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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21화 (222/225)

221화 하일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건틀릿에 감싸인 그녀의 손에 하늘거리며 황금빛의 결정이 떨어졌다.

눈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차가운 촉감이 아니라 따스한 감각이 손바닥에 닿았다.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따뜻한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을 휘돌며 자잘한 부상과 중상을 치유했다.

그 가공할 치유력을 실감한 유리아가 시선을 돌려 금발의 여인, 엘레노아를 쳐다보았다.

“엄청난 힘이야······. 고작 한 명이서?”

“역대 가장 높은 신력을 허락받은 사제라고는 들었지만, 굉장하더라고. 그렇지?”

유리아의 곁에서 렉시 또한 감탄한 목소리를 냈다. 엘레노아로부터 뿜어져 올라간 광선은 쉬지 않고 먹구름을 몰아내는 중이었다.

성당의 사제들, 주교들 또한 며칠 동안 날씨를 바꿔놓은 이적을 행했지만 그건 100명이 넘는 인원과 성당이라는 특수한 건물, 그리고 여러 성물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성물들의 힘이 약해지고 사제들의 체력 또한 떨어져가자 순식간에 다시 눈폭풍이 쳐들어온 것이었는데, 엘레노아는 그것을 단신으로 물러가게 만든 것이다.

파아아아아앗······.

협곡 위의 구름은 어느새 수천 미터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만큼의 언데드들은 햇빛을 받자 타올라 정화되었다.

사기가 강력한 상위 언데드들은 검은 안개로 몸을 둘러 햇빛을 피하며 물러나고 있었다.

곧 검은 안개를 뭉클거리며 뿜어내고 있던 깃발까지 후퇴한 언데드들은 깃발을 회수한 다음 협곡의 그림자 아래로 숨어버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곧 한쪽으로 향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누구보다 짙은 검은 안개를 뒤집어 쓴 죽음의 기사와 대치하고 있는 러셀과, 서로 싸우기 시작한 용아병들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맞서 싸우고 있던 시체들이 햇빛과 엘레노아의 신성 파동에 횝쓸려 사라지자마자 용아병들은 곧장 원래 목적으로 회귀했다.

자격 증명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창과 도끼, 검과 방패가 살벌한 살기를 덧씌운 채로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반사되는 검광이 수십, 수백 번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했다.

남은 용아병들은 스물이 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빠르게 죽어 나자빠지는 용아병들이 있었다.

목이 잘리거나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꿰뚫리거나 사지가 잘린 채 몸통만 남은 남자, 여자가 털썩 바닥에 쓰러진다.

쿠우웅!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쪽으로 돌아갔다. 대치하고 있던 러셀과 죽음의 기사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었다.

“뭐, 뭐야? 어디로 갔어?”

“저기!”

고개를 두리번 거리던 병사들이 한쪽을 가리켰다.

전장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절벽이 구불지며 경사를 그리고 떨어진 암석들이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는 지형에서 커다란 흙먼지가 피워올랐다.

“러셀······!”

“섣불리 끼어들 생각하지마, 황녀. 사이에 끼어들었다간 죽을 거야.”

당장이라도 크라이의 안장에 올려타려 했던 유리아를 렉시가 만류했다. 그녀의 곁에 붉은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요정의 말이 옳다. 제국의 황녀라고 했느냐? 난 칼리아라고 한다. 러셀과 오래 다녔고, 그가 어떤 남자인지 또한 잘 알고 있지. 그를 믿는다면 지금은 남은 병사들을 추스리고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할 때다. 난 러셀보다는 그 죽음의 기사가 더 걱정이구나.”

“그 기사가 걱정이라고 말했습니까? 저런 괴물을 왜······?”

칼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 어딘지 모르게 동정과 슬픔이 어린 듯한 시선을 따라 유리아 또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광선을 꺼뜨린 엘레노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지친 모습이었지만 고개는 빳빳이 쳐들고 러셀과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

눈부신 햇살에 맞자 죽음의 기사가 크게 휘청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무릎이 닿은 지면으로부터 검은 안개가 촉수처럼 타고 올라오며 갑주에 스며들었다.

죽음의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났다.

크게 우그러진 오른쪽 옆구리의 갑옷이 빠르게 펴지더니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죽음의 기사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더니 장검을 쥐었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오른발을 뒤에 둔 죽음의 기사가 돌연 그 자리에서 훅 사라졌다.

그리고 돌연 러셀의 바로 머리 위 허공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죽음의 기사가 나타나 검을 내리쳤다.

콰앙!

벼락 같은 속도로 몸을 돌린 러셀이 대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며 공중의 검을 받아냈다.

아주 잠시 동안 아래와 위에서 가하는 힘에 의해 죽음의 기사가 공중에 머물렀다.

