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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14화 (215/225)

214화 안개

남자의 업신여기는 표정에 레오겐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부하들이 보고 있다는 상황, 지배 구조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살아오면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겪었던 모멸감, 남자에 대한 살의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죽어, 시발!”

기사로서의 마음가짐이나 서임 받기 위해 교정했던 입버릇은 영지가 망하고 나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원상복구됐다. 그의 걸걸한 욕설처럼 레오겐은 거칠게 바닥을 박찼다.

마력이 실린 발길질에 바닥이 움푹 패였다. 그만큼 그의 육중한 거구와 갑옷은 쏜살처럼 튀어나갔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도적 떼들이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때 레오겐은 이미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겨우 연마하고 축적한 마력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에 맞춰 마력 회로를 빠르게 휘돌았다.

마력은 그대로 양손에 잡힌 대검에 밀고 들어가며 푸른 칼날을 형성했다. 대검의 길쭉한 검신 위에 세워진 검기는 1미터가 넘는 길이였다.

검기를 일으킨 것을 본 남자는 자신의 묵색 대검을 들어 그대로 부딪쳐왔다.

‘멍청한 놈! 마력도 안 넣은 검을 들이대면 당장 잘려나갈-’

쾅!

바위가 부딪친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두 대검이 맞물렸다. 레오겐의 대검에는 마력으로 세운 푸른 검기가 형성되어 있기에 진짜 칼날과는 5센티 가량의 거리가 있었지만, 남자의 묵색 대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묵색 대검은 칼날에 흠집하나 나지 않은 채 멀쩡히 검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당황한 레오겐이었지만 그의 몸은 오랜 단련으로 만들어진 다음 동작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레오겐은 평생 단련한 검술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검을 휘두르는 자신마저 무아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칼자루를 쥔 오른손과 왼손이 쉼없이 자리를 이동하고, 오른발과 왼발 또한 마찬가지로 움직이며 한 자리에 서 있지 않았다.

굽혀졌다 튕기는 무릎과 비틀린 허리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원심력이 담긴 공격이 러셀을 향해 쏘아지고 비틀리고 뻗어졌다.

제대로 배운 기사의 검술이었다. 그 주인에게 있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남자는 수십 갈래로 베어져 오는 검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말로, 그에게는 딴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쾅!

다시 대검과 대검이 부딪쳤다. 자신의 힘을 못 이긴 레오겐의 발이 언 땅바닥을 지익 하고 밀며 고랑을 만들었지만 러셀은 처음 선 자리 그대로였다.

“으, 아악!”

얼굴에서 땀을 폭포처럼 쏟아내던 레오겐이 비명 같은 기합을 질렀다.

그러나 기합과 달리 레오겐은 손과 팔, 어깨에 주던 힘을 도리어 빼버렸다. 그러자 자연히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남자의 검이 앞으로 더 밀고 들어왔다.

상대방의 균형을 잃게 한 다음 칼을 흘려낸 동시에 왼쪽 사선 방향으로 발을 움직여 몸을 틀었다.

머리 위를 지나간 양팔과 대검이 남자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쳐졌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목이 달아날 것 같은 상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단두대에 목이 걸린 죄수라도 그보다는 더 격한 몸짓을 보여줄 것 같았다.

레오겐은 자신의 돌발적인 기습이 통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검이 남자의 목에 틀어박히기 직전까지 갔을 때 그는 너무 집중한 탓에 눈알이 터져나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그래서 정말 남자의 목을 자신의 대검이 갈랐을 때 레오겐은 저도 모르게 비명 같은 환호성을 올렸다.

“으하아아······! 아?”

그때 갈랐다고 생각한 남자의 머리와, 그 아래의 몸이 환영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그의 환호성은 끝맺음이 의문으로 끝났다.

남자를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레오겐은 벼락같이 뒤로 돌았다. 그 스스로는 그렇게 돌았다고 생각했다.

레오겐은 보지 못했지만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도적들은 짧은 번득임을 보았다. 도적 떼 중에 레오겐의 움직임을 잔상이라도 본 자들은 있었지만, 남자가 이동한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엇인가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공기를 가른 그것은 그대로 레오겐의 왼쪽 어깨를 쳤다. 레오겐은 그 예상치 못한 타격과, 뒤로 돌기 위해 힘을 가한 것 때문에 바닥을 뒹굴었다. 레오겐은 자신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았다.

