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전투의 끝
무수한 죽음의 형상이 가지각색의 공격으로 러셀을 덮쳐왔다. 위와 아래,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든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다채롭기까지 하다.
러셀은 질주하는 크라이의 귀나 목을 치지 않기 위해 신경쓰며 팔을 휘둘렀다.
길쭉한 팔과 손에 들린 크고 긴 대검의 길이가 합쳐져 거진 4미터가 넘는 반경이 지워졌다.
반으로 잘린 팔과 몸통, 무기가 우수수 떨어지는 가운데, 러셀은 크라이의 목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고생했다. 이제 쉬어라.”
동시에 러셀은 안장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그 충격으로 잠시 네 다리를 휘청이긴 했지만, 흑마는 속력을 낮추며 왼쪽으로 튼 다음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높이 뜬 허공에서 러셀의 시야가 확장했다. 맹금류가 가진 시야 이상의 풍경을 눈에 담은 그에게 아래는 벌레가 바글거리는 통처럼 보였다.
희거나 회색의 뼈와 거죽을 지닌 언데드들이 높이 떠 있는 러셀을 보며 턱을 딱딱거리거나 창을 던져 날렸다.
날아오는 화살과 창, 드물게 검이나 도끼 따위를 대검으로 팅팅 튕겨내던 러셀이 대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가 끌어올린 마력이 유형화되며 공기가 흔들렸다. 동시에 저 먼 뒤에서 달려오고 있던 아엘라시스가 쏘아낸 푸른 마력이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그러자 별빛도 달빛도 숨어버린 새카만 하늘에서 섬광이 번뜩이며 천둥소리가 우르르 들렸다.
어느새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먹구름이었던 것이다. 높은 습기와 응결된 빗방울을 가득 머금은 먹구름은 아엘라시스가 쏜 마력을 발화점으로 푸르게 타올랐다.
빛으로 만들어진 뿌리가 거꾸로 자라는 것 같은 빛이 먹구름속에서 꿈틀대다가 거대한 줄기를 아래로 쏘아냈다.
콰르릉!
커다란 벼락이 쳤다. 사위가 희게 탈색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낙뢰였다.
그 푸른 낙뢰는 정확하게 한 지점으로 빨리듯이 날아갔다. 묵색의 대검을 높이 들고 떠 있는 러셀을 향해서였다.
“저건······!”
뒤에서 함께 달리던 유리아가 감탄성을 토했다. 지금 그녀의 망막에 새겨지고 있는 모습은 몇 년 전 드넓은 평야에서 봤던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칼리스덴에서 용족과 싸우고 있는 러셀을 돕기 위해 썼던 낙뢰를 그가 도리어 흡수해서 공격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낙뢰는 차원이 달랐다. 신이 죽음이 만연한 지상을 벌하기 위해 떨어뜨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컸고, 담긴 마력 또한 무시무시했다.
푸른빛의 낙뢰가 검에 떨어지자 러셀의 몸 주위로 지렁이 같은 전격의 회오리가 휘돌았다.
전격에 횝싸여 있던 러셀이 양손으로 대검을 붙잡으며 수직으로 내리쳤다.
콰과과과광!
대검의 궤적에 따라 전격의 반월이 지상을 두 쪽으로 갈랐다. 갈라진 건 대지뿐만이 아니었다.
수천의 언데드가 그 한 번의 칼질에 박살나며 소멸했다. 순식간에 협곡의 끝까지 이어지는 길이 생길 정도였다.
“찾았다.”
러셀이 눈을 반짝였다. 언데드로 빽빽이 차 있었던 협곡이 뚫리자, 그 너머에 떠 있는 부유성이 보였다.
마름모꼴의 수정을 뼈로 된 거대한 손과 팔이 붙잡고 그 위로 회색빛의 성채가 세워져 있는 부유성이었다.
거리가 아직 수백미터는 남아 있었지만 러셀은 그 성을 두르고 있는 결계를 꿰뚫고 그 안의 성주를 바라보았다.
닫힌 성채의 대문을 넘어 시야가 파고들자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회랑과 대전이, 그리고 그 끝의 권좌에 앉아있는 해골이 보였다.
