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빙해
땡그렁.
창이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쿵, 쿠궁. 내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너지고 있었다.
건물이 신음하는 소리를 바탕으로 바닥과 벽, 천장에 균열이 가고 몇 안 되는 기둥들이 겨우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지.”
양 무릎을 꿇은 채로 제이비르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나? 러셀?”
마지막 서리를 고쳐 쥔 러셀은 천천히 다가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끄덕임을 본 제이비르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힘겨운 웃음을 지었다.
“얻기도 어렵고, 그걸 지키는 것도 어려워.”
제이비르의 고개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러셀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머리가 있는 높이는 점점 더 커졌기에 제이비리는 그의 가슴팍 언저리까지 밖에 시선을 들지 못했다.
“참 더럽게 살기 힘든 세상이야.”
팍!
빛살 같은 섬광이 제이비르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비스듬하게 잘려나간 제이비르의 머리가 바닥에 쿵, 떨어졌다. 단면은 매끈했다.
제이비르를 도끼로 참수한 러셀은 시선을 올렸다. 그가 대검을 꽂아넣었던 자리에는 사지를 축 늘어뜨린 리베부스의 몸이 벽면에 틀어박혀 있었다.
“죽은 척은 그쯤 하지.”
“······킥. 알고 있었나?”
“처음부터. 무슨 장난을 칠까 궁금해서 가만 놔두었던 것 뿐이지.”
머리가 갈라진 채 벽면에 붙어있던 리벤부스의 몸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정말 액체라도 된 듯이 주르륵 흐른 것이다.
검은 기름이 떨어지는 것처럼 무거운 소리와 끈적이는 점도를 그대로 내포한 채로 바닥에 철퍽이며 떨어진 곳에서 인영이 일어섰다.
팔과 다리에 끈적이는 검은 점액을 줄줄 흘리며 일어서는 인영은 얼굴이 없었다. 정확히는 머리라고 짐작되는 건 있었지만 이목구비가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 개의 입이 있었고,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눈 두 개가 좁게 붙어 있었다. 입이 있어야 할 자리는 평평했다. 양쪽에 달려 있어야 할 귀는 둥글게 말려 있었다.
사람의 얼굴이 아닌 얼굴을 한 리벤부스가 눈구멍에 달린 두 개의 입을 뻐끔거리며 말했다.
“반 년 넘게 공을 기울이고 있던 계획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틀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넌 누구냐?”
어느새 눈에서 자색의 빛을 희미하게 흘리고 있는 러셀이 말을 끊었다. 그의 눈에 리벤부스의 몸은 기괴하게 비쳤다.
단순히 그 외견의 기괴함 뿐만 아니라 그 속 또한 이상했다. 마치 유리창에 그어진 균열이 사람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틈새 사이에서 사이한 기운과 유독성을 띤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러셀의 눈이 빛나면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걸 본 리벤부스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신기하군, 그 눈. 단순히 상대방의 다음 동작을 예측하거나 마력의 흐름을 인지하는 게 아닌가? 내 모습이 보이는 듯한데.”
러셀은 두 번 묻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제이비르의 시체의 등에 꽂혀 있는 나힐니르가 저절로 떠오르더니 러셀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러셀은 대검을 그대로 날렸다.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 끝에서 리벤부스는 아까처럼 몸이 박살나거나 대검에 그대로 꿰인 채 벽으로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쩌엉!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팔을 들어 손으로 짐작되는(그 손가락은 열 개가 넘었다)것을 쫙 펼치자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던 대검이 허공에 부들렸다.
굉장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미세한 균열이 가듯 투명하게 쪼개진 시야가 왜곡된 상을 비췄다.
리벤부스는 자신의 왼손바닥을 뚫고 들어와 손등에 살짝 튀어나와있는 검극을 보며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속도군. 조금만 늦었으면 몸이 절반으로 쪼개졌겠는데.”
파삭!
그때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괴리됐던 공간의 균열이 수복되면서 대검이 튕겨 나갔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위로 치솟던 대검은 곧 무형의 힘에 우뚝 멈췄다가 다시 러셀의 오른손에 잡혔다.
러셀은 리벤부스의 왼손의 상처가 씻은 듯이 없어진 것과 그 육체가 아까보다 더 진해진 것을 확인했다.
팍!
그때 리벤부스가 스스로의 가슴팍에 오른손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주머니 속의 물건을 찾는 것처럼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아, 여기 있군.”
중얼거리던 리벤부스가 천천히 오른손을 명치 어림에서 빼냈다. 그 손에 잡혀 나오는 것은 등뼈로 이루어진 채찍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나? 당연히 이 몸의 전 주인은 아니야. 놈은 겁쟁이지. 흉측한 외모를 가리려 남의 외모를 빌리는 겁쟁이. 그런 놈에게 마약은 현실을 꿈으로 바꿔주는 훌륭한 도구였지. 난 기라드. 리헬라투르의 일원이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검붉은 기운을 줄줄 흘리는 뼈 채찍을 들어올린 리벤부스가 두 개의 입을 찢으며 말했다.
“일어나라!”