하지만 발을 딛고 있는 러셀과 달리 죽음의 기사에게는 한계가 명확했다.

쿠웅!

러셀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그가 디딘 바닥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발밑에서부터 올라온 반발력이 러셀의 검에서 폭발했다.

대검에 맞선 죽음의 기사 또한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난격을 내질렀다. 러셀의 눈으로도 다 재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죽음이 빗발치며 쏟아져 내렸다.

사방으로 화려한 불꽃이 흩날리며 땅과 하늘에서 공격이 맞교환되었다.

러셀의 검격을 흘려내며 공중에 머물렀던 것도 잠시, 대검을 쥐지 않은 러셀의 다른 손에서 일순 새하얀 도끼가 불쑥 솟구쳤다.

죽음의 기사가 미처 방어하기도 전에 마지막 서리가 기사의 왼쪽 다리를 강타했다.

쩌저저저적!

얼어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도끼가 지나간 궤적대로 얼어붙은 공기에서 서리가 우수수 떨어졌고 죽음의 기사는 왼쪽 다리가 통째로 얼어붙어 바닥에 쿵 떨어졌다.

하얀 석상처럼 굳어버린 다리 때문에 제대로 된 움직임을 취할 수 없어진 죽음의 기사를 향해 러셀의 대검이 떨어졌다.

단두대의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무자비한 빠르기로 떨어지는 대검은 단번에 갑주를 가르고 상체와 하체를 두 동강 낼 것 같았다.

콰아아앙!

순간 죽음의 기사로부터 가공할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내부로부터 뿜어져 나온 강력한 사기는 왼다리를 얼리고 있던 냉기를 부수고 뛰쳐 나와 회오리처럼 꼬챙이의 형상을 이루고, 쏘아졌다.

찰나에 찰나를 거듭한, 터져 나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기 힘들만큼 달려든 고속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꼬아진 철사의 끝처럼 날카로운 형상을 띈 채 러셀의 급소를 노렸다.

그러나 그 순간 러셀은 대검을 내려치는 동작에서 빠르게 손목을 돌려 검신을 앞에 세웠다.

떠더더더덩!

지면이 우르르 흔들리며 공기가 요동쳤다. 대검이 움직이는 경로마다 부딪친 사기의 응집체가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을 시커멓게 물들였다.

동시에 왼다리의 자유를 되찾은 죽음의 기사가 온몸에 회색의 사기를 두른 채 돌진했다.

검은 빛깔의 장검에 회색빛의 사기가 뭉쳐들어 커다란 검기가 형성되고, 휘둘러졌다.

회색의 잔영이 허공에 그려질 만큼 재빠른 일격에 러셀은 곧이곧대로 맞아주지 않았다.

수백 개의 응집체들을 튕겨냈음에도 러셀은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한발자국을 내딛은 다음, 눈을 떴다.

이미 한껏 달궈져 있던 마력 회로가 다시 한번 뜨겁게 요동치면서 마력을 펌프질하고, 그 끝이 러셀의 두 눈에 이르렀다.

그의 홍채에 자청색의 빛이 휘감기면서 안광을 내뿜었다. 동시에 언제나 마안에 덮여 씌워져 있던 제약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시야가 크게 격동하며 렌즈가 벗겨지는 것처럼 사위가 바뀌었다. 보다 선명한 마력의 흐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질감을 가지게 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어져 오는 기사의 검이 미래의 궤적을 그렸다.

인지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러셀이 움직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에 선이 그어진다. 묵색의 대검이 허공에 긋는 검은 실선이었다.

마치 심해속에 잠긴 것처럼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고개를 돌리는 것, 어깨를 뒤로 당긴 다음 팔을 휘젓는 것조차 막대한 중압감이 느껴진다.

시간을 강제로 잡아 늘린 것 같은 공간 속에서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은 공기 그 자체였다. 평범한 자들은 죽을 때까지 느끼기 어려운 압박감을 강제로 찢어 발기며 러셀의 대검이 움직였다.

콰득, 콰드드득!

죽음의 기사가 착용한 갑주가 하나 둘씩 부서져 나갔다. 막대한 충격과 힘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맹공에 죽음의 기사 또한 사력을 다했다.

발밑에서 쏘아져 올라온 검은 안개가 다시 꼬챙이처럼 나선을 그린 채 튀어 올라오고, 사기로 소환한 뼈로 이뤄진 벽과 창이 소환되며 러셀을 붙잡아 놓으려 했다.

어느새 그들의 전장은 시체들이 가득한 자리까지 옮겨졌다. 죽음의 기사가 발구름을 일으키자 사방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와 뼈 무더기가 진동하더니 그대로 폭발한다.

