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죽음의 기사
수백의 시체들을 재로 만들어도 그 몆 배는 넘는 물량이 아직 남아 있었다.
사실 언데드라는 것은 보기에나 무섭고 꺼림칙한 것이지, 1대1로 상대할 때 크게 어려운 마물은 아니다.
심지가 굳센 청년이라면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해 일어난 좀비 하나 정도는 가볍게 이긴 다음 무용담을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되는 생존 본능과 죽음에 대한 불안, 두려움, 경계가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 대면할 때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는 것이 문제였다.
근육이나 제대로 된 신경계도 없는 해골, 썩은 살덩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보통 사기邪氣가 뭉쳐진 핵이다.
달리 코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것은 보통 머리나 명치쯤에 존재하고 그것을 부수면 시체는 힘을 잃고 쓰러졌다.
허나, 그럼에도, 시체들은 정말 끔찍스러울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바로 그 물량이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쾅!
무너진 성문과 쌓인 돌 더미를 넘어온 드라우거가 도끼를 내리쳤다.
큼직한 반월형의 칼날이 병사 하나를 두 쪽으로 갈랐다. 매끈한 절단면에서 반으로 잘린 뇌와 두개골, 빗장뼈와 내장이 그대로 보였다.
반으로 갈라진 병사가 바닥에 채 쓰러지기도 전에 커다란 덩치의 드라우거는 고함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악-!
“흐억······!”
“큽!”
바로 앞에서 처참하게 죽은 동료의 모습에 멈춰 서 있던 병사들은 그 사기가 가득 깃든 고함을 정면으로 받자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들의 눈과 코, 귀에서 붉은 핏방울이 주륵 흐르더니 초점이 사라진 동공이 위로 홱까닥 돌았다.
“끅, 이히흐히흐히!”
“아하하하하!”
미쳐버린 병사들이 간질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제자리에서 통통 뛰거나 바닥에 쓰러져 움찔거렸다. 몇몇은 칼을 마구 휘두르며 곁에 있던 병사를 베거나 찌르기도 했다.
감당 못 할 공포에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었다. 그 모습에 막 시체들을 향해 황금빛의 십자가를 내보이며 잿더미를 양산 중이던 성당 사제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삿된 존재여, 물러가라!”
그가 내민 십자가에 시체들이 주춤 물러서고, 하얀 침과 거품을 물던 병사들이 발작을 멈추고 초점이 되돌아왔다.
“물러서지 마라!”
병사들이 제정신을 되찾을 때 푸른 마력이 넘실거리는 장점으로 좀비 다섯의 머리를 갈라버린 기사가 외쳤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갈 곳은 악마의 밑이 아니라 루테온 님의 곁이다! 흐아압!”
자리를 박찬 기사가 드라우거의 정면으로 쏘아졌다. 마력으로 강화한 육체와 단단한 강철검이 드라우거의 도끼를 쳐내고 그 커다란 몸통에 상흔을 입혔다.
성당 사제가 얼굴에 가득 묻은 썩은 피를 훔쳐내고는 돌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가 두 손을 합장하며 기도문을 외웠다.
“높은 곳 태양의 영광을, 땅 위에 당신의 백성에게는 평화를, 주여 우리의 찬송과 감사를 드리니 태양의 영광 높이 받드니 오늘 이 자리에 가득한 삿된 연기와 유혹과 미망을 처단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젊은 사제의 기도문이 읊어질수록 바닥에서 황금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검은 안개가 그 아지랑이에 닿자 흠칫거리며 물러났고 시체들 또한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코에서 선혈을 흘리면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사제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 뒤편의 집 한 채가 부서지며 먼지를 토했다.
먼지와 눈발 사이에서 나온 것은 구울이었다. 무엇이 던진 것인지는 몰라도 성벽 바깥에서 구울이 날아와 안쪽에 떨어진 것이었다.
“캬아아아악!”
2미터는 되는 키에 기형적으로 긴 네 개의 팔다리, 회색빛의 단단한 가죽을 두른 괴물이 네 발로 질주하며 사제와 병사들의 배후를 덮쳤다.
반응할 틈은 없었다. 번뜩이며 쏘아져 온 길쭉한 네 개의 손톱이 한 점으로 모이며 기도하던 사제의 등을 찌르고 가슴을 관통하며 튀어나왔다.
고통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손톱을 더듬은 사제가 쿨럭, 하고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갈색의 총명했던 눈동자가 차츰 흐려지고, 힘이 빠지는 입술에서 마지막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태양의 찬란한 빛에 어둔 그림자는 걷혀 사라지고, 두려움은 용기로, 패배는 승리가 되니, 그 광명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더라······.”