***
청동색의 갑옷을 입은 채 두개골만을 내놓고 있는 퀄라드 움베르토가 시커먼 눈구멍에서 녹색의 안광을 피어올렸다.
“뭐냐? 이 시선은? 어디서 보고 있는 거지?”
다시 살아난 리치, 퀄라드가 지팡이를 짚은 채 벌떡 일어섰다.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마력이 조립되며 원형의 거울을 만들고 그 안의 풍경을 보였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는 망자 군세의 저편에서 창끝처럼 날카롭게 밀고 들어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이게 네놈이 말한 그 전사와 떨거지들인가?”
퀄레드의 물음에 어둠 속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걸어나왔다.
“······그래. 사사건건 내 계획을 방해한 놈들이지. 그리운 얼굴도 있군.”
검은 로브의 걸음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긴 회랑으로 걸어나가는 검은 로브를 보며 퀄라드가 지팡이를 들었다.
“여기서 다 끝을 보려고 하는 건가?”
“운명의 끝이라는 게 때나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겠지. 이 정도면 충분히 미래를 판가름하기에 좋은 곳인 것 같군.”
“알아서 하시게. 네놈과 내가 묶여있다는 걸 잊지 말고.”
검은 로브는 대꾸하지 않고 대전을 나섰다. 점차 멀어지는 존재감을 느끼며 퀄라드는 지팡이를 내렸다.
그러자 거울 속의 장면이 커지면서 어느새 부유성 바로 앞까지 다가온 선두의 남자가 확대되었다.
자색의 안광을 빛내며 서 있는 대검을 든 전사는 퀄라드의 시선이 보인다는 것처럼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전사가 씩 웃으며 입가를 움직였다.
그 목소리까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퀄라드는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목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해골 바가지.
헛웃음을 지은 퀄레드가 지팡이를 들었다가 내려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성채가 진동하더니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건방진 놈이로군.”
가득 차오른 마력이 진동하는 성채를 넘어 대기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바깥에 펼쳐져 있던 방어막과 결계가 벗겨지며 모습을 감추고 있던 부유성 암라스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 성채에서 무수한 숫자의 뼈 날개를 지닌 와이번과 거기에 탄 해골기사들이 창을 휘두르며 날아올랐다.
***
“세상의 균형은 여기서 판가름 나리라.”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던 검은 로브가 두 손을 들어올렸다. 검정색의 망토와는 어울리지 않는 흰 피부의 손.
그 손가락이 마치 운율을 두드리듯 허공을 휘젓자, 광대한 어둠이 퍼져나갔다.
“허.”
신셩력을 담은 검으로 수십의 언데드를 불태워 소멸시킨 제스가 입을 벌렸다.
분명 밤의 시간대임에도 그 어둠은 구별할 수 있었다. 옆에서 엘레노아 또한 손을 늘어뜨리며 눈을 크게 떴다.
“신이시여.”
황금빛의 성력을 담아 반짝이는 눈은 사악한 흑마력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 짙은 어둠이 분명한 실체를 이루며 거인의 몸을 이루기 시작했다. 연기처럼 일렁이던 몸은 매끈한 광택과 질감의 단단한 가죽이 되었다.
그러나 머리통은 안개처럼 제대로 된 형상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 일렁이는 머리의 중심에서 두 개의 붉은 안광이 사위를 굽어보았다.
그아아아아아-!
거인의 포효에 설산이 떨리고 절벽이 주저앉았다. 사위를 요동치게 만드는 존재감과 넓게 퍼지는 마력이 지상을 짓눌렀다.
무형의 충격파가 반구형으로 터져 나오자 협곡에 가득한 언데드 수천이 그 자리에서 펑펑 부서졌다.
그 모습을 발견한 엘레노아가 곧장 기도문을 외우며 황금빛의 방어막을 만들었다.
“이리 모여요!”
지체없이 모인 사람과 말을 감사며 방어막이 쳐지고, 그 위를 무형의 충격파가 두드렸다.
“큭······!”
쭉 내민 손과 팔을 떨며 엘레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신성 방어막을 불안하게 쳐다보던 렉시가 곡도를 휘둘러 핏물을 털었다.
