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죽음의 왕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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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케오니트라가 지어진 위치는 해가 뜰 때 그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위치에 지어져 있었다.
깎아지를 듯 높이 솟아있는 설산은 보기와는 달리 꽤 먼 거리에 있었지만 원근감의 착각 때문에 보기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후의 햇살은 이제 노을빛이 되었다. 사방이 붉다. 성당의 오른쪽 위로 솟아있는 설산의 경사면에서 반사하는 노을빛이 사방을 붉은빛과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반면 절벽과 협곡은 성당으로 향하는 길의 바로 아래나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위로 곡선을 그리며 드리워져 있는 절벽의 아래는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그늘진 곳이 많았다.
성당의 흉벽에서 절벽 아래의 그늘진 곳까지 육안으로 보기에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보이기는 했다.
눈에 마력을 집중하자 그 꾸물거리는 것들이 크게 다가왔다. 흐릿한 회색의 아지랑이가 절벽 아랫부분과 바닥을 온통 뒤덮어 일종의 결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의 눈으로도 대략적인 윤곽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결계. 마력을 그저 쏟아붓는 것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결계와 주문에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가 만들어낸 것으로 보였다.
아마 떠다니는 성의 주인이라는 놈이 해놓은 짓일 것이다. 그런 마법사가 왜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망자 군세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던가, 아니면 성을 나올 수 없는 사정이 있던가.
칼리아와 엘레노아는 그 질문에 후자가 조금 더 높은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십만이나 되는 시체를 한꺼번에 일으키는 것과 그걸 유지한 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건 다른 문제다.
‘내가 그런 수준의 강령술사라면 그렇게 군세를 이끌고 다니진 않았을 거다. 오히려 소수의 아주 강력한 언데드로 이뤄진 정예 부대만 가지고 일점 집중해서 도시를 거꾸러뜨린 후, 그 도시의 시민들을 모두 언데드로 화하는 저주를 뿌리겠지. 솔직히 이 정도 수준의 시체 병력을 전부 데리고 다닌다는 건 득보다 실이 크다. 마력의 소모도 그렇고, 유지력도 그렇고.’
‘하지만 뭔가 조건이 붙어있거나,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또 다를 겁니다. 최대한 많은 숫자의 죽음을 양산해야만 하는······.’
‘관건은 그 떠다니는 성이 어디에 있느냐다. 성당으로 향해있는 협곡이 몇 번 꺾이는 곳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칼리아 님은 죽음의 군주를 직접 죽여야 한다고 보시는 겁니까?’
‘문제가 단순할수록 답 또한 단순한 법이다. 그리고 답은 언제나 문제의 바로 옆에 있지.’
‘어, 일단 그 문제를 돌파하는 것부터가 큰일일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번 작전이 잘 처리되면 장애물은 많이 없어질 거다. 그 다음이 중요하지.’
‘이걸 작전이라고 할 수는 있는 줄은 몰랐군요.’
“괜찮은 풍경이죠?”
상념에 빠져 있던 러셀에게 목소리가 닿았다. 러셀이 고개를 돌리자 보다 말끔해진 행색의 유리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땀과 피, 썩은 살점 등에 더럽혀졌던 은발은 깨끗이 감고 나온 모양인지 옅은 향유 냄새가 났다. 여전히 갑옷을 착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흉갑과 견갑만 있을 뿐 나머지는 벗어두었다.
러셀의 곁에서 흉벽에 선 유리아가 말했다.
“이렇게 맑은 날씨도 오랜만이군요. 그동안은 계속 눈폭풍의 연속이었는데. 그 사제님은 잘 있나요?”
“엘레노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전에 이미 오빠인 하일른이 저주를 받아 죽음의 기사가 된 걸 짐작하고 있었고, 이전에도 망설이지 말라고 말해두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가족을 포기하는 건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러셀은 가만히 흉벽에 손을 짚고 선 유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과 싸우고 있다.
자신이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는 남동생이 황제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
“그녀가 그렇게 되어서 참 유감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인 걸까요?”
유리아는 멀찍이서 엘레노아와 하일른의 대화를 지켜보며 품었던 생각을 저도 모르게 말했다.
경멸과 두려움, 안도감과 불안함이 뒤섞인 그녀의 눈이 협곡 아래를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언젠가 미래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한 장면이었다.
그녀가 위에서 칼을 치켜들자 아래에 주저앉아 있는 남동생이 손을 뻗는 것. 그게 칼을 막으려는 몸짓인지, 그녀에게 건네는 화해의 손길인지는 그 순간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려운 판단보다 손에 쥐어진 칼은 쉬운 선택지였다. 내리쳐지는 칼날, 빙글 돌아가는 얼굴, 피부에 닿는 따뜻한 선혈. 혹은 그 반대의 장면도 가능하다. 유리아는 무장해제된 자신의 목에 떨어질 단두대의 칼날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황족의 최후는 비정하다. 아주 작은 불씨가 큰불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황위에 오른 황제는 형제자매의 숙청을 진행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고, 그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주먹을 꾹 쥔 유리아에게 러셀이 입을 열었다.