어깨는 있었지만 그 아래는 없었다. 그의 잘려 나간 팔은 완갑과 함께 공중을 돌다가 뒤늦게 떨어졌다. 레오겐은 자신의 팔이 떨어질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처음 듣게 됐다.

“흐, 흐으으으······.”

레오겐은 자신의 입에서 그런 비명 소리가 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의외로 고통이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심장이 벌컥벌컥 뛰고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어처구니없게도 약간 시원하다는 것과 상실감이었다. 왼쪽 어깨를 부여잡으려던 레오겐은, 자신의 오른팔과 손에 쥐어진 대검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 또한 남들은 감히 들지도 못할 대검을 한손으로 쥐고 휘둘렀지만, 눈앞의 남자는 자신조차도 감히 들어올릴 수나 있나 싶은 두께의 대검을 다루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누구요?”

남자는 말했다.

“나는 러셀이다.”

러셀이 묵색의 대검을 들어 올리자 검신에 맺혀있던 핏방울이 아래로 흐르며 흙바닥에 톡톡 동심원을 그렸다.

“너희들 도적질 따위는 관심 없다. 그리고 사람 잡아다 노예 부리는 것도. 하지만 나한테 직접 칼을 들이대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아까처럼 공기가 찢어졌고 무릎을 꿇고 있던 반쪽짜리 기사, 레오겐의 목이 댕강 잘리며 날아올랐다.

지지대를 잃고 튀어 오른 레오겐의 머리통은 공중에서 수바퀴를 돌았다. 그때까지 레오겐은 의식을 잃지 않은 상태였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에서 희미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하지만 구토감은 올라오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빙글 돌아가는 레오겐의 머리통을 바라보던 도적 떼들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졌다. 흙바닥을 데굴하고 구르던 머리통은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 깜박임을 본 몇몇 도적들이 입을 틀어막다가 우웩 하고 토를 쏟아냈다.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했던 레오겐은 곧 움직임을 멈췄다. 확장된 동공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목을 벤 러셀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빠르게 가자. 도망치면 더 고통스러워질 거다. 한 번에 가는 게 나한테도, 너희들한테도 편해.”

그의 말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도적들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여기 있는 전부를 모두 죽이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아직 레오겐이 죽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도적들 앞에서 러셀이 다가왔다. 천천히 걸은 것처럼 한 발자국을 내딛었을 뿐인데 마치 공간이라도 이동한 것처럼 그 앞에 서 있는다.

코앞에 나타난 러셀을 발견한 도적 하나가 얼떨결에 쥐고 있던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라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러셀은 간단하게 그 장창을 왼손으로 잡아 멈췄다. 창을 내지른 도적은 마치 벽에 창을 갖다 댄 듯한 충격을 어깨에 받았다. 그리고 그가 미처 신음을 내지르기도 전에 러셀의 대검이 그의 가슴께를 갈랐다.

두 팔과 명치 부분이 잘려나간 도적의 시체에서 튀어나온 피가 뒤의 도적들에게 뿌려졌다. 머리에 떨어지는 그 혈우에 도적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쥐거나 웅크렸다.

몇 초 전까지 살아있던 동료의 피는 따뜻했다. 영하의 날씨에 가까운 기온 덕분에 피부에 닿은 피는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으, 으아아아!”

“저리, 저리가!”

도적들은 자신의 피부에 닿아 미끄러지는 뜨거운 핏방울에 진저리를 치며 물러났다.

죽음을 코앞에서 맞닥뜨린 도적들은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부 달려들어서 죽이자는 의견은 당장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도적들에 의해 현실성을 잃어버렸다.

가지고 있던 칼과 창, 단검, 방패 등을 멀리 집어던지며 몸을 가볍게 만든다. 짐을 버린 도적들은 러셀이 자신에게 달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리를 힘껏 놀렸다.

하지만 러셀은 정말 여기 있는 도적들을 전부 죽일 생각이었다.

쾅!

가볍게 서 있던 러셀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터져나간 흙바닥만 남았다. 도망치던 도적의 코앞에서 갑자기 러셀이 나타났고, 수염 덮수룩하게 난 도적은 눈을 크게 떴다.

촥!

