만 김선혁은 애써 무시했다.
“혹시라도 지면 내가 예뻐해 줄 테니까. 신병은 너무 걱정 말라고!”
아니. 그게 더 걱정인데.
험상궂은 사내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사내의 응원 같지 않은 응원을 뒤로 하고 김선혁은 자세를 잡았다. 그래도 훈련소에서 대차게 굴렀다고 마냥 떨리지는 않는 걸 보면 이곳에 적응시켜준다던 교관의 말이 마냥 허풍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부아악!”
열이 끝까지 오른 한센이 기괴한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단순히 덩치와 힘을 내세운 태클이었지만 체급차가 있었던지라 그만큼 위협적이기도 했다.
쑥 내밀어진 손이 허리를 끌어안을 듯 다가온다. 그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비끼며 무릎을 올려 찼다. 그야말로 훈련소에서 배운 대인 격투술의 기본 그 자체, 하지만 상대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제 몸을 내주었다.
“억!”
짓눌린 신음도 잠시, 한센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손을 휘저었다. 이렇게까지 터프하게 공격이 이어질지는 몰랐던 김선혁이 미처 물러나지 못하고 그 손에 덜컥 잡혀버렸다.
“죽여주지.”
무지막지한 힘이 허리를 압박하고 숨이 덜컥 막혀왔다.
“컥.”
양손이 끼인지라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아니, 딱 하나 있긴 했다. 그는 곧장 발버둥 치며 목을 최대한 뒤로 재꼈다.
콰직.
힘껏 내지른 박치기, 그대로 얼굴을 격중 당한 한센이 비명을 지르며 코를 부여잡았다. 그 사이에 풀려난 김선혁이 그대로 발을 올려 찼다.
“어?”
그런데 하필이면 그렇게 내지른 발끝이 좋지 못한 곳을 차고 말았다. 쌍코피가 터지는 와중에도 재차 공격을 하려던 한센이 입을 쩍 벌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아, 아니. 이건 일부러 그런 게...”
어디까지나 사고였다고 변명을 하려던 그였지만, 이미 지켜보고 있던 기병은 천하의 악질이라도 보듯 그를 보고 있었다.
“우! 깨진 거 아냐? 와그작 소리 난 것 같은데.”
“보기에는 예쁘장한 놈이 엄청 독하군.”
서서히 뒤로 넘어가는 한센을 본 기병들이 뜨악한 얼굴을 해보였다.
“뭐가 됐든 한센 새끼가 진 거네.”
“쯧. 기병대의 수치다. 수치.”
“쩝. 아쉬워라. 내가 예뻐해 주려고 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끝나버린 대결, 승리의 기쁨을 미처 느끼지도 못했던 김선혁은 누군가의 섬뜩한 푸념에 안도감을 먼저 느껴야 했다.
**
한센이 자빠지는 걸 본 기병들은 태평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꽤나 놀란 상태였다. 비록 단조롭고 무식한 막 싸움일지라도 한센은 싸우는 법을 아는 자였다. 무식한 맷집과 힘으로 상대를 끌어안고 조일라 치면 상대는 갈빗대가 모조리 부러지는 통증에 비명부터 지르기 일쑤였다.
그런데 저 비리비리한 신병이 그걸 이겨낸 것이다.
“마음만 먹었다면 진즉에 한센의 손을 풀었을 거야. 한센의 조이기는 저렇게 머리를 뒤로 쭉 뺄 수 있을 정도로 널럴하지 않아.”
“그럼 저 부실한 놈이 한센보다 힘이 세다는 거야?”
“이방인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스테이터스라고 했던가. 이방인들이 지닌 힘의 근원은 자신들처럼 단련해 만드는 근력과는 다르다는 이야기 있었다.
“마냥 애송이는 아니라는 이야기지.”
“확실히 그 독심은 보통이 아니야.”
사내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나름대로 신고식을 이겨냈다고 제 딴에는 친근하게 말을 걸었던 기병 하나가 황당한 말을 들은 것이다.
“저 한 번도 말 타본 적 없는데요?”
“근데 왜 기병대로 왔어.”
“전직 병과가 ...기병이라서요.”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용’이라는 단어, 사정이야 어찌 됐건 기병은 분명 기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