실낱같은 기도문이 움직인 신성력이 죽은 사제의 몸을 빛내며 터져 나와 구울의 오른팔과 우반신을 향해 미끄러졌다.
“끄아아아아악!”
고통에 울부짖던 구울이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오른쪽 어깨를 잘라내고서야 하얀 불꽃이 꺼졌다.
외팔이가 된 구울이 분노로 번쩍거리는 회색 눈알을 굴리며 다리에 힘을 주려 할 때, 그 머리가 펑 하고 산산이 조각나며 박살 났다.
머리를 박살 내며 튀어나온 단검이 그대로 어떤 운 없는 벤시까지 관통하며 성벽 바깥으로 날아갔다.
구울의 시체가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그 뒤편에는 손을 뻗고 있는 유리아가 있었다.
성당 사제가 끔찍하게 죽었지만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그 죽음이 발화점이라도 된 것처럼 뜨거운 김을 토하며 시체들을 향해 달려갔다.
케트니오라 성당과 그 성당을 둘러싼 성벽이 가진 이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보통의 성이 가지고 있는 해자는 없었지만, 성당이 세워진 곳 자체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성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바위와 잘게 쪼개지고 모난 돌, 잘게 부스러진 모래로 가득한 경사진 비탈길을 올라야 하기에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것도 다반사였다.
일반적으로 공성을 하기 위해서는 수성을 하는 병력의 3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조차도 최소한의 손실을 계산했을 때 나온 말이다.
망자의 군대는 발리스타나 투석기, 공성추나 공성탑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어림잡아도 10만은 되어 보이는 시체의 군세를 상대하고 있는 성당의 병력은 1만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시체 군세가 가진 이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시체는 지치지 않았다.
강력한 힘이나 뛰어난 민첩성이 없는 해골들은 그렇기에 그 반동인 체력의 소모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방에 울리는 귀곡성만큼이나 사악한 영체들의 빙의 또한 커다란 문제였다.
그 시체들을 향해 얼마 남지 않은 성당 기사와 유리아의 기사, 그리고 사제, 병사들이 돌진했다.
방패로 시체를 밀쳐내고 넘어진 좀비의 머리와 가슴에 수십 개의 도끼와 칼이 떨어졌다.
눈과 코에서 피섞인 눈물과 코피를 흘리며 사제들이 신성력을 짜내었고, 성당 기사들이 신성력을 몸에 두른 다음 시체들을 향해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마력사용자들인 기사는 날랜 움직임과 발놀림으로 언데드의 머리를 밟고 으스러뜨리며 성벽의 문루와 능보로 향했다.
무너진 성문은 아직 그 잔해로 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하지만 좌우의 성벽보다 그 높이가 낮아진 건 사실이었다.
그 중심에 선 것은 유리아였다.
“흐아아압!”
양손으로 칼 손잡이를 쥔 그녀가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차가운 강철 검신을 타고 오른 빛의 속성력이 깃든 마력이 빛의 기둥처럼 솟아올랐다.
빛기둥을 쥔 유리아가 전면으로 팔을 휘둘렀다. 캄캄하지도 밝지도 않은 기묘한 빛무리와 그림자가 가득한 성의 낮은 부분에서 휘둘러진 빛기둥은 그대로 밀고 올라오던 시체 무리를 짓눌렀다.
콰아아앙!
빛이 폭발한다. 그 폭발하는 빛에는 파괴적인 위력의 마력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강력한 힘에 앞장서던 구울 두 마리와 드라우거 셋이 박살나 나뒹굴었다.
“와아아아!”
강한 지휘관의 존재는 휘하 장병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눈보라와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병사들은 칼과 창으로, 하다 못해 몸으로 좀비들을 밀어냈다.
끝도 없이 비탈길을 기어오르고 성곽을 기어오른 하얀 뼈마디들이 전쟁 망치와 도끼에 부서지며 아래로 그 잔해를 흩뿌렸다.
심호흡을 하며 과열된 몸과 머리를 식히던 유리아는 전세를 가늠했다.
수성전의 이점은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에게도 보편적이었다. 언데드들을 지휘하는 상위 언데드는 그리 많지 않았고, 그 큰 덩치와 몰라볼 수 없는 혐오스런 외관 덕분에 투창과 화살의 집중 사격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사제들의 체력은 한계를 넘어섰고, 몇 명의 사제들은 혼절해버렸다.
지금 성벽과 병사들에게 어려있는 신성력은 수명을 깎아가면서까지 기도를 올리고 있는 주교들과 사제들의 헌신에 연명되고 있다.