“저건 뭐야? 저게 죽음의 왕인가?”
칼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전혀 다른 흑마력이야. 저건 예전에 이계종의 나무를 불러내 부렸던 검은 로브의 마력과 더 비슷하구나. 예전보다 더 강해지긴 했지만.”
“그럼 저놈은 왜 여기서 리치랑 지랄인거야? 한통속이었나?”
제스가 암울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지요.”
“용이여. 명을 내려주십시오.”
“가만히 있어. 내 친구들 지켜주면 돼.”
“알겠습니다.”
검은 머리의 여자 용아병이 아엘라시스에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양날 도끼를 힘있게 잡았다.
매끈한 곡선의 전신 갑주와 투구를 쓰고 원형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유리아가 불안한 목소리를 흘렸다.
“이거 꼭 동화책의 마왕이라도 잡는 분위가 같네요. 두근두근하는데요.”
“어? 너 원래 말투가 그랬었나?”
렉시의 지적에 유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요? 여기에 다른 부관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목소리 낮추고 위압적으로 말하는 거 엄청 피곤하다고요.”
“잡담은 그만. 이제 온다.”
칼리아의 경고와 함께 충격파가 멎었다. 남은 건 한 줌도 안 되는 언데드 무리와 저 앞에서 다가오는 검은 거인이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제스가 말했다.
“그런데 러셀 님은요?”
바로 그 순간. 절벽의 위에서 어둠을 백색으로 물들이는 번쩍임이 터져 나왔다.
아엘라시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네.”
***
하늘을 두 조각낼 법한 크기의 뇌전이 어둠의 거인의 어깨를 타고 내려가며 반대쪽 옆구리를 갈랐다.
그아아아아아-!
확실히 고통의 색이 베어든 비명을 지르며 어둠의 거인이 뒷걸음질쳤다.
매끈한 피부가 거칠게 갈라지며 어둠이 흩어지자 거인은 다급히 손으로 상처 부위를 감사며 어둠을 수복했다.
-너!
“그때보다 강해졌네. 어디서 기연이라도 잡수셨나?”
-죽어라!
상처를 수복한 거인이 괴성을 지르며 손바닥을 휘둘렀다. 산의 뺨도 후려칠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손이 절벽을 강타했다.
콰르르르릉!
절벽의 한축이 완전히 박살나며 큼직한 암석이 비산했다. 그 사이에서 러셀이 떨어지는 암석을 밟고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러셀을 향해 다시 팔을 휘두르려던 그때, 협곡의 중심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눈가를 손으로 막은 그때, 엄청난 충격이 어둠의 거인을 덮쳤다.
-크허억!
가까스로 넘어지는 것을 멈췄을 때, 어둠의 거인은 자신을 민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얀색의 비늘과 두 쌍의 뿔을 머리에 단 백룡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거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으로 화한 아엘라시스가 입을 쩍 벌렸다.
하얀 비늘을 타고 오른 마력이 한순간 백색으로 물들며 입에 모여들었다가 찬란한 섬광으로 화했다.
벼락과 냉기가 뒤섞인 그 브레스에 거인의 팔과 어깨가 얼었다가 그대로 박살 났다.
우반신이 거의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어둠의 거인은 생명체 같은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고통에 신음하며 떨거나 주저앉는 대신 왼쪽 팔을 휘둘렀다.
산맥의 멱살도 잡아챌 수 있을 손아귀가 아엘라시스의 비늘 덮인 긴 목을 부여잡고 밀어붙였다.
그아아아아아-!
카아아아아악-!
체고가 30미터는 넘는 거인과 용이 협곡 사이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사람 수백이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서 있어도 충분했을 협곡 사이가 꽉 들어찬 채 신음했다.
검은 연기가 일렁거리는 오른쪽 팔을 재생시킨 거인이 주먹을 날리자 아엘라시스는 왼손을 들어 막았다.
아엘라시스의 오른 주먹을 거인 또한 막자 그 상태로 대치가 이뤄졌다. 하지만 아엘라시스에게는 날개가 있었다.
