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군령들 (7)
그녀의 말에 러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구름이 하늘을 점령하고 있었다. 하얗지만 맑은 날에 볼 수 있는, 여러 번 삶고 말린 수건 같은 구름은 아니다.
그보다는 푹 젖은 양털 같은 구름이었다. 당장이라도 내려앉을 듯이 무겁다. 하지만 구름은 그대로 내려앉아 대지를 부수는 대신 자신의 살을 뜯어 내려보내고 있었다.
인기척에 그가 고개를 내렸다. 바이젠이었다. 뒤에는 실리오가 삐딱하게 서서 러셀을 보고 있었다. 바이젠이 먼저 다가와 말했다.
“고생 많았소. 죽을 때까지 잊기 힘든 추억들도 선사해줘서 고맙고.”
“너도 고생 많았다.”
“할 말이 그것밖에 없소?”
바이젠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러셀은 그 손을 잡아 위아래로 몇 번 흔들어주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냐, 거. 고마웠소. 목숨도 구해주고 한 거.”
“별일 아니었다.”
“내게는 별일이지. 몸조심하시오. 조심할 일이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비켜봐, 자식아. 너만 인사하냐?”
실리오가 남동생의 머리를 밀며 다가와 러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 진짜 남 주긴 아까운 얼굴인데. 그래도 내가 먹기엔 너무 크니 놓아주는 수밖에. 잘 가라고.”
어처구니없는 인사에 러셀도 할 말을 잃고 바이젠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누님, 제발. 남을 품평하기 전에 자기 얼굴부터 좀 돌아보면 안 될까악!”
투닥거리는 남매를 앞에 둔 채, 아샤린은 아엘라시스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엘라와 함께 가고 싶은 듯했지만 용이 다시 깨어났다는 소문의 진상을 확인한 지금 그녀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말했다.
“아마 깜짝 놀랄 용족들이 많을 거예요. 몇몇 어르신들은 찾아오고 싶어할 테지만, 너무 늙으셔서 그러긴 힘들 거고······.”
“나중에 찾아와. 그리고 존댓말 하지 말라니까.”
“아, 미안. 보고 싶을 거야.”
얼마나 봤다고 눈에 눈물을 글썽이는 아샤린의 머리에 아엘라시스가 손을 올렸다. 훌쩍 자랐다고는 하지만 겉보기에는 소녀가 성인 여성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리를 굽혔던 아샤린은 곧 상체를 펴며 러셀을 바라보았다.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건 주제넘는 일이겠지?”
“잘 아는군.”
“그럼 됐어. 난 간다.”
가볍기까지 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아샤린은 뒤로 돌아 걸어갔다.
러셀은 흑마의 위에 올라탔다. 며칠 만에 다시 달린다는 사실에 고무받은 듯 크라이가 크게 투레질했다.
투레질 소리는 빠르게 허공에 스며들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소리를 모두 잡아먹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내리는 날은 고요하다. 사람들은 침묵이 시끄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눈이 내리는 날 감각할 수 있다.
고요 속에서 러셀은 멀어지는 아샤린의 뒷모습과 물러나서 자신을 배웅하는 남매, 그리고 눈이 내리는 와중에도 머리에 김이 나도록 바쁘게 뛰어다니는 병사들과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러셀은 남매를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인 다음 고삐를 틀었다. 그를 필두로 칼리아와 아엘라시스가 함께 탄 말, 그리고 엘레노아와 제스, 렉시가 뒤따랐다.
어느 경계를 기점으로 무너진 건물들은 사라지고 반듯하게 세워진 가게와 집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광장 시장을 넘어 대로에 접어들고 북문으로 나갈 때까지 그들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러셀 일행은 방해 없이 북문을 통과해 구불구불한 능선이 가득 펼쳐진 임야지대로 나왔다.
“위로 가나?”
“바로 중앙으로 갈 수는 없어요. 임팔레아 산맥이 남쪽부터 서쪽까지 반바퀴를 돌고 있어서. 가려면 그 산맥을 왼쪽으로 끼고 비스듬히 올라가야 할 거예요.”
“좋아.”
겨울은 분명 여행하기 좋은 계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 중에 추위에 몸이 굳을 사람도 없었다.
“잠시, 말에게 기도문을 외우겠습니다.”
정면에서 덮쳐오는 눈발에 고개를 수그러뜨린 엘레노아가 양손을 모아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녀를 중심으로 금빛의 광선이 위로 치솟았다가 일행의 말에게 각자 떨어지면서 스며들었다. 따뜻한 기운을 느낀 말들이 고개를 흔들거나 투레질을 했다.
“앞으로 세 시간 가량은 추위를 못 느낄 겁니다.”
“좋아. 이제 가자.”