그녀는 절벽과 협곡의 틈 사이로 가느다랗게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세찬 눈보라와 휘날리는 그녀 자신의 머리카락 때문에 시야는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작은 손가락 마디만한 지평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물결 같은 시체들이 그득했다. 하얗고 썩은 머리통들, 너무 많다.
유리아의 마력 깃든 검이 검광을 그리며 떨어졌다.
끼야악!
검격의 궤적에 레이스 하나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조각나 흩어졌다.
그녀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손아귀에 피가 맺힐 정도로, 끈적해진 피가 딱지가 되어 굳을 때까지 휘둘렀던 검술이 허공에 새하얀 붓질을 그렸다.
하얀 빛을 휘감고 시체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유리아는 성기사보다도 더 성기사 같은 모습으로 언데드들을 부쉈다.
비록 성력이 아니라 마력이기에 재가 되어 소멸하지는 않았지만, 여느 성당 기사보다도 빠른 찌르기와 베기에 언데드들은 그대로 사기가 뭉쳐진 핵이 깨져 뼈 무더기가 되거나 썩은 살더미가 되어 무너졌다.
그런 유리아를 눈여겨 본 것은 아군뿐만이 아니었다. 넓게 퍼트린 마력을 통해 눈이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마저 감지하고 있던 그녀가 불현듯 벼락같이 움직이며 칼을 위로 들었다.
콰앙!
커다란 양날 도끼가 유리아의 올려치기에 타점이 빗겨가며 애꿎은 바닥을 후려쳤다. 부서진 돌조각이 비산하는 것을 갑옷으로 막아내며 유리아가 물러서려는 찰나, 뒤에서 쉬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뒤잴 것 없이 유리아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로 그녀의 등을 낫이 스치고 지나갔다.
쿠당탕!
한바퀴를 구르고 일어난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 없는 기사 두 마리가 각각 양날 도끼와 길쭉한 낫을 들고 서 있었다.
유리아는 씩 웃었다. 좀비와 시체들을 가장 많이, 정교하게 다룰 수 있는 둘라한을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이다.
“와봐라!”
함성을 내지른 그녀를 향해 전투 도끼와 낫이 달려들었다.
달려든 무기는 고작 두 자루였다. 이제까지 좀비와 해골 병사들이 휘두른 수십 개의 칼과 창날을 피하고 분쇄했을 때보다 압도적으로 적은 숫자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무수한 인파가 그녀를 향해 손을 휘두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손은 모두 죽음이었다.
시야를 까맣게 뒤덮은 둘라한의 공세 속에서 유리아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며 무기를 하나하나 쳐냈다.
턱을 쪼갤 듯이 올려 쳐오는 양날 도끼를 고개를 젖혀 피해내고 허리를 갈라오는 낫을 발로 차 밀어냈다.
위기는 수없이 찾아왔다. 미처 막지 못한 도끼가 왼쪽 어깨를 스쳤을 때는 그 괴력 탓에 몸이 반바퀴나 돌아버렸고, 그를 노린 낫이 아래를 낮게 베어왔다.
이를 악문 유리아가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낫을 쳐냈다.
깡!
맑은 쇳소리와 함께 떨어지던 유리아의 몸이 한 뼘이나 위로 치솟았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목전까지 닿은 죽음에게서 겨우 도망친 유리아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집착을 느꼈다. 터질 듯이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귀로 들으며 그녀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 회로를 타고 올라간 마력이 전신에 가득 깃들며 거인과 같은 힘을, 요정 같은 민첩함을, 난쟁이 같은 체력을 부여했다.
거인처럼 세지도, 요정처럼 재빠르지도, 난쟁이처럼 강철같은 체력도 없는 인간이 발버둥치고 발버둥쳐 얻어낸 기술의 정수.
그 극한이 유리아의 검끝에서 폭발했다.
쓰아아아악!
공기가 얇게 저며지면서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질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매끄럽게 칼날이 휘둘러졌다.
사선으로 그어지는 참격이 전투 도끼를 든 둘라한의 오른쪽 어깨를 깊이 파고 들어가 반대쪽 옆구리를 가르고 빠져나왔다.
동료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은 것을 깨달은 남은 둘라한이 뒤로 훌쩍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유리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닥에 발을 디딘 즉시 쏘아졌다.
길게 내뻗은 왼쪽 발을 축으로 그녀의 몸이 한 바퀴를 크게 회전했다. 양손으로 단단히 맞잡은 검이 그 반원을 함께 돌았다.