그녀가 네 장의 날개를 펄럭이자 그 거대한 동체가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톤은 가볍게 넘길 몸이 떠오르는 모습은 누구라도 입을 쩍 벌리게 만들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순식간에 협곡 위로 떠오른 아엘라시스와 그녀의 손에 붙잡혀 있는 거인이었지만 워낙에 크기가 큰 덕분이지 그렇게 높이 올라가 있다는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절벽과 대지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아엘라시스가 다시 입을 벌렸다.
대기가 입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보일 정도로 광포하게 공기가 흔들리고, 하얀 비늘 위에 굵은 전격이 일어났다.
그러자 거인은 용의 팔을 잡고 있는 팔 대신 두 개의 다른 팔을 만들더니 수인을 맺었다.
거인의 손으로 직접 이뤄지는 수인. 그 내부의 검은 로브가 하는 수인에 맞춰 거인이 수인을 맺자 마력이 움직이며 등뒤로 검은색의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용의 입에서 응축된 하나의 덩어리가 일순간 폭발하며 전면으로 쏘아졌다. 모든 것을 얼렸다가 파괴시킬 파괴적인 냉기와 전격에 그 위의 먹구름이 동심원을 그리며 확 풀러났다.
코앞에서 그 숨결을 맞은 거인 또한 등뒤에서 입체적인 선을 그리던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하나의 면으로 그려져 있던 마법진은 바깥쪽의 둘레가 둥글게 휘어지면서 거인을 감싼 하나의 구체가 되었다.
용의 숨결이 구체를 강타하자 구체는 산산이 박살 났다. 그러나 그 깨진 파편 속에서 무수한 검은 연기가 수백 개의 촉수처럼 날아들어 용을 휘감았다.
끊임없이 입에서 전격을 토하는 용과 그런 용을 휘감은 채 꿈틀거리는 거대한 검은 연기 덩어리.
연기 덩어리는 숨결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도 촉수에 힘을 주었다.
암석이 두 개로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 촉수가 용의 날개와 다리를 꺾었다.
엄청난 고통에 용의 숨결이 멎었다. 둘은 나란히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는 검은 연기 덩어리가 점점 껍질이 벗겨지듯이 부서지다가 검은 가루가 되며 흩날렸다.
그 속에서 검은 로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침을 하듯이 허리를 들썩이자 짙게 드리워진 후드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때 곤두박질치기 직전 용의 몸에 빛무리가 어리더니 그 커다란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방에 가득한 빛무리 사이에서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엘라시스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훨훨 떨어졌다.
순간 검은 로브가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마력이 일어나 떨어지는 아엘라시스를 덮치기 위해 돌진했다.
검은 로브의 손에서 벗어난 마력은 순식간에 뱀의 형상이 되어 채찍처럼 뻗어나갔다.
붉은 안광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쩍 벌린 채 날아드는 뱀들은 수십 마리는 넘었다.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있던 아엘라시스가 날선 표정으로 그 뱀들을 보며 다른 손을 들어올렸을 때, 잔상을 그리며 무언가가 마력과 아엘라시스 사이로 파고들었다.
묵색의 대검과 흰 도끼가 공중에서 검은 선과 흰 선을 그렸다. 꿈틀거리는 수십의 두꺼운 뱀들이 일거에 잘려나가며 수백 개의 조각들을 흩뿌렸다.
검은 로브가 그런 러셀을 보며 노호성을 터트렸다.
“이놈! 언제까지!”
러셀은 대꾸하지 않고 왼팔을 어깨 뒤로 젖혔다. 근육에 힘을 주자 그의 팔이 부풀어 오르며 옷이 터질 듯 팽창했다.
훙 소리와 함께 하얀 빛살이 공간을 가르고 쏘아졌다. 빛의 원반이 된 하얀 도끼가 검은 로브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대경한 검은 로브가 당장 엄지와 검지를 마주 댄 채 삼각형을 그렸다. 그의 앞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방어막이 겹겹이 둘러졌다.
그러나 도끼는 다섯 겹의 방어막을 한방에 부순 뒤 검은 로브의 명치에 박혀들었다.
