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군령들 (2)
***
“뒤쪽!”
“압니다!”
아엘라시스의 경고에 대답한 아샤린이 뒤로 돌았다. 막 담벼락을 뛰어넘어 달려들던 괴물이 그녀의 손아귀에 목이 붙잡혔다.
“키학, 카가가각!”
목이 졸린 소리를 내며 괴물이 발버둥쳤다. 고릴라와 표범을 반쯤 합친 것 같은 근육질의 괴물이었지만 용족의 힘은 강력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괴물의 목을 쥐어짜 버린 아샤린은 시체가 되어 축 늘어진 그것을 집어 던지고 톱날로 이뤄진 거대한 검을 꺼내들었다.
“역겨운 놈들.”
들이닥치는 수십 마리의 괴물들을 보며 미간을 모은 아샤린이 바닥을 박찼다.
괴물들은 잘려 나간다기보다는 거의 찢겨나가는 것에 가깝게 도살되었다. 목구멍을 통해 지르는 비명도 식도나 기도를 통해 역류하는 핏물에 섞여 ‘그르륵’ 이나 ‘게라락’에 가까웠다.
막 곰과 황소, 늑대를 주물러서 만든 것 같은 괴물의 머리통을 박살 낸 아샤린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손아귀에 불꽃을 피워올렸다.
화르륵······!
작은 불씨로 시작했던 그것은 마력을 받으며 거대한 화염구가 되었다. 머리 위로 화염구를 치켜올린 아샤린이 차갑게 읆조렸다.
“불에 타, 스러져라!”
웬만한 3층 건물을 집어삼킬 만큼 커다래졌던 화염구가 회전했다. 구체를 유지하던 화염이 원심력에 의해 점차 납작해지다가 수백 갈래의 화염 줄기로 갈라지며 넓게 펼쳐졌다.
푸화화화확!
수백 미터 반경을 뒤덮으며 튀어 나간 화염 줄기가 괴물만을 붙잡으며 뜨거운 열기를 발산했다. 불길임에도 물리력이 부여된 화염 줄기는 채찍처럼 움직이며 주위의 모든 괴물들을 한줌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끼아아아악
카아아아아
끄르르르르
불타는 성대에서 나오는 괴물들의 단말마가 메아리를 치다가 사그라졌다.
남은 불길은 아엘라시스의 냉기가 꺼트렸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손 위로 시린 한숨과 함께 하얀 서리가 끼치기 시작한다.
마력의 움직임이 유형화될 정도로 선명하고 푸른 기운은 곧 차가운 냉기를 맹글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가 아엘라시스를 중심으로 서늘하게 변하며 영하의 기온으로 곤두박질쳤다.
쩌저적!
냉기의 창을 손바닥 위에서 떠올린 아엘라시스가 그것을 그대로 위로 쏘아올렸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냉기의 창은 곧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쐐애애액!
푸확!
냉기의 창이 대지에 틀어박히자마자 그 일대가 하얗게 물들며 설원을 만들었다.
품고 있던 냉기가 해방되자마자 수십 미터의 반경이 얼어붙으며 한기와 서리가 지배하는 서리 지옥이 현현했다.
그 위를 쭉 미끄러지며 장난처럼 툭툭 냉기의 창을 던질 때마다 대지에 눈송이가 피는 것처럼 하얀 동심원이 생겨났다.
그렇게 생겨난 동심원 중심에는 냉기의 창이 기둥처럼 꽂힌 채 마력으로 된 파동을 웅웅 퍼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심원의 숫자가 정확히 36개가 되었을 때, 서로 공명하던 냉기의 창이 모두 터져 나가며 백색의 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서리로 이뤄진 고리가 퍼져 나가며 타오르던 불길을 잡아먹고 하얀 연기만을 남겼다.