“생각만으로 한 사람의 선함이나 악함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전 생각합니다. 결국엔 행동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이니까요.”
“······좋은 위로군요.”
잠시 미소를 짓던 유리아가 곧 표정을 굳혔다.
“아까 제스라는 이름의 성기사에게 들었습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다시 저 망자의 군세를 치고 부유성에 있는 죽음의 왕을 죽이겠다고. 맞나요?”
유리아의 얼굴을 보던 러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할 모양이시군요.”
“당연하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번에 소멸한 언데드들이 아무리 많아 봐야 5만도 되지 않을 텐데, 남은 군대를 향해 무작정 돌격한다니 말이 안 되는-”
“그럼 계속 이렇게 소모전으로 가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겁니까, 황녀님?”
러셀의 말에 유리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가 손으로 흉벽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단단해 보였던 벽돌이 그 손길에 바스라지더니 미세한 균열들이 생겼다.
유리아가 그 변화를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러셀이 말했다.
“성당이 이제까지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성벽과 건물 전체에 어려있던 신성력 덕분입니다. 하지만 보신 것처럼 벽 자체의 강도가 약해졌습니다. 시체들이 내뿜고 다니는 사기 때문이지요. 시간은 망자들의 편입니다. 우리는 먹고, 자야 하지만 시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지요. 지금 시체들이 절반이나 줄어든 지금이 가장 적기입니다. 하루만 더 시간이 주어지면 남은 절반만큼의 언데드를 소환해 진군해올 테죠. 소수정예로 가야 합니다.”
“······몇 명이나 가는 거죠?”
“일단 저와 일행은 모두 갑니다.”
유리아는 러셀의 일행 면면을 떠올렸다. 검붉은 머리카락에 선명하고 짙은 이목구비를 지닌 미인-칼리아-와 분홍빛의 눈에 띄는 피부색에 귀가 길쭉한 흑요정-렉시-, 갈색 더벅머리를 가진 청년 성기사-제스-와 엘레노아, 그리고 아엘라시스까지.
그들 중 이번에 새로 생겨난 사람에 생각이 미친 유리아가 질문했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거죠?”
러셀은 유리아가 누굴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른의 용아병들 중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용아병.
얼굴과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최후에 살아남은 그 용아병은 최초에 아엘라시스에게 말했던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 용아병이었다.
“살아남은 용아병은 보통 소환자의 명을 따른다고 하더군요. 아마 아엘라시스의 곁을 지킬 겁니다.”
“그럼 그 용아병까지 함께 가는 거군요. 성당 측에선 뭐라고 하던가요?”
“남은 성당 기사들과 사제들을 지원해주고 싶어 했지만······.”
러셀이 쓴웃음을 짓자 유리아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녀의 방문과 기적 같은 승리에 취한 건 알겠지만, 현실을 알아야겠죠. 남은 성당 기사들이 스물 밖에 안 되고 사제들도 그쯤 되는데 환자들은 수두룩하니. 아마 지원은 힘들테죠.”
“예. 그래서 저희만 갑니다.”
“언제 출발하는 거죠?”
“해가 지는 즉시. 그때쯤이면 몸을 추스른 언데드들이 다시 달려들 테니까.”
***
석양이 지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해가 천구를 가로지르는 길이가 짧은 북부는 더욱 그랬다.
북부의 해는 북동쪽에서 비스듬히 솟아올라 처연한 곡선을 그리고 북서쪽으로 진다.
동쪽에서부터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어둠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낮의 구름과 눈보라가 가렸을 때보다도 짙은 어둠이었다.
얼어버린 눈이 단단하게 굳어버린 대지 위에 수백 개의 발자국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가르르르르······.
끄아아아악
의미 없는 신음과 괴성. 성대도 없고 공기를 떨리게 만들 흉통도 없지만 죽음을 거부한 언데드들은 마음껏 소리를 내질렀다.
햇빛은 이제 비치지 않고 성당에 어린 신성력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밤중에도 환하게 빛나던 성벽 또한 그 빛을 잃고 거무튀튀한 색으로 잠겨 있었다.
꾸물거리며 나아가던 맨 앞줄의 좀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 앞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타가닥, 타가닥, 타가닥······.
말의 편자가 단단한 바닥을 박차며 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좀비는 그 한 개체만이 아니었다.
수천의 군대가 일렬로 오기에는 좁은 길의 형편 때문에 망자의 군세는 가늘고 기다란 줄이 되어 진군하고 있었다.
맨 앞줄의 시체들이 발견한 것은 한 무리의 인마였다. 빛의 유무에 시야 제한이 없는 좀비들의 희멀건 눈에 가장 선두의 인마가 들어왔다.
“키에-컥!”
경고와 동시에 달려들려던 좀비의 머리통이 번쩍 날아든 칼날에 산산이 부서졌다.
단말마와 함께 죽은 좀비가 그 시작이었다. 러셀이 소리 높여 외쳤다.
“덤벼라-!”
마력이 실린 거대한 목소리가 좌우의 협곡에 반사되며 웅장한 울림을 자아냈다.
동시에 왼쪽 뒤편에서 달려오던 엘레노아가 광휘를 터트렸다.
