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안개 (2)
제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해결하러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한테 시비를 건 놈들이야 죽을 짓을 하긴 했지만, 이런 건달 무리를 통솔하는 대장 쯤 되는 인물이라면 좋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물론 제스가 생각하기에 좋게 넘어가는 방법이란 무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돈과 명예 또한 설득의 충분조건이지만, 눈앞에 있는 주먹은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제스가 알기에 러셀은 그 필요조건을 과하다 싶을 만큼 가진 사람이었다.
러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더군. 다른 놈들이 칼 들고 덤비길래 죽였고, 그랬더니 기사가 나왔지.”
“기사요? 제대로 된 기사라면······ 아니, 제가 멍청한 소리를 했군요.”
제스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된 기사라면 이런 건달이나 도적들을 규합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체는요? 저야 다행히 여관 주인이 도와주었다지만······.”
그때 계단에서 칼리아와 엘레노아, 아엘라시스가 내려왔다. 그들이 내려와 식탁에 앉자 마침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쟁반에 얹어져 있던 접시가 식탁 위에 보기 좋게 올려졌다.
“빨리
“그냥 두고 왔다. 알아서들 치우겠지.”
“거 참······.”
“지들이 고마운 줄 알면 치울 거다. 우리한테 뒤처리까지 바라는 건 도둑심보라고 생각하지 않나?”
“뭐 저도 세 번째로 들린 마을도 이 지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정말 어지간히 도적들이 날뛰고 있는 모양이군요. 치안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사람은 식물이 아니지.”
“렉시?”
제스가 렉시를 쳐다보았다. 렉시는 접시 위의 닭고기를 죽 뜯어 자기 접시에 올리며 말했다.
“겨울이 되면 나무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제스는 생각하다가 스튜가 담긴 접시를 끌어오며 간단히 답했다.
“······헐벗게 되지요. 풍성했던 나뭇잎은 울긋불긋해지다가 하나 둘 떨어져 낙엽이 되고, 나무는 앙상해지게 됩니다.”
“맞아. 나무는 그런 식으로 황량한 계절을 버텨내지. 그런데 왜 나뭇잎을 더 틔워서 햇빛을 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까? 추운 겨울에는 그런 식으로라도 더 햇빛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흠, 그랬다면 과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나무가 있었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지금 우리 곁에는 앙상한 나무밖에 없습니다.”
고기의 살점을 꼼꼼히 발라내 뼈를 접시 한 구석에 모아둔 렉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뭇잎을 더 많이 틔우는 쪽으로 힘을 쓰기보단 가지고 있던 나뭇잎을 모두 버리는 게 생존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본 거지. 겨울에 햇빛을 더 많이 받기는 힘드니까. 도덕성, 윤리는 겨울을 맞이한 나무가 떨어뜨리는 낙엽 같은 거야. 집도 없어지고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쉽게 난폭해질 수 있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 많지 않아. 배부름이면 충분해지지. 먹고 나서 생각하라는 말도 있잖아.”
오- 제스가 입을 모으며 감탄했다.
“참, 장수종 다운 좋은 말씀-켁!”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잠시 목을 부여잡은 제스가 캑캑거리며 기침하는 소동이 있었지만 곧 잊혀졌다.
식사를 마친 엘레노아가 입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치안이 점점 더 어지러워가고 있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더 가팔라지는군요. 어쩌면 나중에는 마을 전체가 도적 집단이 된 곳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빨리 해결해야 해요.”
“어떻게?”
러셀의 물음에 엘레노아가 푸른 눈을 반짝이며 그를 응시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황제의 부재입니다. 물론 황제가 있다 해서 세상의 문제 대부분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황제가 부재할 시 생기는 문제들은 해결이 가능하겠지요.”
“음.”
“러셀 님과 렉시 님이 잠깐 도와주시는 동안 저 또한 마을에 위치한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다행히 사제님이 계시더군요. 현재 황자는 자취를 감췄고 황녀는 페르거 평원에서의 승리 이후 몸을 추스른 다음 곧바로 북쪽의 망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올라갔다고 합니다.”
“발도 빠르군. 거리가 만만찮았을 텐데, 어떻게?”
“잘 닦인 제국의 관도 덕분이기도 했지만, 남아있는 모든 영주와 귀족들이 보급과 이동 수단을 마련해준 덕분입니다. 지금은 케오니트라 성당에서 수성을 하며 버티고 있다고 하더군요.”
