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 푸어-1화 (프롤로그) (1/305)

<-- 프롤로그 -->

가장 흔한 병과 검병(Sword Man)에서부터 마법사, 정령사, 기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이계에 떨어져 각성한 직업의 종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다양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병과들 중에서 용기병(Dragon Rider)로 각성한 것은 오직 그만이 유일했다.

당연하게도 대박을 기대했지만, 황당하게도 결과는 쪽박이었다.

“세상에 용이 어디 있어.”

마법도 있고, 정령도 있고, 몬스터도 있다. 그런데 용만 없단다.

“이건 말도 안 돼!”

용 없는 용기사는 가장 흔한 검병 만도 못한 존재, 하지만 세상에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진정한 자격을 갖추는 그날까지, 내가 그대를 인도하리라.]

========== 작품 후기 ==========

능력이 닿는 한 최대한의 열과 성을 담아 완결까지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성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 01. 각성 -->

어느 날 갑자기 지구의 인간들이 이계로 강제 소환 당했다. 어리둥절한 건 지구의 인간들 뿐, 이계의 주민들은 마치 익숙한 듯이 그들을 하나로 모아 지저분한 요새로 내몰았다. 김선혁 역시 그렇게 내몰린 지구인들 중 하나였다.

“아덴버그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방인들이여.”

왕국의 관리를 자처하며 나선 이계인을 통해 지금의 상황이 ‘대소환’이라 불리는 현상이며 이미 수차례나 있어왔던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국은 기꺼이 그대들의 든든한 뒷 배경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그대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라.”

지저분한 요새에 갇힌 지 고작 사흘이나 지났을까. 국왕이란 작자가 나타나 덜컥 선언했고,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차라리 왕국을 조력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왕국은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대신, 왕가를 위해 한정 시간 봉사할 것을 제안했다. 공에 따라 얼마든 그 기간을 감해주는 조건이었다.

“대소환을 통해 온 그대들이라면 능력을 입증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그대들을 도우리라.”

갑작스레 시작된 군사 교육, 가치를 입증하는 것과 이런 무식한 훈련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따위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난생 처음 날붙이를 손에 쥐고 진창을 굴렀고, 한계까지 육신을 혹사시켜야 했다.

“지금은 우리를 욕할 것이다. 왜 이런 힘들고 고된 훈련을 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대들은 곧 이로 말미암아 영광된 열매를 취할 수 있으리라.”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의미도 파악 못한 채 악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교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팟!

한창 흙바닥을 기어 다니던 가운데 이방인들 중 하나가 빛에 휩싸인 것이다.

“전직을 축하한다.”

그때만큼은 악귀 같이 호통을 치던 교관도 넉넉한 얼굴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김선혁은 그때 알게 되었다. 이 거지 같은 요새를 벗어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상중하(上中下).

교관은 사내를 중급으로 분류했다. 이제까지 걸쳐왔던 넝마 같은 옷가지도 벗어던진 사내의 복장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꽤나 화려해 궁색한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달라진 건 옷차림뿐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로는 사내가 말단 귀족의 작위를 수여받아 앞으로 왕국을 위해 종사하게 될 것이라 했다. 완전히 상황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귀족이야말로 이 불합리한 세상의 정점에 있는 자들,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던 이가 그런 자리에 올랐다는 건 대단한 동기가 되었다.

마지못해 훈련에 임하며 하루하루 버티듯이 지내던 이방인들의 분위기가 바뀐 것은, 사내가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을 즈음이었다.

“왕국은 절대 인색하지 않다.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한 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얻을 것이다.”

교관들은 그들을 부추겼고, 이방인들은 더욱 더 훈련에 열중했다.

“자네는 하급인가? 어쨌건 간에 각성을 축하한다.”

“각성 축하하네.”

“오! 축하해. 자네도 중급이야.”

그 결과 수많은 이방인들이 ‘각성’, 또는 ‘전직’이라 불리는 현상을 겪으며 요새를 떠나갔다. 중급과 하급, 등급은 달랐지만 모두가 이 지옥 같은 요새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전직 병과는?”

“마, 마법사입니다.”

“오오! 드디어 상급 병과로 전직한 자가 나왔어! 왕국의 경사야!”