퍼퍼퍼퍼펑!

초록색의 불꽃이 솟구치면서 악취와 암석도 녹게 만드는 산성액이 뿌려진다.

우우우우우-!

대지에 녹아든 원념으로부터 강제로 뽑아낸 귀곡성이 러셀의 이성을 흔들려 뿜어진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러셀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번뜩이자 모든 공격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쩌어엉!

뼈로 만들어진 벽과 검, 창이 수백갈래로 갈라지며 조각이 되어 흩어지고, 강렬한 열기로 점철된 녹색의 불꽃은 냉기를 통해 억누른다.

러셀의 발밑에서 형성되어 그를 통째로 잡아 녹이려던 산성늪은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어 부서지고 박살났다.

소리로 이뤄진 정신계 공격은 아예 러셀의 귓전에도 닿지 못하고 스러졌다.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공세에 죽음의 기사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대응하기 위한 수단을 꺼내드는 즉시 분쇄하는 과격하고도 빠른 공격에 기사는 정처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조각조각나 부서지는 갑주의 틈에서 창백한 사람의 육신이 조금씩 드러난다.

양손의 도끼와 대검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휘두르면서도, 그 안의 육신은 상처가 나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만 건들여도 깨질 유리 세공푸을 다루듯 섬세하고 조율된 공격만을 퍼부어 갑주를 벗겨 나갔다.

그리고 죽음의 기사가 사방으로 흑마력을 퍼트리며 도주하려는 움직임을 취했을 때, 러셀의 눈이 다시 빛났다.

“잡았다.”

콰드드드드드!

러셀이 내딛은 왼쪽발부터 시작된 마력이 대지를 갈아엎으며 위로 타고 올라갔다.

마치 수십 개의 쟁기가 대지를 갈아 엎는 것처럼 땅을 파헤친 마력은 순식간에 죽음의 기사를 가운데에 두고 가둔 다음 조여들고.

파지지지직!

마력에 전격이 부여되면서 형체를 가지게 된 벼락의 채찍이 죽음의 기사를 옭아매고 사지를 붙들었다.

“······!”

찰나에 온몸이 전격의 채찍에 구속된 죽음의 기사가 온몸을 비틀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후, 사람 안 죽이고 제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군. 그것도 이런 놈을 상대로.”

사람이라면 단번에 숯덩이가 되고도 남았을 전격의 구속에도 죽음의 기사는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그 투구에 있었다. 기사의 외형은 처참했다.

각반과 복갑, 흉갑을 모두 박살내고 남은 건 견갑 일부와 완갑 약간 뿐. 남은 건 그 안에 착용하고 있는 내의와 검게 물든 옷 뿐이었다.

그 옷에서 희미한 사제복의 문양을 발견한 러셀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은 다음 앞으로 다가갔다.

치열하게 보였던 승부였지만 시종일관 러셀이 압도하고 궁지로 내몬 전투였다.

흑마력과 사기를 통한 다채로운 마법은 위협적이었지만 러셀에게 적중한 유효타는 하나도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의 기사가 다루는 흑마력과 사기는 러셀의 마안 앞에 완전히 알몸으로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 없는데, 그의 대검과 도끼는 마력의 결을 직접 노리고 유효타를 먹일 수 있으니.

마안을 통한 인지력의 상승과 강건한 육체의 결합, 방대한 마력과 쉽게 부서지지 않는 무기의 조화는 언데드의 최고봉 중 하나라는 죽음의 기사마저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대검과 도끼를 차례로 땅바닥에 꽂아넣은 러셀이 죽음의 기사의 머리를 붙잡았다.

유일하게 멀쩡하게 남은 갑주는 이제 이 투구 밖에 없었다. 몇 번 그가 대검으로 후려치기도 했으나 투구만큼은 어떤 손상도 입지 않은 채 머리와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그 안쪽에 비치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끝없는 심연과 비슷한 어둠과, 형형하게 빛나는 녹색 안광 뿐.

치지지지직!

투구에 손을 강력한 반발작용이 일어나면서 사기와 흑마력이 러셀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러셀은 마안을 더욱 빛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두리뭉실하게 보이던 사기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우우우웅!

러셀을 중심으로 터져나온 마력의 파동이 사방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가 투구를 잡은 그대로 손에 힘을 주자 손가락이 투구를 우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그러자 투구 그 자체로부터 처절한 비명이 뿜어졌다. 죽음의 기사의 발버둥이 심해졌지만, 기사의 목과 어깨, 팔과 손목을 붙잡고 있는 전격의 사슬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슈아아아아······!

러셀의 손이 천천히 투구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점 죽음의 기사의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완전히 투구를 벗겨낸 순간, 그 안에 들어있던 몸뚱이가 완전히 힘을 잃고 바닥에 축 늘어졌다.