허공에서 고리형의 충격파가 터져 나오고 도끼를 맞은 검은 로브가 뒤로 쭉 날아가다가 부유성의 성벽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죽었겠는데······.”
아엘라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러셀이 고개를 저었다.
“고작 이 정도로 죽진 않을 걸.”
아엘라시스와 러셀이 절벽에 내려앉았다.
“다친 곳은?”
“괜찮아.”
아엘라시스는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한 팔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멀쩡한 것을 확인한 러셀이 고개를 돌렸다.
콰드드드득!
거센 힘의 격류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암라스에서 튀어나온 검은 로브가 흑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암라스가 움직였다. 그 커다란 회색빛의 성채가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에 가까웠다.
그 상공에 떠서 뼈로 된 날개를 펄럭이는 와이번과 그 기수들이 쏜살같이 하강했다.
촤라라랑!
맑고도 청명한 소리에 러셀의 시야가 돌려졌다. 처음 러셀의 벼락을 담은 검격에 절반이, 그리고 용과 거인의 격전에 대부분이 밟히거나 으깨저 소멸한 망자의 군세는 이제 수백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수만에서 수백으로 100분의 1가까이 줄어들긴 했지만 남은 언데드들 또한 웬만한 도시 정도는 무리없이 함락할 수 있을 위용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엘레노아와 제스를 위시하고, 피로 된 갑옷을 입은 채 길쭉할 혈창을 휘두르는 칼리아, 곡도를 귀신같이 다루는 렉시, 양날 도끼를 든 용아병과 초인의 반열에 들어선 유리아가 거센 공격을 퍼붓자 햇빛을 맞은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들을 보던 러셀은 다시 고개를 돌려 검은 로브와 부유성에 나온 작은 점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점은 청동색의 갑옷을 입은 해골이었다. 왼손에 우둘투둘한 지팡이를 든 그 해골은 여느 마법사처럼 로브를 입은 게 아니라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러셀은 그 해골이 리치임을 알아보았다.
“좋아. 쉽게 가자고.”
러셀과 리치 퀄레드 사이의 거리는 최소한 1킬로미터는 떨어진 거리였지만 리치는 러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러셀의 신형이 사라진 것과 검은 로브, 퀄레드의 모습이 허공에서 사라진 것은 동시였다.
셋 사이에 두고 있던 중심에서 거대한 충격과 함께 공기의 파랑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꽈아아아앙!
굉음과 진동에 멀리 있던 설산의 봉우리가 부르르 떨었다. 흰색의 눈구름을 띄웠던 봉우리는 곧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눈사태는 남의 일이라는 것처럼 러셀과 검은 로브, 해골은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네 육신의 자유를 빼앗노라.
리치의 속삭임과 함께 지팡이 끝에서 뿜어진 섬광이 러셀의 사지를 구속했다.
그가 움직이던 속도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자 검은 로브의 맹공이 뒤따랐다.
“분노에 몸을 맡겨라, 죽음에 순응하라!”
앞의 주문은 자신에게 거는 마법이었고 뒤의 주문은 즉사를 담은 언령이었다.
검은 로브의 전신에서 맹렬하게 타오른 불꽃이 신체의 움직임을 가속시키고 효율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마법사임에도 전사처럼 움직이는 검은 로브의 앞으로 죽음을 명하는 언령이 러셀의 심장에 다다랐다.
그러나 심장에 언령이 닿기 직전, 투명한 벽에 닿은 것처럼 주문이 멈췄다.
회색의 고리에 속박되어 있던 러셀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눈으로 검은 로브와 리치를 바라보았다.
“터져라.”
명징한 선언과 함께 의지가 일자 마력이 움직였다. 언령이 그 자리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를 구속하던 리치의 마법이 깨져나갔다.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대검이 빛살과도 같은 빠르기로 날아들어 검은 로브를 향했다.
꽝!
검은 불꽃에 휘감겨 마치 불의 정령과도 같은 모습을 취했던 검은 로브는 자신의 바로 앞 공간을 폭발시켜 대검을 막아냈다.