“태양이 이곳에 임하니, 그림자는 흩어지리라!”
말을 달리게 했을 때부터 시작된 기도문의 마지막 선언과 함께 정말 태양이 어두운 협곡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금빛의 커다란 광구가 떠오르자 순식간에 어둠이 밀려나며 그 안에 들어있던 수천의 언데드들이 드러났다.
그 눈부신 광채에 직격당한 언데드들이 그대로 불타오르며 재가 되고, 사방에 재가 섞인 눈구름이 일어났다.
잡졸 언데드 수천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 사라지자 남은 건 성력을 몸으로 버틸 수 있을 만큼 강한 상위 언데드들이었다.
거대한 덩치에 사기를 줄줄 뿜어대는 구울과 양손에 흉악한 날붙이를 든 드라우거가 고함을 지르며 쿵쿵 달려왔다.
한순간에 재가 되어 풀썩 주저앉은 잿더미 사이를 8기의 인마가 질주했다. 그 가득 차 있던 공간이 휑해진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흐아아압!”
제스가 신성력을 끌어올려 검에 휘감았다. 그를 향해 드라우거의 거대한 망치가 떨어졌다.
떵- 하는 소리와 함께 망치를 흘려낸 검이 부르르 떨고, 간신히 칼자루를 놓치지 않은 제스가 이를 악물며 팔을 내질렀다.
“카아아아악!”
명치가 찔린 드라우거가 몸부림을 칠 때 엘레노아가 물질화 시킨 신성력의 철퇴가 드라우거의 머리를 부쉈다.
칼리아는 온몸에 피로 만든 갑주를 두른 다음 다루고 있는 말머리에 자신의 왼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혈기가 그대로 마갑을 이루기 시작하더니 곧 육중한 마갑을 걸친 말과 기사가 자리했다.
칼리아의 오른손에서 길쭉한 혈창이 만들어지는 것과 동시에 구울 하나의 상체가 절단되어 쓰러졌다. 그 구울에서 뿜어진 핏물은 그대로 칼리아의 왼손에 모여들더니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전방을 횝쓸었다.
커다란 덩치의 흑곰이 덜렁거리는 시신경을 매단 채로 날카로운 이빨을 아엘라시스에게 들이밀었다. 아엘라시스가 짧게 주문을 외우자 순식간에 빙벽이 일어나 흑곰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곁에 있었던 용아병이 거대한 전투 도까를 휘둘러 곰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때 저 멀리서 우레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일행의 눈이 멈춘 곳에는 오거 한 마리가 거대한 몸을 돌진시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놀란 제스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우고, 엘레노아가 기도문을 외우며 방어막을 만들려는 순간에 자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오거의 오른쪽 어깨가 크게 잘려나가 공중을 돌다가 쿵, 떨어졌다.
오거가 비명 섞인 고함을 지르며 왼쪽 손을 휘둘렀을 때, 어둠에서 다시 검광이 번쩍였다.
길쭉한 칼날에 왼손의 손가락이 우수수 잘려나가고, 이어진 두 번의 검격에 팔꿈치와 상완이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러셀은 휘두른 칼날을 회수한 다음 숨을 내뱉었다. 하얀 숨결에 어둠이 지워졌다가 다시 검게 물들었다.
어느새 자색으로 번쩍이는 눈을 한 러셀이 크라이의 옆구리를 찼다.
이히히히힝!
눈앞에 수천의 시체들이 이빨과 흉흉한 눈동자를 빛내며 마주 달려들고 있었지만, 흑마는 주인을 향한 믿음을 전혀 잃지 않은 채 다리를 움직였다.
콰가닥, 콰가닥, 콰가닥!
편자에 짓밟힌 얼어붙은 땅이 깨지며 얼음 조각과 흙덩이를 튕겨 올렸다. 안장에 앉은 러셀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엘레노아가 띄워놓은 광구에 소멸되지 않은 언데드들은 아까보단 좀 더 다채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골 기사와 궁수, 창사, 거대한 망치를 든 채 굽은 허리를 가진 구울, 양손에 대검을 든 드라우거와 해골 군마를 탄 다른 둘라한들까지.
네 발로 걷거나 뛰어다니는 마수들이라면 어떤 식으로 공격해올지 가늠하기 어렵겠지만, 이 언데드들은 하나 같이 길쭉한 팔에 무시무시한 날붙이를 들고 있었다.
그 수십 개의 날붙이가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러셀의 정수리와 크라이의 정수리, 어깨, 가슴, 배를 노리고 베어 오거나 쏘아지거나 떨어지는 무끼들.
러셀은 단순하게 대응했다. 그가 좌에서 우로 나힐니르를 휘두르자 창과 검, 도끼가 박살나며 부서졌다.
두 번 휘두르자 세 놈의 허리가 쩍 갈라지며 걸쭉한 내장과 썩은 피를 울컥 쏟아냈다.
공간이 생겼고, 러셀은 그 앞으로 말을 달리게 했다.
수천의 언데드가 있음에도 이런 단순무식한 작전이 먹혀들어가는 이유. 그 이유를 러셀은 여지없이 증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