비현실적인 냉기가 달아오른 온도의 멱살을 쥐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사방으로 펴져 나가던 하얀 파동의 고리는 영주성을 중심으로 한 서쪽의 광대한 거리를 모두 얼어 붙게 만들었다.
“허······.”
아샤린의 감탄 섞인 신음을 뒤로 하며 아엘라시스가 말했다.
“여기엔 더 이상 괴물들이 기어나오지 못할 거야. 나오자마자 얼어붙을 테니까.”
얼어붙은 괴물 동상들을 부수며 전진하길 얼마쯤. 아샤린은 한 지점에 멈춰서서 톱날 대검을 얼음 바닥에 꽂아 넣었다.
아샤린은 멈춘 자리와 영주성의 거리,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한 브라실트의 시가지를 모두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여깁니다. 여기서 결계를 구축하면 안전거리가 확보할 수 있습니다. 괴물들에 대한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고요.”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왜 존댓말을 하는 거야? 나보다 나이 많잖아.”
“그야, 제 피의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엘라시스님이 계시기 때문에······.”
“아샤린을 낳아준 건 아샤린의 엄마 아빠야. 난 아샤린을 만든 적 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존댓말 쓰지 마. 불편해.”
“······알겠습, 아니 알겠어.”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인 아샤린은 곧장 마력을 끌어올려 결계 구축에 들어갔다. 그 사이 아엘라시스는 주변을 돌아보며 이따금씩 몸을 일으키는 괴물들을 얼린 다음 부수기를 반복했다.
그때, 영주성에서 강렬한 파동이 터져 나오며 무형의 충격과 흙먼지가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 성에서 몸을 일으키는 잿짗의 거인을 발견한 아엘라시스의 동공이 위아래로 길쭉해지며 날카로워졌다. 아엘라시스가 중얼거렸다.
“저건 이 세상에 나오면 안 되는 거야.”
“예? 그게 무슨 말씀, 아니 무슨 말이야?”
영주성을 중심으로 반지름 1킬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결계를 짜올리던 아샤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머리카락애 벽안을 지닌 소녀가 멍한 얼굴로 영주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성을 안쪽에서 부수고 나오며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거인을 향한 채였다.
“나오면 안 돼.”
중얼거린 아엘라시스의 몸에서 눈부신 섬광이 새어나왔다. 결계를 구축하며 마력을 쏟아붓고 수인을 맺던 아샤린조차 잠시 넋을 잃을 정도로 강렬한 광채.
용족의 인지력은 평범한 사람의 감각을 훨씬 뛰어넘는다. 집중한다면 파리의 날갯짓도 초단위로 인지할 수 있는 아샤린은 광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깨닫고 경악했다.
평범한 인간 소녀의 신체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그 자리에 폭발적인 확장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빛의 입자가 모여들며 뼈와 근육, 신경과 내장기관이 형성되는 것은 경이 그 자체였다.
실제로는 눈 한 번 깜박이는 순간 아엘라시스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하얀 비늘과 커다란 뿔을 단 용이 뒷다리로 서 있었다.
스스로 키가 작다고 여긴 적은 없던 아샤린이지만 고개가 들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20미터는 가뿐히 넘는 높이에서 몸을 움직인 아엘라시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개를 퍼덕이지도 않았는데 그 육중한 몸이 떠올랐다. 마법을 이용한 것이겠지만, 아샤린은 그 마법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세상에······.”
용족, 아샤린이 경탄을 참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상상만 해왔던 광경이 하늘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막대한 마력의 파동이 퍼지며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었다가 도로 새하얘졌다.
겨우 마력을 둘러 눈과 몸을 보호한 아샤린은 곧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 머리통에 살점이 녹아 흐르며 뼈가 그대로 보이는 육신.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굳은 피부는 우그러진 주름을 내보였고, 흉한 촉수들과 등을 찢고 나온 검은 뼈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죽, 죽어 버리는······ 찬탈자들······ 가증스런 신들······ 도망친 용들······ 세계는, 부딪칠 것이······]
벼락을 맞으면서 뇌가 파괴되기라도 한 걸까. 거인은 매끄러운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말만 웅얼거렸다.
