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군령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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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늦은 저녁 식사는 그 저택의 주인이 손님들에게 가진 환대만큼 차려졌다. 결과적으로 넓고 커다란 식탁 위에는 다종다양한 음식들이 한가득이었다.
일행들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식탁 위의 음식들을 향한 전투 의지를 고양시켰다.
특히나 러셀은 거의 마신다는 수준이었다. 빠르게 먹어 치우면서도 음식물이 튀거나 식탁보가 더럽혀지지 않게 먹는 모습은 현란하면서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 광경을 오래 지켜본 사람은 없었다. 모두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며칠간 최소한의 음식과 물만 마신 채 말을 달리게 하고 브라실트에 도착하고 나서도 수 시간 동안 환자들만 줄창 돌봐야 했던 제스와 엘레노아 또한 사양하지 않고 식사에 열중했다.
일단 먹고 나서야 뭐든 가능한 것이다. 인사를 나누든, 찬양을 하든, 일을 정리하든.
맛도 훌륭했지만 배를 채운다는 목적의식이 더욱 강한 식사가 끝난 뒤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다가와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를 치우고 술이나 차를 내왔다.
집주인의 배려로 식당에는 러셀과 칼리아, 아샤린, 렉시, 실리오와 바이젠, 엘레노아, 제스만 자리했다.
식사의 열기가 가라앉자 제스가 러셀을 보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까 인사하긴 했지만 다시 인사드려야겠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러셀 님.”
“그래. 얼마 만이지?”
“대충 4개월에서 5개월 만입니다. 에란디스 영지에서 작별한 이후 뵙는 거니까요. 이루실 님은 같이 안 계시는군요?”
“사정이 생겨서 본가에 머물러야 했지. 난 그 사정 때문에 여기 온 거고. 넌? 하일른은 찾았나?”
러셀의 물음에 제스가 엘레노아를 바라보았다. 차를 마시던 엘레노아가 그것을 내려놓고는 러셀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리스덴 이후 거의 1년 만인가요?”
“훨씬 더 됐지. 반갑다.”
“예. 그래서, 아까 저희들이 본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타당한 질문이었다. 엘레노아와 제스, 그리고 실리오, 바이젠, 아샤린 또한 러셀과 칼리아를 쳐다보았다. 비율은 대충 반반이었다.
칼리아가 두 손으로 턱을 짚은 채 말했다.
“나도 짐작만 하는 거다만, 그 거인은 고대에 이 땅을 거닐었던 그 거인과 비슷한 존재로 보인다.”
제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거인들은 모두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벌써 몇천 년도 전에 자취를 감췄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나도 그리 알고 있었다. 사실 고대는 우리가 아직 짐작하기 힘든 발자취들을 많이 남겼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도시들의 근간에는 과거 먼저 이룩했던 문명의 잔재를 토대로 세워진 것들이고. 거인과 용이 보이지 않게 된 시점에 대해서는 역사서 모두 비슷한 지점 어딘가였다고 적혀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지만.”
“칼리아 님께서는 뭔가 알고 계십니까?”
“그냥 짐작만 하는 거다만. 아샤린, 아엘라와 같이 있던 건 너였지. 아엘라시스가 뭐라고 하지는 않더냐? 그 얘가 갑자기 용으로 변해서 공격적으로 변하는 건 나도 처음 본 일이다.”
그 말에 사람들 모두 하얀 비늘의 용이 도시의 상공에 떴을 때를 회상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며 허공에서 마력을 갈취하던 용의 모습은 쉬 잊기 힘든 모습이었다.
와인을 커다란 잔에 따라 마시고 있던 아샤린이 입술을 닦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저런 게 있어선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던 같은데. 표정도 멍해 보였고.”
“표정이 멍해 보였다고?”
“응. 뭔가를 막 떠올리거나 잊었던 기억을 반추하는 듯한 얼굴이었어. 내가 알기로 용들은 지식의 전수가 영혼과 영혼에서 이어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어.”
제스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영혼과 영혼으로 지식의 전수가 이어진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해서 배움의 과정이 저절로 일어난다는 거야. 모르고 있던 것도 전대의 용들이 알고 있던 지식이라면 알게 된다는 거지. 또 아엘라시스가 새로 알게 된 지식이 있다면 그녀 후대의 용에게 그 지식이 전달되는 거고.”
“허, 용은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용족도 되는데? 나도 내 마법에 대한 지식은 부모님에게 전수받은 거야. 물론 엄청 까다롭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지만······.”
그 마법 실력이 물려받은 거였나? 러셀은 화염을 손발처럼 다루며 날뛰던 아샤린을 생각하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것 참 편리하군.