러셀은 들어올린 투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관자놀이부터 뻗어 올라간 두 개의 뿔과 코, 입을 완전히 가리는 안면 가리개. 투구 자체에서 느껴지는 사기는 퇴색되지 않은 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듯 진동을 거듭했다.

-······! ······!

러셀은 귓전을 파고들어오는 속삭임을 듣다가 피식 웃고는 투구를 양손으로 잡았다.

“필요 없어, 고철 덩어리.”

쇳덩이가 강제로 찢겨지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투구가 반쪽으로 쩍 갈라졌다. 동시에 투구에 스며들어 있던 막대한 원념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러셀은 고개를 내렸다. 완전히 힘을 잃고 쓰러져 있는 하일른이 거기에 있었다.

탁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엘레노아와 제스가 달려와 하일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헉, 하일른 님······!”

“오라버니!”

하일른은 예전의 그 상당했던 덩치를 모두 잃고 앙상해져 있었다. 죽음의 기사로서 움직이고 있던 동력원을 모두 잃은 것이었다.

그때 하일른의 눈동자가 천천히 뜨였다.

“······그리운 얼굴들이 보이는데. 여러분들도 죽은 건가, 아니면 내가 아직 살아있는 건가?”

“살아계십니다! 하일른 님, 괜찮으십니까?”

“이럴 게 아니라, 치유를······.”

제스가 눈물을 쏟으며 안부를 묻는 사이 엘레노아가 두 손을 모아 하일른의 가슴팍에 올려놓은 다음 성력을 일으켰다.

하일른의 상체를 들여다보던 러셀이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의 눈과 하일른의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이오. 성기사 나리.”

“······그렇군요, 러셀 님.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이런 꼴로 뵙게 되어, 송구스럽기 그지없군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때 성력을 일으켜 하일른의 몸을 치유해가던 엘레노아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이럴 리가. 안 되는데, 왜······?”

“동생아. 다행히 루테온께서 날 긍휼이 여기신 모양이구나. 그분 곁으로 가기 전에 그리운 얼굴들을 모두 볼 수 있었으니.”

러셀은 하일른의 몸을 들여다보며 그가 얼마나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는지 확인했다. 너무 오랫동안 사기에 침식된 탓에 그의 몸은 이미 생자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괴사된 근육과 피부가 안쪽에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고, 심장은 제대로 뛰지 못했다. 기초적인 생명력이 아예 사라진 상태에서, 그나마 늦지 않게 투구를 벗겨낸 것이 지금의 상태였던 것이다.

“하, 하일른 님······.”

“제스. 처음에 네가 내 종자가 되었다고 들었을 땐 언제 어엿한 성기사로 만드나, 막막했다는 것이 첫 소감이었다는 걸 여기서 밝힌다. 하지만 지금의 네 모습은 더 없이 자랑스럽다. 자신을 떳떳이 여겨라. 넌 성기사다.”

제스를 보던 하일른은 곧 엘레노아를 보았다.

“엘레노아. 교단에서 인정받은 네가 성녀로서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졌을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오라비를 용서해다오. 네 인생을 위해 많은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자기 만족에 불과했던 것 같다. 신에 대한 믿음과 신실함은 별개로 두고, 네 인생에도 많은 관심을 두어라.”

엘레노아가 멀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마주 본 하일른이 마지막으로 러셀을 올려다보았다.

“교회의 어두움과 이면을 타고 넘어오는 수많은 악마들을 보며, 감히 이 세상이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의문을 품었던 적이 많았지.”

하일른의 몸이 천천히 조각나기 시작했다. 발끝과 손끝부터 시작된 부스러짐은 점차 빨라졌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났을 때 답을 얻었던 것 같군.”

“······.”

“당신이 있어서, 참 다행이오······.”

곧 하일른의 육신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무너졌다. 햇빛을 등지고 무릎 꿇은 제스와 엘레노아가 그 잿더미를 꾸욱 움켜쥐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한 러셀도 쉽게 답해줄 수는 없는 질문이었다.

다만 신이 존재하는 만큼, 하일른이 바라던 곳에 당도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러셀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 멀리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병사들과 사제들, 성당 기사들. 그리고 유리아와 렉시, 칼리아, 아엘라시스가 보였다.

한쪽에는 막 도끼로 용아병의 머리를 내려친 마지막 용아병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탄탄한 근육질의 벌거벗은 몸을 여지없이 내보인 용아병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모든 걸 보던 러셀은 고개를 내려 제스와 엘레노아에게 말했다.

“재를 챙겨가지. 성당 안쪽에 그를 비치할 수 있는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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