“시체들은 얼마나 있다고 하던가?”
“정확하진 않지만······.”
엘레노아는 말끝을 흐렸다. 칼리아와 아엘라시스는 조용히 식사를 하며, 렉시는 뼈를 부러뜨려 날카로운 끝을 만든 이쑤시개로 이를 긁으며, 제스는 굳은 표정으로 엘레노아의 말을 기다렸다.
“10만은 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지나쳐 온 도시와 영지를 볼 때 그 이상이 아닌 게 이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게 아마 강령술사가 부릴 수 있는 한계가 그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마력의 부족이든, 지배력의 부족이든 한계가 있기에 늘리는 게 불가능한 게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언데드라는 특성상 병력의 손실과 보충, 그리고 보급은 무의미합니다.”
손실과 보충은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죽은 상대 병사가 다시 일어나면 되니까. 보급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시체는 먹거나 자지 않으니까.
군대이지만 군대가 가지는 특성은 모두 무시하는 불합리의 결정체. 그것이 제국의 북부를 유린하며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시체들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나?”
“아직까지는, 예. 그들은 그저 죽음을 생산하고 싶은 것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짓밟고 지나간 도시에서는 언데드와 마물만이 돌아다닌다고 하더군요.”
“그다지 재미없는 일을 하고 다니는군.”
제스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환한 등불이 가득한 여관 천장 아래 펼쳐진 지도는 간소화되어 있는 거리와 축척을 무시한 채 여러 지형지물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있는 장소와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큼, 그럼 대충 계산을 해보면······ 여기서 나흘은 더 달려야 할 겁니다. 중간에 산도 있고 계곡도 있기 때문에 돌아서 가게 된다면 더 걸릴 수도 있고요.”
“그럼 빨리 달려야겠군.”
***
유리아 휘페리온의 밤이 수십 개의 조각이 되어 찢어지며 그 사이로 아침이 들어왔다.
눈을 찌르는 섬광 탓에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싸 쥐고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일어나 앉았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몸 곳곳에서 보내오는 통증의 호소는 긴박했고 밤 중에 꾸었던 꿈의 잔재는 여전히 뇌속에서 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떤 꿈이었는지, 누가 나왔는지에 대한 기억은 초마다 흐려졌다. 더없이 선명했지만, 선명했다는 느낌만 있을 뿐 정작 그녀가 누구와 만났는지, 혹은 어디에 있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불쾌한 아침이다.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이 햇살이 아니라 때가 되면 켜지는 방안의 마력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
황녀가 밤을 보낸 곳은 빈말로라도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살풍경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침대와 탁자, 그 위에 놓인 대야, 단출한 벽을 가리기 위해 걸려있는 액자와 그림, 벽에 기대어져 있는 장검과 칼집, 전신갑옷으로 변모할 수 있는 간이 마법 흉갑까지.
우울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유리아는 자신의 왼손에 붕대가 감겨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풀자 상처는 모두 치료되어 있었다. 아주 희미한 흉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처가 치료되어 있고 몸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도 있다. 주먹을 쥐었다 피며 유리아는 과거를 재구성했다.
이곳은 케오니트라 성당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서 높은 산을 등지며 반원 모양으로 죽 늘어서 있는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성당이라고는 하지만 그 용도가 쓰이는 데는 오히려 전략의 요충지에 가깝다. 케오니트라 성당이 등진 산은 에팔렘 산맥의 한 능선일 뿐이고 절벽은 그 산맥과 형제처럼 자라나 제국의 북부를 횡으로 가르고 있었다.
북부에서 중부로 넘어오기 위한 방법 중 가장 빠른 길은 산맥과 산맥이 서로 만날까 고민하다가 애매한 거리만 남겨두기로 결정한 듯한 이 길목을 지나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목에는 성당 케오니트라가 있었다.
성당이 의미하는 상징성을 생각하면 이 험한 산지에 세워진 이유 또한 극명하다. 어떤 군주나 군사 또한 이곳에서는 말을 탈 수 없고 두 다리로 건너야 한다. 신 아래에는 왕이나 황제 또한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험한 자연지물로 증명하는 셈이다.