“거인과 용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엘라시스가 보기 드물게 적대적으로 공격에 돌입한 사실을 보면 사이가 안 좋았던 걸지도 모르겠어. 어느 한쪽이 먼저 싸움을 걸었던 거 아닐까?”
“용과 거인에 대한 비화도 물론 흥미가 당기는 주제지만, 전 원래 주제로 돌아오고 싶군요. 그래서 그 거인이 왜 나타난 겁니까?”
제스의 물음에 모두 러셀을 바라보았다. 무너지는 성의 대전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던 건 그 혼자였으니까.
술을 한 모금 들이킨 러셀이 말했다.
“제이비르 백작을 쓰러뜨리니 리벤부스라는 놈이 덤벼들더군. 둘로 나뉘기까지 해서 싸우다가 한 놈이 무슨 의식을 치뤘고, 그러고는 거인이 나타났다. 이후는 다들 보다시피 신나게 싸우다가 쳐 죽였고.”
“음······.”
“죽기 전에 리헬라투르인가 뭔가 하는 이름을 언급했다. 말하는 투나 행동을 보면 불완전성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결성된 조직 비슷한 것 같더군.”
가만히 러셀의 말을 듣고 있던 엘레노아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리헬라투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아는 이름인가?”
“······들어본 적 있습니다. 고서에 적혀져 있던, 어느 오래된 탑의 이름이었지요.”
탑?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엘레노아는 말을 이었다.
“그 연도를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오래전에 건설된 탑이었습니다. 탑은 사람들이 소망을 담은 벽돌로 쌓였지요. 언젠가 그 높이가 구름마저 넘어서서 하늘의 바깥에 닿았을 때 진노한 신들의 벌이 떨어져 그 탑은 무너졌다고 합니다. 왜 신들이 진노한 것인지, 무너진 탑과 그 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많은 가설만 존재할 뿐 정확한 건 기록되어 있지 않았어요.”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군. 엘레노아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역사가와 학자들은 그 고서에 적힌 리헬라투르라는 이름의 탑은 실제 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륙 어디에도 그만한 높이의 탑이 건설된 흔적이나 그 잔해가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럼 비유인건가?”
러셀의 말에 엘레노아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거대하고 높은 탑이라고 전해진 건 그만큼의 역사가 작용할 수 있는 건축물이라고 비유한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이죠.”
“그럼 그 리헬라투르는 신에게 이르기 위한 도구였을 수 있겠군.”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마 러셀님이 들었던 그 이름이 다시 언급된 건, 역시······.”
러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 짓도 어지간히 없나 보군. 신이니 뭐니 하면서 지랄하는 건 거기나 여기나 다름이 없어.”
“이전에도 이런 일을 겪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하지만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는 건 알겠다. 그건 차치하고. 제스, 넌 왜 온 거냐?”
제스는 엘레노아를 한 번 보고는 러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무슨 도움?”
“하일른 경의 소재지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는지도요.”
침을 한 번 삼킨 제스가 굳은 표정이 되어 말했다.
“현재 제국의 북서부부터 언데드들의 무리가 활개를 치는 중입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벌써 도시가 함락됐고 두 개의 지방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언데드 무리라고 했느냐?”
칼리아가 끼어들었다.
“무슨 언데드? 그냥 되살아난 시체 따위만으로 도시가 함락됐다는 건 아니겠지.”
“예. 퀄레드 움베르토라는 이름의 흑마법사가 그 주인입니다. 수백 년 전 아발손이라는 지방을 죽음의 왕국으로 만들려 했던 미친 마법사였지요.”
제스는 그 흑마법사의 연원과 격퇴에 이른 과정을 설명했다. 설명을 전해들은 러셀은 팔짱을 끼다가 말했다.
“거기에 하일른이 있다고? 어쩌다가?”
제스가 말했다.
“저번에 오크 대주술사와의 전투에서 사라졌다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십니까?”
“설마 그것 때문이라는 거냐?”
“저와 엘레노아 님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피난민들이 두서없이 떠드는 소문 중에 한 죽음의 기사를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가 입은 갑옷이나 칼의 생김새를 종합해봤을 때 하일른 경이 입고 있던 것과 흡사합니다.”
“지금 그게 제국 북서부를?”
“예.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희가 있는 이곳 브라실트는 제국의 남동부, 북서부와는 극과 극이어서 아직 실감이 안 나는 것 같지만 저와 엘레노아 님이 지나쳤던 도시들은 이미 비상사태를 선포 중입니다.”
조용히 술만 홀짝이고 있던 바이젠이 몸을 기울여 누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
“내가 너 같은 줄 아니, 동생아. 못 알아먹겠으면 닥치고 있으렴. 최소한 바보 취급은 당하지 않을 테니.”