일격에 허리가 양단되며 도적 하나가 죽었다. 허물어지는 시체와 쏟아지는 핏물에 다른 도적들은 허연 입김을 펑펑 내쉬며 이를 악물고 달렸다. 하지만 러셀의 움직임은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더 빨랐다.

한 호흡에 한 명, 때로는 두 명이 죽어 나갔다. 누구도 어느 경계를 기점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목이 잘리거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꿰뚫리며 죽었다.

“켁!”

“컥!”

“흑!”

단말마의 향연. 살려달라는 애원도, 저주하겠다는 원념도 소용없다.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 깜박할 사이에 저 멀리에서 반대편으로 이동한다. 러셀은 추수기를 맞은 농부가 곡식을 추수하는 것처럼 도적들의 목을 수확했다.

턱 위가 날아간 도적이 아랫이빨을 그대로 내보인 채 쓰러졌다. 뒤통수가 터진 놈이 엎어지고, 얼굴에 구멍이 난 놈이 그 위에 포개졌다.

시체, 과부, 독신이 양산된다.

러셀은 말을 지켰다. 그에게 덤벼든 도적은 단칼에 죽었다.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혹은 자살과도 같은 공격이었지만 러셀은 그 방식을 존중했다.

목과 심장이 꿰뚫린 도적은 뭣도 모르고 죽었다. 칼이나 창, 무기를 버리고 도망친 도적들은 반대였다.

사지가 잘린 몸뚱아리들이 잘려나간 팔다리 단면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멀쩡한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과 잃어버린 팔과 다리에 대한 울음, 헛소리가 중얼거리며 나왔지만 그마저 곧 그쳤다.

흘러나온 피가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는 점점 넓어졌고 다른 죽은 자들의 웅덩이와 만나며 더욱 커졌다.

도적들 수십이 죽어 나가자 마을 곳곳에서 눈만 내놓고 훔쳐보던 주민들이 슬며시 걸어 나왔다.

감사나 고마움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러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불안이었다. 그리고 죽은 도적들에 대한 분노 또한 있었지만 그리 강하진 않았다.

처참하게 죽은 시체를 보고 분노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수십의 도적들 시체에서 달아오른 허연 김을 내쉬며 러셀은 대검을 코트 속에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여기서 도적 백을 죽여도 어디선가는 도적 천 명이 일어날 것이고, 만 명이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러셀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단순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상대방이 날 죽이려 들면 똑같이 죽인다. 거창한 이유 따윈 없다. 단지 그뿐이었다.

다시 눈이 내렸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기온은 더 떨어졌고 눈은 더 많이 내렸다.

질척해진 흙바닥은 다시 꽁꽁 얼고 그위에 누인 시체들은 눈이불 아래 잠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

러셀은 코트 자락을 여민 다음 머물던 여관을 향해 걸어갔다. 곳곳에서 들어닥친 도적 떼에 나온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저편에서 두 자루의 곡도를 획획 돌리며 렉시가 걸어왔다. 그럴 때마다 바닥에 핏자국이 몇 줄로 그어졌다.

“끝났어?”

“어. 그쪽은?”

“나도, 뭐.”

렉시가 피묻은 얼굴로 씩 웃었다. 아름다운 흑요정의 얼굴로 하기에는 섬뜩한 웃음이었지만 요 며칠간 익숙해진 웃음이기도 했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여관에 들어서자 대화 소리가 뚝 멎었다. 애초에 장정들은 몇 없고 힘없는 노인들이나 도적들에게 값을 지불한 상인들이 전부였다.

구석의 식탁에서 러셀과 렉시를 발견한 제스가 막 앉으려던 엉덩이를 떼며 인사했다.

“아, 끝내셨습니까? 저희도 대충 마무리한 참입니다.”

“밖에 시체는 없던데.”

“뒷마당에 놓았습니다. 페코트 씨가 도와주셨지요.”

제스가 가리킨 곳에는 이마의 땀을 쓱 닦는 남자가 있었다. 얄상한 얼굴과는 달리 얼굴 곳곳에 흉터가 많은 남자였다.

그의 걸음걸이나 잘 움직이지 않는 팔 등을 본 러셀은 그가 이전에 용병이나 군인이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러셀 님은요? 뭐, 제일 마력이 많은 사람한테 가본다더니 잘 된 겁니까?”

“다 죽이고 왔지. 식사는 주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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