러셀이 먼저 고삐를 튕긴 다음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그러자 크라이가 거칠게 울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 뒤로 일행의 말들이 차례차례 따라갔다. 눈발 속으로 달려간 여섯 기의 인마는 금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
설원의 노숙은 여행자들에게 그리 추천해줄 만한 일이 아니다. 꽝꽝 얼어붙은 땅은 근육을 굳게 만들고, 담에 걸리게 하며, 입을 돌아가게 만든다.
나무로 우거진 숲이나 탁 트인 평원이나 매서운 바람을 막기는 힘들다. 숲이나 산에 있다면 뷸규칙 속에 규칙을 세우고 자라난 나무들의 몸 사이로 매섭게 벼려진 바람이 칼날처럼 덮칠 것이다.
평원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다. 다만 날카로우냐와 거세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제국의 북서부부터 시작된 망자의 군대가 일으킨 침공은 많은 피난민들을 낳았다.
어떤 생명도 그렇지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생명은 없다. 또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망은 가능하다.
자연재해나 피치 못할 재앙처럼 덮친 망자 군단을 피해 동쪽이나 서쪽, 남쪽으로 피한 피난민들은 대개 환영받지 못했다.
영지나 도시, 마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절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한순간에 집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받아준 영지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성이나 마을, 도시가 더 많았다.
피난민들 중 3분의 1은 뿔뿔이 흩어져 중소 크기의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갔고, 3분의 1은 죽었으며 남은 3분의 1은 산적, 혹은 도적 떼가 되었다.
그리고 도적 떼가 된 피난민 무리 중 가장 커다란 무리 하나가 막 사냥감 하나를 발견한 참이었다.
레오겐은 부하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수염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성직자랑 성기사가 있다면서? 너 천벌 받고 싶은 거냐?”
부하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성직자인지 성기사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비슷한 차림새랑 갑옷을 입은 것일 수도 있잖아요? 저희처럼?”
부하는 자신의 양팔을 들어보였다. 그의 차림새는 갑옷이 통일성 없이 입혀져 있었다. 흉갑이나 견갑, 각반과 완갑 등은 모두 제각각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착용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했다. 사실 그를 제외한 다른 도적들 모두 비슷했다.
유일하게 다른 것은 레오겐이었다. 그는 번쩍이는 판금 갑옷을 풀 세트로 모두 장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원 주인이 레오겐이기 때문이었다. 기사 서임을 받는 날 직후 망자 군단의 침공을 받아 무너진 성과 영지에서 간신히 도망친 이후, 레오겐은 기사로서의 기량과 실력은 갖추었지만 서임은 받지 못한 반쪽 짜리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별로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성정에는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에 맞서는 것보다, 강자를 피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일이 더 적성에 맞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흐음. 일어나.”
레오겐의 말은 부하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레오겐이 앉아있는 의자와 책상 아래에서 여자 하나가 입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과 옷이었지만 그럭저럭 미녀라 할만한 얼굴이었다.
“고생했다. 나가서 씻어라. 뜨거운 물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여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는 여자를 애타는 눈길로 보던 부하를 발견한 레오겐이 피식 웃었다.
“왜? 너도 안고 싶으냐?”
“아, 아뇨. 아닙니다······.”
“저 여잔 내 거야. 안고 싶은 여자 있으면 다른 놈들처럼 네가 찾아와. 알았냐?”
“예.”
“그래. 우리 마을에 들렀다는 그 여행자 무리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해봐.”
부하는 두서없지만 자신이 본 그대로 충실하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던 레오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하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일어선 레오겐은 그만한 박력이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의 레오겐은 벽에 기대어 놓은 대검을 들고 말했다.
“좋아, 그럼 가보-.”
콰앙!
레오겐이 가보자고 말하려 할 때 굉음이 터졌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진동에 건물이 흔들리고 오래된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눈썹을 모으며 찌푸린 표정이 된 레오겐이 밖을 보았다.
“뭐야?”
“대, 대장!”
그의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다른 부하 하나가 문을 벌컥 열며 들이닥쳤다.
“지, 지금 웬 여행자들이 우리 애들을, 막 잡아 죽이고······!”
“애미, 시발. 야, 너 다른 놈들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말 안 해뒀어?”
서슬퍼런 레오겐의 물음에 부하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아, 아니요! 부, 분명 말 해뒀습니다······!”
“이런 젓갈에 담가 튀겨 먹을 새끼들이. 너, 너, 당장 칼 들고 나와. 안 나오는 놈 있으면 그날 머리 가죽 벗겨준다고 하고!”
“예!”
답한 부하 둘이 잽싸게 자리에서 벗어나 달려갔다. 바지를 추스르고 각반 끈을 묶은 레오겐이 투구를 집어 쓰고는 번들거리는 눈알을 들었다.
“어디, 어떤 놈들인지 구경이나 해볼까.”