둘라한이 들고 있던 길쭉한 낫 자루를 거꾸로 들었다. 둥글게 휘어지는 낫의 반대쪽 칼날이 유리아의 검을 막기 위해 검붉게 번쩍였다.
쿠궁!
유리아가 딛고 있던 디딤발을 중심으로 지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 지면을 딛고 있던 둘라한의 다리가 일순 휘청하면서 균형을 잃었고.
힘을 가한 만큼 대지에서 전해져오는 반발력이 유리아의 무릎과 허리, 어깨를 타고 흘러 검에 이르렀다.
쩌어엉!
낫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둘라한의 허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통과 함께 수평으로 잘린 머리가 투둑, 떨어지고 뒤이어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뉜 둘라한이 바닥에 털푸덕 쓰러졌다.
“컥! 하악, 하악, 하악······!”
참았던 숨을 일거에 토해내며 유리아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온몸에서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
지이이- 하는 이명이 귀를 가득 매웠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유리아는 정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둘라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수백의 좀비 떼들이 갑자기 힘을 잃고 쓰러지거나 피아를 가리지 못하고 곁의 좀비에게 달려들었다.
전장의 한구석에서 난 소란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기에 성벽 바깥은 커다란 혼란에 빠져들었다.
흉벽과 겔러리, 문루 위에서 분투하고 있던 기사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몇 분일지 몇 초일지 재기 쉽지 않은 시간 동안 과열됐던 몸을 식힌 유리아는 마주 손을 흔들어주기 위해 팔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때 황녀 유리아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의식보다 먼저 무의식이 경고성을 발하고 있었다.
무의식이 요구하는 대로, 혹은 몸이 요구하는 대로 유리아는 뒤로 뒤로 몸을 날렸다.
턱, 하고 등이 뭔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경고성과는 반대로, 유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갑옷과 투구의 죽음의 기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투명한 그녀의 눈동자에 뒤로 당겨지는 죽음의 기사의 왼주먹이 보였다.
콰앙!
그녀가 그때 취할 수 있던 동작은 넓적한 검면으로 상체를 가리는 것이었다.
뒤로 날아가는 와중에 유리아는 자신의 검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콰드드드드, 콰앙!
“커헉.”
성벽에 그대로 부딪친 유리아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토해냈다.
붉은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내장이 진탕이 된 감각이 선명하게 그녀의 복부를 헤집고 있었다.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그녀는 벽을 짚으며 일어섰다.
저 앞에서 검은 안개를 발밑에 두고 연기를 망토처럼 두른 죽음의 기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리 크지 않은 소리임에도 발소리는 넓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시체들이 진군을 멈췄고, 성벽 위의 기사와 병사들 또한 고함이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죽는 건가? 아바마마의 죽음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못난 가족에게 제국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막지도 못하고?’
마치 대장전을 하는 것처럼 죽음의 기사와 유리아를 둘러싸고 시체들이 둥근 원호를 그렸다.
성벽 위에서 작게 탄식과 흐느낌이 들려왔다.
유리아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반절만 남은 검의 칼 손잡이가 쥐어졌다.
“하아······.”
하얗게 내뿜어지는 숨결을 바라보며 그녀는 반만 남은 칼을 들어 올렸다.
유리아는 문득 자신이 내뱉은 숨결이 천천히 흐트러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죽음의 기사가 달려들지 않았다. 죽음의 기사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유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낮은 구름에 닿아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높다란 오른편의 절벽 위에, 어두운 형체가 서 있었다.
눈보라와 먼 거리 탓에 아른거리는 그림자로만 보이던 그것은 언뜻 보면 아랫쪽의 먼 평원에서 산다는 반인반수, 켄타우로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그 그림자로부터 빛이 번쩍였다. 번쩍인 빛은 하나의 창이 되어 절벽 위에서 아래로 쏘아졌고, 그대로 죽음의 기사와 유리아의 사이에 꽂혔다.
콰아앙!
비산하는 돌과 모래가 갑옷에 부딪치며 팅팅 소리를 냈다.
유리아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아니라, 묵색의 거대한 칼임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죽음의 기사가 그 대검을 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죽음의 기사는 여전히 절벽을 보고 있었다.
그때 바그닥 바그닥 하는 소리와 함께 절벽 위에 있던 인마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말이나 사람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곤두박질쳐야 하는 경사나 다름없었지만 인마는 넘어지지도, 그대로 떨어지지도 않고 달리며 대검이 꽂힌 장소에 와서 섰다.
“어, 어······.”
유리아는 자신의 입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온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대검을 집어든 러셀이 뒤의 황녀를 보고는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