험상궂은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 웬만한 요새 부럽지 않게 성벽을 쌓은 케오니트라 성당은 작은 마을과 중심에 원뿔 모양의 높은 성탑과 그 성탑에 붙어있는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전에는 고즈넉하고 산세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을 그 마을은 현재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
하늘에서 수십 발의 벼락이 쏟아진 것처럼 검게 그을린 벽과 부서진 지붕, 지지대를 잃고 넘어진 벽의 잔해가 있었다.
그 잔해는 일주일 전에 비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잘 정리된 것에 가까웠다.
남은 잔해들 또한 다시 집을 지을 수 있게 금이 가거나 깨지지 않은 것들을 모아놓은 벽돌을 다시 쌓을 수 있게 모아둔 것이기에 작업은 끝났다고 보아도 좋았다.
실제로 어떤 병사들은 주민들과 함께 사다리를 타고 올라 지붕에서 보수 작업을 하거나, 우물에서 물을 올려 군영으로 가지고 가는 등 평화적이면서도 목가적인 작업을 하는 데 열심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틀, 혹은 하루 반나절 후에는 저 모든 일들은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유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턱에 손을 얹었다. 석회와 모래를 섞어 만든 벽돌로 지어진 벽은 단단했고 또 차가웠다.
그녀는 손바닥을 엄습하는 냉기를 내버려 두었다.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두통보다는 그쪽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
햇빛이 찬란했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방에 설산이 가득한 곳에서는 드문 날씨다.
설산에 더 어울리는 것은 눈보라와 폭풍이고 절벽은 바람에 깎여 맨들맨들해진 피부를 여지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너머의 풍경을 보면 기쁨이라는 감정이 케케묵은 농담처럼 느껴지게 된다.
남부와 중부의 호수와 강에서 올라온 수증기, 그리고 따뜻한 바람은 설산에서 내려오는 찬 기운과 맞물려 거대한 눈구름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바라보는 산세 저편에는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흘 간 사제들이 필생의 각오로 기도를 올린 덕분에 하늘은 맑음을 유지했다.
날씨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데는 터무니없이 강대한 신성력이 필요하다.
케오니트라 성당의 사제들이 특별히 깊은 신실함과 성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설산에서 밀고 내려오는 눈구름과 강령술사가 일으키는 먹구름을 막아내는 데는 일주일이 한계였다.
교대로 번갈아 가면서 기도문과 신성 마법을 외워도 인간에게는 정해진 체력과 한계가 있는 법이다.
어젯밤 성당의 교구장은 그녀에게 찾아와 체력이 모두 고갈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알겠다고 하고 돌려보낸 뒤 고민에 빠진 그녀가 새벽이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고, 또 세 시간 만에 아침을 맞은 것은 그 때문이다.
유리아는 지원을 올 수 있는 병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여의치 않았다.
유리아는 새벽 내내 고민했던 명령 중에서 좀 더 무거운 것을 집어 들었다. 가벼운 것을 집어 들지 않은 까닭은 간단하다. 그녀는 싸워보지도 않고 걸어다니는 시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예정된 그 날이 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는 보드랍기보다 날카롭다.
바람에 실린 한기에는 얇고 날카로운 실이 한가득 들어있는 것처럼 병사들의 피부와 코끝을 얇게 저몄다. 금세 빨개진다.
술에 취한 것처럼 코끝과 볼이 빨개진 병사들이지만, 그들은 도리어 세상이 취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평선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지평선이라는 닿을 수 없는 세상의 현이 떨리고 있었다. 먼지구름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안개가 일어났다.
수천, 수만이 모인 언데드 군단은 머리 위에 짙은 구름을 이고 나타났다. 검은 구름은 하얗던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하다.
심장이 뛰지 않음에도, 허파가 숨을 삼키지 않음에도 시체들은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다리가, 골반이, 상체가, 어깨가, 머리가 흔들렸다.
발밑에는 차가운 안개와 서리가 깔린 채 시체들과 함께 전진하고 있었다. 검은 구름을 머리에 이고 하얀 안개를 발밑에 둔 채로 전진하는 시체들은 뛰지 않았다. 그저 저벅저벅 걸었다.
그럼에도 워낙 숫자가 많았다. 숲에서 나뭇잎 하나하나를 보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시력이 좋지 못한 자라면 숲이 아니라 나무로 다가가 나뭇가지에 대고 눈을 대야 할지도 모른다.
죽음의 왕, 퀄레드의 시체 군대, 죽음을 불러 일으키는 하얀 망자들의 군단이 그러했다. 그것들은 분명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시체들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그저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