바이젠은 누나의 충고를 새겨듣기로 하고 무정물의 자세를 취했다. 술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 빈 술잔에 다시 술을 채우는 것이다.
렉시가 혀를 찼다.
“뭔 소란이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나는 거야? 원래 세상이 요지경이었던 건가, 아니면 요즘 특히 이런 거야? 내가 그리 오래 산 흑요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이상한 걸.”
렉시의 투덜거림에 엘레노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맞습니다. 이런 혼란은 비정상적이지요. 1년이 약간 넘는 시간 안에 영주들이 서로의 영지를 침범하고, 국경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제국이 안쪽에서 붕괴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리헬라투르라는 이름을 가진 조직이 실존한다면, 그 조직이 아주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던 것들이 차례차례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또 다행히도, 지금까지 일어났던 대부분의 일들 또한 모두 처리되었거나 처리되고 있습니다.”
“예?”
“칼리스덴에서 일어난 광룡과 달의 호수에서 힘을 키우고 있던 대악마를 생각해보세요, 제스. 그리고 에란디스에서 깨어난 흡혈귀들의 난동과-이때 칼리아가 눈을 반짝였다-오크들의 회합 등은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엘레노아가 눈썹을 모았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는 곳 바로 옆에는 그 답이 존재하는 것이 섭리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 제 눈앞에 있습니다.”
코트 속을 뒤적거리며 연초를 찾던 러셀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움직임을 멈췄다.
러셀은 잠시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식탁에 앉은 사람들 면면을 돌아보았다. 칼리아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생긋 웃었고, 아샤린은 무얼 깊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실리오는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바이젠은 술에 취한 얼굴로 눈을 끔벅거렸다. 렉시는 러셀이 자신을 보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끄덕인 거야?
마지막으로 제스와 엘레노아를 보았다.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그를 보는 제스를 마주 보던 러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안 쳐다봐도 갈 거다. 친구가 이상한 짓하고 있으면 말려야지.”
“후우우.”
깊은 숨을 토해낸 제스와 달리 엘레노아는 굳은 표정으로 러셀을 보았다.
“꼭 그런 이유뿐만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힘을 기르고 있던 강령술사가 얼마나 큰 힘을 쌓아두었는지는 저도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만약이지만, 혹시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온다면······.”
뜸을 들이던 그녀가 말했다.
“망설이지 마시고 제 오라버니를 상대하십시오. 성기사의 타락은 많은 성직자들이 경계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자는 악마보다 더한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명심하지.”
저녁 식사는 그렇게 어두운 분위기에서 마무리 됐다.
***
밤이 물러가고 아침이 찾아왔을 때도 하늘은 어두웠다. 구름 속에는 빗방울이 되기 직전의 씨앗들이 가득했다. 먹구름 속의 수분과 점차 떨어지는 기온이 맞물리자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땅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눈이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눈은 차츰 굵어졌고 쌓이기 시작했다. 도시에 일어난 혼란과는 별개로 아이들과 강아지들은 눈에 열광했다.
지친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잡지도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 강도나 약탈 같은 범죄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로셀소는 범죄 행각이 명백한 범죄자를 붙잡으면 그 자리에서 참수 명령을 내렸고, 목이 달아나기 싫은 자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내리는 눈은 소리를 잡아먹었다. 아이들의 웃음 섞인 비명 소리와 강아지들의 짖는 소리는 퍼지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잦아들었다.
러셀은 마구간에서 얌전히 있던 크라이와 칼리아, 아엘라시스의 말을 데려왔다. 다행히 여파가 미치지 않았던 모양인지 여관은 멀쩡했다.
밀린 숙박비를 치르고 나오는 와중에 내린 눈발은 조금 잦아들고 있었다. 눈발 속에서 나란히 선 사람들이 보였다.
아엘라시스는 다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마력을 운용하는데는 어려워 했다. 그런 아엘라시스를 칼리아가 뒤에서 꼭 안고 있다가 다가오는 러셀에게 말했다.
“아엘라와 나는 함께 타야겠다. 아무래도 마법을 좀 걸어줘야겠구나. 몸도 좀 차가운 듯하고.”
“그래.”
“그럼 남은 말은 내가 탈게.”
렉시가 냉큼 걸어나와 고삐를 하나 쥐어 들었다. 러셀이 남은 고삐를 칼리아에게 건낼 때 뒤에서 말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각자 하나의 말을 데리고 있는 엘레노아와 제스였다. 하늘을 보던 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눈이 내리는데 잘 달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사제복에 달린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 쓴 엘레노아가 말했다.
“일단은 길로 달려가죠. 오랫동안 내릴 것 같지는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