그러다가 번뜩 고개를 쳐들어 러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이지만 러셀은 거기서 살의를 읽었다.
괴성을 지르며 괴물이 달려오다가 넘어졌다. 자신의 육체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하지만 분노한 거인이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자 작은 크레이터가 생기며 지진이 났다. 힘을 이기지 못한 손이 그대로 박살나며 육편밖에 남지 않았지만.
[흐으으으으······]
숨을 들이마시자 영상을 되돌리는 것처럼 박살난 뼈와 근육이 다시 생성되며 멀쩡한 손을 만들었다.
손을 재생시킨 거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자리엔 더 이상 커다란 용이나 러셀이 보이지 않았다. 빙산뿐이었다.
어리둥절해진 거인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러셀의 맨주먹이 그대로 거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아아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거인이 얼굴을 감싸며 물러났다. 그러고는 사방으로 검은 광선을 내뿜으며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러셀은 그 광선을 모조리 피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마안이 선명하게 빛나면서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내다보고 다음을 예측했다.
러셀과 거인 둘이 쏟아내는 마력과 열기에 뒤범벅이 된 거리가 무너지고 녹아내리며 흐르다가 반짝이며 가루가 되었다.
연달아 내지른 오른주먹과 왼주먹이 차례로 거인의 복부를 꿰뚫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피부가 우그러지며 등 뒤로 하얀 충격파가 원형으로 펑펑 텨져 나왔다.
속이 뒤집힌 거인이 입에서 피를 토하다가 러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는 뼈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른 후 활강하며 러셀을 바닥에 대고 짓이겼다.
단단한 판석을 머리와 어깨로 갈아엎던 러셀이 기습적으로 무릎을 접은 후 양발을 위로 차올렸다.
쾅 소리와 함께 거인과 러셀이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바닥을 구르던 러셀은 곧장 자세를 바로 잡은 후 다시 거인을 향해 달려갔다.
뒤로 나뒹굴었던 거인 또한 달려오는 러셀을 보며 으르렁거리다가 입을 쩍 벌렸다. 빈틈없이 다물려 있던 피부가 뿌드드득 찢어지며 수십 개의 검은 혀와 이빨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검은빛과 열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열기가 광선이 되어 쏘아지는 것보다 러셀의 주먹이 그 입에 틀어박히는 것이 더 빨랐다.
“쏴봐, 이 새끼야.”
그의 눈이 자색 안광이 줄줄 뿜어내다가, 종국에는 빛 그 자체가 되었다. 그 빛에 정면으로 노출된 거인의 안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뭔가를 알아챈 것처럼 거인이 부들거리며 러셀을 마주했다.
[너너너너너너는는는는는는누누누누누누]
고장 난 기계처럼 제대로 된 말도 하지 못하는 거인의 품 속으로 러셀이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갔다.
속사포처럼 쏘아지는 거인의 주먹과 중간중간 뿜어지는 검은 광선을 그대로 피하며 러셀의 주먹이 거인의 양쪽 옆구리, 무릎, 가슴팍을 후려쳤다.
그에 맞서며 거인 또한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러셀을 후려쳤다.
콰과과과과!
서로를 전력으로 박살내려는 두 거인이 주먹과 손을 휘두르는 것과 함께 두 갈래의 마력이 서로 부딪치고 깨져나가고 회전하다가 전격과 냉기, 검은 불꽃으로 격변했다.
시선과 시선이 오가는 찰나의 순간 검은 불꽃이 수십 갈래로 나눠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불꽃의 기둥이 되어 러셀의 가슴을 노리고.
그를 마력을 얼음으로 굳혀 만든 방패가 막아냈다. 그리고 쪼개진 얼음이 곧바로 벼락으로 화하며 거미줄 같은 전격을 거인에게 날렸다.