그러던 차에 마법사로 전직한 여인 하나가 최초로 ‘상’의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중,하의 등급을 받은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우를 받으며 요새를 떠나갔다.

아, 나도 기왕이면 상급의 병과로 전직했으면....

기왕지사 이계에 떨어진 것, 최대한 높은 위치에 올라 넉넉하게 살면 좋지 않겠는가. 이방인들의 눈에 열기가 떠올랐다.

김선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이어진 동료들의 전직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찾아왔다.

팟!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양감과 충만감, 그는 한동안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황홀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야. 저번에 마법사로 전직한 여자보다 더 요란한데?”

“최소한 상급 아냐?”

그 어느 때보다 찬란했던 전직의 빛을 보며 이방인들이 수군댔다. 그들은 부러움과 질시를 담아 김선혁을 바라보았고, 교관 역시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각성을 축하하네. 전직 병과는 뭐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선혁은 먼저 각성한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확인해 보았다.

[김선혁]

□ Level. 1

□ 용기병(Dragon Rider)

□ 근력 17 / 지구력 16 / 민첩성 19

□ 보유 스킬

-드래곤 테이밍

-드래곤 라이딩

-차징(Charging)

이름만 보아도 거창하고 뭔가 대단하다. 그냥 기병도 기사도 아닌 용기병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에 김선혁은 한껏 고무되었다.

“요, 용기병입니다!”

“용기병? 그게 뭐지?”

교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게 못내 거슬렸지만 그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이제껏 이런 특이한 이름을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상급으로 분류되어 요새를 떠나갔으니까.

“말 그대로 용을 타는 기병인 모양인데요?”

그의 설명에 이방인들이 더욱 더 노골적인 부러움을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대박의 느낌이 난 것이다. 하지만 교관의 표정은 여전히 미묘했다.

“용? 용을 탄다고?”

“네...”

이쯤 되자 환희에 차 있던 김선혁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교관의 표정은 복잡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가장 크게 전해져 오는 감정은...

“끙. 오랜만에 또 상급 하나 나오나 했더니...”

실망이었다.

“좋은 거 아닙니까?”

김선혁의 얼빠진 반응에 교관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아마 좋았겠지. 만약, 용만 이 세상에 있다면 말이야.”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 마법도 있고, 정령도 있고, 몬스터도 있다. 그런데 용만 없단다.

“어째서!”

한껏 기대에 차올랐던 김선혁은 절규했다.

“낸들 아나. 원래 없는 걸. 없는 걸 어떻게 타고 다녀.”

부러움과 질시로 가득했던 이방인들의 얼굴에 미묘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비웃음이 되었다.

“용기병이래, 큭.”

“근데 용이 없다잖아.”

주변의 조롱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들리는 건 교관의 목소리뿐이었다.

“가끔 이렇게 이름은 거창한데 실속은 없는 병과가 있지. 안타깝지만 그게 자네의 경우야.”

교관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속을 후벼 팠다.

“용기병, 용기병. 그럼 기병 병과로 분류해야겠군. 차라리 기사였으면 중급은 됐을 텐데. 쯧.”

“그, 그럼?”

떨리는 심정으로 물으니 교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급!”

“왜! 왜! 요정도 있고 다 있는데 용만 없어!”

“그걸 왜 나한테 따져!”

억울한 심정에 외쳐보았지만, 교관의 구박만 받았을 뿐이다.

“어쨌건 자네도 지금부터 훈련 열외야.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대기하고 있도록.”

**

병과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활용 가능한 스킬의 유무였다. 그렇다고 해서 하급 병과에 속한 이들이 스킬을 지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스킬이라는 것이 일반인들도 노력을 하면 이룰 수 있는 그저 그런 것들뿐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그런 하급 병과다 보니 그 대우가 중급 이상의 병과로 전직한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작위 수여도 없고 특별한 혜택도 없다. 위안이라면 최소한 일반 병사들보다는 처우가 좋다는 것뿐이다. 대단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족을 하기에도 불만을 표하기에도 딱 애매한 정도의 대우였다.

임지로 향하는 길에 주어진 조잡한 수레 역시 왕국이 하급 병과의 이방인들에게 보인 애매한 배려들 중 하나였다.

“끙. 엉덩이 아파 죽겠네.”