그리고 그가 마주한 것은 유혈과 터져나간 살점이었다.
레오겐이 규합한 도적 떼의 무리는, 그가 제대로 세지는 않았지만 대충 백 언저리였다. 그 예순 언저리의 장정들이 데리고 있는 가족이나 친인척을 합하면 더 많겠지만, 어쨌든 그가 전투에 내보낼 수 있는 숫자는 백이 약간 넘었다.
힘 좀 쓴다는 건달이나 용병을 가리지 않고 모았기에 개개인의 전투력은 들쭉날쭉했다. 기사로서 레오겐이 익힌 것은 살인기술도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병력 운용도 있었다.
보통 개인 기량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기사가 참모의 역할도 겸하기 위해 배워놓지만 레오겐은 순전히 재미가 있어서 배워놓았다.
그렇기에 그가 거느린 도적 무리는 인근 마을 두 개를 지배하에 놓고 마치 귀족이라도 된 양 떵떵거리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한 목욕물을 하룻밤 상대로 끝낼 여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기에 그가 한 달이 약간 넘는 시간 동안 가르친대로 도적 떼들은 궁병, 창병, 방패병 등으로 나뉘어 싸웠다. 그리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죽어 나갔다.
레오겐은 병사의 틈바구니에서 휘저어지는 대검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한 거구의 남자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싸우고 있었다. 아니, 싸운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누구도 고양이 무리에 떨어진 호랑이가 고양이와 싸운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사냥 내지는 학살에 더 가까웠다.
남자의 발이 레오겐의 부하 하나를 걷어차자 그는 얼마간 중력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수평에 가깝게 날아간 부하는 어느 불운한 벽에 부딪쳤다. 레오겐은 그 모습에서 저도 모르게 손바닥과 부딪친 모기를 떠올렸다.
지형지물을 이용하며 담벼락이나 지붕에 올라서서 화살을 쏘는 놈들이나 뛰어내리며 칼을 휘두르는 놈들도 있었다.
대검은 공평하게 모두를 한꺼번에 갈랐다. 화살은 튕겨나고 떨어지던 놈은 두 조각아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레오겐이 끼어든 건 남자가 등을 보였을 때였다.
“흡!”
기합을 내뱉지 않기 위해 그가 낸 소리는 숨을 들이키며 낸 짧고 단단한 호흡 한 번이었다.
난전 와중에 뒤늦게 대장을 알아본 부하들이 환호성이나 고함을 지르기도 전에, 레오겐은 대검을 곧게 남자의 등을 향해 찔러갔다.
그때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남자의 몸이 오른발을 축 삼아 획 돌았다.
어느새 남자의 대검이 코앞에 있었다. 레오겐의 대검과 남자의 대검이 꽝, 부딪쳤다.
공기가 짜르르 울렸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부하들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레오겐은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는 손아귀에 힘껏 힘을 준 채 남자를 밀어붙였다. 한 호흡에 열 번의 검격이 남자를 향해 쏟아졌다.
그러나 남자는 마치 벽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며 레오겐의 검을 다 받아냈다. 그리고는 그와 검을 부딪치는 와중에 빈틈을 노리려 살금살금 접근하던 도적 하나의 머리통을 주먹을 휘둘러 박살내기까지 했다.
레오겐이 다급하게 외쳤다.
“물러서!”
레오겐이 고함을 내지르자 도적 떼들은 엉거주춤 물러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제때 그런 명령을 해주어서 고맙다는 감정과 공포가 반반 섞인 채 서슴없이 드러나 있었다.
질린 부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레오겐이 앞으로 나서 남자를 보았다.
거친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묶은 미남자는 피곤한 표정이었다. 육체적인 피로함이 아니라, 같은 걸 여러 번 본 것에 대한 피곤함에 가까웠다.
“난 레오겐이다. 네놈은 뭐냐?”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뭐긴 뭐겠냐, 여행자지. 시발. 어떻게 된 게 들리는 마을마다 이 지랄인 거야? 다 짜고 치기라도 한 거야?”
남자는 침을 탁 뱉더니 대검을 들어 어깨에 짊어지고서는 가볍게 툭툭 걸어왔다.
그 모습에서 협상이나 대화의 여지가 전혀 없음을 알아챈 레오겐은 자신 또한 대검을 들었다.
육중한 무게에 어울리지 않게 가볍게 들리는 대검이었지만, 레오겐은 몸이 떨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물러난다면 우릴 살려주겠나?”
레오겐의 말에 남자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살려달라고?”
“그래. 일행들이 있는 걸 알고 있다. 너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당신 일행까지 모두 우리 애들 앞에서 무사하기는 힘들 거야. 그러니 피차간에 좋은 경험 했다 치고, 여기서 물러가준다면······.”
“지랄 하고 앉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