잠깐의 방심이 죽음으로 직결되는 아슬아슬한 곡예.
하지만 러셀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아직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그 속에는 아엘라시스의 마력이 그 잔재를 남기고 있었다.
아엘라시스를 알의 형태에서 용으로 일깨운 것은 그의 마력이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마력은 러셀의 의념이 잡아채기 쉬울 정도로 익숙했다.
거인과 주먹을, 마력을 나누는 와중에도 하늘로 번갯불 하나를 쏘아 보낸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러셀의 번갯불이 자취를 감춘 순간, 그 지점을 중심으로 일어난 창백한 빛의 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러셀에게 화답하듯 빛의 기둥을 내려보냈다. 거인의 오른 주먹이 러셀이 있던 자리를 내려치며 지반을 무너뜨린 것과 러셀이 높이 뛰어오른 것은 동시였다.
꽈릉-!
천둥은 늦었다. 하얗개 백열하는 벼락을 손에 쥔 러셀이 아래 보이는 거인을 향해 그것을 내던졌다.
신이 직접 천벌을 내리는 듯한 그 광경에 정면으로 맞서듯 거인이 고함을 지르며 온몸을 검은 불꽃으로 뒤덮었다.
두 거인의 여파에 도시의 지반이 흔들리는 정도를 넘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중에 토목 공사를 지을 때 꽤나 애로사항을 겪을 것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대치는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거인의 몸에서부터 일어났다.
연이은 주먹질과 거기 서린 러셀의 자색빛 마력에 거인의 신체가 점점 형체를 수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것이다.
[그그그그그만만만만만]
재생력이 새로 생기는 상처를 따라잡지 못하며 피를 줄줄 흘리게 만들었다. 마력이 점차 불안정해지고, 겨우 수육했던 육신의 구조가 점차 붕괴될 조짐을 보인다.
파지지직!
러셀의 손가락 사이에 자색빛 전류가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거인의 살점이 박살 나며 검게 타들어갔다.
거인의 부풀어오른 근육과 기괴하게 자라난 팔이 부러지고 뜯겨나갔다.
러셀이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인의 공격에 어디론가 날아갔던 대검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손아귀에 잡히자마자 마력을 불어넣자 대검의 칼날에 마력의 빛이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러셀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역수로 쥔 대검을 거인의 정수리에 꽂아넣고 나머지는 중력에 맡겼다.
그와 검의 무게가 거인의 머리부터 명치와 사타구니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선을 만들었다. 러셀의 마력에 거인의 근육이 매끈하게 배어나가며 막대한 피를 쏟아냈다.
[그아아아아아악!]
러셀의 마력을 견디지 못한 거인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 버둥거림에 대검을 놓고 러셀이 바닥에 내려서자 몸에 칼을 꽂아넣은 그대로 어디론가 달려나가려 했다.
부러진 다리와 팔을 어떻게든 움직이며 기어가는 거인의 속도는 놀라워서 순식간에 건물 세 채를 무너뜨리며 도시 바깥으로 뛰쳐나가려했다.
러셀은 그를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만 하던 거인의 옆구리에 충격이 찾아왔다.
몸이 거의 반으로 접힌 채 날아가던 거인은 오른발을 앞으로 뻗고 있는 러셀을 발견했다.
[그르르르······ 내가 어떻게 다시 이 세계에 돌아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날, 날 놓아줘라. 놓아준다면······]
“난 너한테 바라는 게 하나밖에 없어.”
터벅터벅 걸어간 러셀이 오른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산산조각난 네 몸뚱아리. 그거면 된다.”
두 눈에서 자색 안광을 눈부시게 빛내며 창백한 빛의 창을 쥔 러셀이 손을 내렸다.
쩌어어엉!
맹렬하게 사방을 불태우고 얼리고 흔들리던 모든 것들이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