“3주는 가야 한다는데 이거라도 얻어 타고 가는 게 어디예요.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그나마 조잡한 수레나마 얻어 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어느 넉살 좋은 사내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수레 안에 다닥다닥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다 보니 싫어도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다. 내친김에 누군가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

“아, 반갑습니다. 훈련소에서는 매일 보던 얼굴들인데 이렇게 이야기 해보는 건 처음이네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들이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보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끙. 훈련 끝나면 곯아떨어지기 바빴으니까요.”

온갖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자라온 현대인들이 견뎌내기에는 훈련의 강도가 너무나 강했다. 주변을 돌아보기는커녕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고, 교관들도 딱히 전우애를 강조하거나 유대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이름이 뭐예요? 저는 강정태라고, 나이는 스물여덟, 이쪽으로 오기 전엔 회사 다녔어요. 여기서는 검병으로 전직했고요.”

이제라도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왔으니 다행이라며 강정태라 이름을 밝힌 사내가 물꼬를 텄다.

“저보다 형님이시네요. 저는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하다가 갑자기 이쪽으로 끌려왔어요. 병과는 궁수고요. 스물다섯이에요.”

“아, 저는 박수홍이라고 학생이었고 지금은 방패병이요. 나이는 제가 제일 어리네요. 스물하나거든요.”

처음으로 꺼낸 저쪽 세상의 이야기, 금세 신이 나서 자기가 뭘 하다 왔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엄마가 찾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훈련에 쫓기느라 잊고 있었던 아픔이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왜 이곳에 자신들이 오게 된 것인지, 또 돌아가는 방법은 있는 것인지, 침묵 속에서 답 없는 의문이 오고 갔다.

“나중에야 방법을 찾더라도 지금은 일단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버텨보자고요.”

처음에 이야기를 꺼냈던 낙천적인 사내, 강정태가 애써 분위기를 돌렸다. 다른 이들도 고민해봐야 답도 안 나오는 문제로 괜스레 침울해 있기는 싫었던지라 모르는 척 그 말을 받았다.

“그쪽은요?”

한창 떠들어대던 이들이 이번에는 김선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아. 김선혁입니다. 나이는 스물넷, 말년 휴가 중에...”

그의 말에 이방인들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한참만에 입을 연 그들의 얼굴에 연민의 감정이 한가득이었다.

“아이고. 재수도 없지. 군대에서 그렇게 뺑이 치다 와서 여기서 또...”

“진짜 불쌍하다...”

김선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콕 짚어 아픈 부분을 찌르니, 새삼 자신의 불운에 욕이 나올 지경이다.

“끙. 힘내요. 그래서 병과는 뭐예요?”

아무래도 병과에 따라 흩어지고 뭉치게 되니 이방인들 사이에 가장 관심사는 전직 병과였다. 김선혁은 그들의 질문에 부담스러운 얼굴을 해보였다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용기병이요.”

“아...”

요새 내에서 그의 일화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그가 각성 시에 보였던 임팩트가 대단했기도 했고, 특별하기도 했다.

“그 용기병이 선혁씨였구나...”

“힘내요. 어차피 여기 모인 사람 다 하급인데, 용기병이면 어떻고 용가리면 어때요.”

우려와는 다르게 요새에서 받았던 조롱은 없었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부 하급으로 분류된 이들, 굳이 자신들끼리도 누구를 비웃고 말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혹시 알아요? 뭔가 숨겨진 능력이 있을지.”

역시나 강정태는 긍정적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이번에도 용케 좋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야 만다.

“진짜, 그랬으면 좋겠네요.”

김선혁은 피식 웃었다. 동병상련이라고, 같은 처지의 이들과 있으니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말하자면 뭐, 히든 클래스? 그런 거 있잖아요.”

“꼭 게임 같네요.”

“게임이랑 다를 거 없죠! 스테이터스도 있고 스킬도 있고 클래스도 있고!”

비록 캐릭터를 새로 키우지도, 부활의 혜택을 누릴 수도 없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이 처한 상황은 게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듣자하니 왕국에서도 이런 특이한 능력 덕에 이방인들을 따로 관리하는 것이라 했다.

“뭐, 마법도 있고 정령도 있는 세상인데 게임 능력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긴 하죠.”

“맞아요! 여긴 뭐 없는 게 없더만.”

“용만 없죠...”

김선혁의 말에 사람들이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