검은 로브를 지원하기 위해 퀄레드의 지팡이가 수십 번의 선을 그으며 어둠을 갈랐다.
공간에 날카로운 금이 그어지며 그 사이에서 수백의 날카로운 칼날이 손아귀의 형상을 그린 채 튀어나와 러셀을 갈아버리려 했다.
튕겨나간 대검을 회수한 러셀이 왼손을 뻗자 검은 로브를 날려버렸던 하얀 도끼가 지상에서 횡횡 되돌아와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하얀 외날 도끼에서 서리 폭풍이 불어닥치며 칼날 손을 얼어붙게 하고 대검에서 번쩍인 전격이 그 칼날들을 산산조각냈다.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러셀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시종일관 압도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마안이 뿜어내는 빛에 닿을 때마다 검은 로브의 몸이 우뚝 정지하고, 리치의 마법이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흔들리다가 구속력을 잃고 바스러졌다.
러셀이 지닌 마안을 알아본 리치가 경악성을 내뱉었다.
-이런 눈을 가진 존재가 있다니······?!
“방심하지 마라!”
검은 로브가 타박하는 것도 잠시, 그의 불꽃이 확장하며 공간을 살라먹었다.
러셀의 전면에서 모든 방위를 점하며 검은 불꽃이 달려들었다. 하나 같이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맹수의 형상을 가진 불꽃이 송곳니와 어금니를 번뜩이자 러셀의 손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파지지지직······!
의지를 받은 마력의 속성이 전격으로 화하고, 전격이 그의 온몸에 휘감겼다가 나선의 회오리를 그리며 오른손의 대검을 감쌌다.
쉬아아아악!
새파란 전광이 그대로 허공을 내달리며 불꽃을 꿰뚫었다.
본능적으로 늦었다는 것을 직감한 검은 로브는 두 손을 합장했다. 그리고 즉시 온몸에서 어둠을 내뿜으며 강력한 반동을 일으켰다.
콰르르르릉!
전격을 전력으로 막고 있던 검은 로브를 돕기 위해 물러섰던 퀄레드가 허공을 격하며 날아들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위에 사기가 어리자 거검이 그려진다. 회색의 거검이었지만 온전히 사악한 기운으로 이뤄진 무게 없는 검이었기에, 그것이 휘둘러지는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러셀의 왼손에 들린 도끼가 그의 손을 떠나 퀄레드의 거검과 부딪혔다.
푸화하하악!
허공에서 터져 나온 새하얀 서리의 폭풍이 셋의 거리를 순식간에 몇 백 미터 이상으로 벌려놓았다.
전신에서 하얗고 검은 연기를 풀풀 피워대는 두 개의 점을 응시하던 러셀이 씩 웃었다.
“후달리냐? 안 덤비고 뭣들 하냐.”
그의 도발에 검은 로브의 전신에서 마력이 거칠게 타올랐다. 반면 리치의 주위로는 사기가 가라앉으며 허공이 무거워졌다.
동시에 러셀 또한 끌어모았던 마력을 모두 양손에 담았다.
우우우우웅!
자색으로 번쩍이는 빛의 광선을 양손에 움켜쥔 러셀과 검은 로브, 리치가 교차했다.
-!
소리로 표현될 수 없는 굉음이 천지를 울리며 뻗어나갔다.
마치 은하수가 내려온 것처럼 아름다운 빛의 궤적이 하늘과 지상을 잇는 하나의 선이 되었다.
선이 내리꽂힌 지상의 일대가 통째로 주저앉았았다. 거센 충격파에 휘말린 파편들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엄청난 힘에 떠밀린 파편들은 사방을 갈아엎으며 쏘아졌고 절벽을 무너뜨렸다.
쿠구구구구······
부유성 암라스가 굉음을 내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지상으로 떨어진 선은 한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았다.
검은 로브의 신형이 움푹 꺼지며 대지에 파고들었다.
청동색 갑옷을 입은 리치가 지팡이를 검처럼 휘둘렀지만 러셀의 주먹질에 산산이 쪼개졌다.
대지가 가라앉으며 광범위한 지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졀벽은 이미 옛적에 무너졌고, 남은 것은 거대한 공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