동시에 그가 채찍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깊은 흔적이 새겨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채찍의 강도나 단숨에 평범한 사람 심장을 한 번에 터트릴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너지는 홀에 가득한 피바다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것은 일견 네 발로 엎드린 짐승을 닮았다. 하지만 피부나 가죽 없이 새빨간 근육과 하얀 뼈를 그대로 드러낸 채 돌아다니는 짐승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지하 세계에서 살아가는 괴물들이 채찍의 주인이 내뱉은 부름에 따라 피를 매개로 중간계로 기어 나왔다. 등허리에 꾸물거리는 무수한 새빨간 촉수들과 길쭉한 머리통의 입에서 번뜩이는 이빨들은 혐오스럽기 그지 없었다.
“넌 너무 날뛰었다. 고작 인간 주제에 그런 무력을 갖췄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만 그래봤자 인간일 뿐이지.”
핏물에서 솟아오른 괴물들은 척 봐도 기백은 되었다. 마력을 통한 감지로 그 괴물들의 숫자가 정확히 122마리라는 것을 안 러셀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끌겠다는 거군.”
“거기까지 파악했나? 아쉬워. 그 좋은 머리와 근육이 우리의 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클클 거리며 웃은 기라드가 곧 웃음을 멈췄다. 눈구멍의 두 입이 말했다.
“죽여.”
카하아아아!
그 명령과 함께 괴이한 형태의 괴물들이 바닥을 박차며 일제히 러셀을 향해 달려들었다.
러셀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괴물들에 바로 대응하지 않고 그것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보유한 마력은 인간 기사를 상회하는 수준. 기사가 되는 데 보편적인 시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조건은 존재한다.
마력을 인지하는 것이 첫 번째, 마력을 몸속에 쌓는 것이 두 번째, 마력을 신체 강화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세 번째, 마력을 몸 바깥으로 뿜어낼 수 있는 것이 네 번째, 그 마력을 검이나 다른 무구에 둘러서 고체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다섯 번째다. 이 다섯 개의 조건을 통과하면 기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달려오는 괴물들에게서 뿜어지는 마력의 양과 괴성을 통해 발현되는 마력의 물리력 전환은 그런 기사들과 비교해보아도 부족하지 않았다.
군중의 한가운데 집어던진다면 능히 백 명을 참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무력은 끔찍스러울 정도다.
러셀은 기라드라는 이름의 변질된 기이한 육체를 가진 놈이 노리는 것을 짐작했다. 그는 러셀이 제이비르를 상대하는 것을 기다렸고, 또 이 괴물들을 상대하기를 기대했다.
상당한 마력과 체력을 소모시키고 싶다는 의도가 팍팍 전해졌다.
무슨 준비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력과 체력의 고갈은 초인과의 대결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무기 들어올릴 힘이 남아있지 않거나 그 무기가 사라진다면 결국 상대방이 미리 깔아둔 판세 위에서 춤을 추는 것 밖에 더 되지 않는다.
생각은 찰나에 끝났다. 그가 감각을 다시 세상으로 돌렸을 때는 마력이 서린 날카로운 여섯 개의 발톱이 그를 찢어발기기 직전이었다.
전후좌우와 위, 바닥을 파고 들어간 놈도 있는지 들썩거리는 발아래 지면에서도 섬뜩한 살의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코앞까지 다가온 마력의 포화와 괴물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 이빨, 발톱 앞에서도 태연했다.
“빙해.”
한숨처럼 내뱉은 말. 그러나 그 직후에 벌어진 일들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콰아아아아아-!
그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속성이 변하며 차디찬 한기가 되었다. 그의 강력한 의지와 익숙한 매개체를 통해 마력은 그 자체가 얼음의 주관자가 되어 사방을 자신으로 뒤덮고, 덧칠했다.
쩌저저저저저적!
족히 오 미터는 넘는 높이로 솟아오른 얼음판들이 서로 부딪치고 맞물리다가 더 날카롭게 쪼개지며 온 사방으로 덮쳐갔다.
바닥에 말라붙은 핏자국마저 순식간에 얼었다가 바스러지며 검붉은 모래 알갱이가 된다.
액체가 그럴 진대 괴물들의 말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막대한 압력과 덮쳐오는 뼛속까지 얼리는 냉기에 달려들던 괴물들은 허무하게 앞다리를 휘젓다가 그대로 횝쓸렸다.
뒤편에서 두 손을 모아 정교한 수인을 맺으며 죽은 제이비르의 시체에 마력을 쏟아붓던 기라드가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이런 곳에서 이 정도의 빙결 술식을!”
동시에 수인을 맺던 것을 취소하고 두 손을 앞으로 내민다. 당장 그의 코앞까지 대설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눈사태와 비견될 정도의 하얀 파도가 덮쳐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까 나힐니르를 막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공간이 사방으로 쪼개지며 여러 방향의 상을 동시에 비췄다. 마치 깨진 거울이 앞과 옆, 위와 아래를 비추는 듯한 광경.
그 위를 냉기의 파도가 훑고 지나간다.
영원과도 같았던 냉기의 파동은 한 번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드러난 결과는 마치 북해의 빙하가 현현한 듯한 광경이었다.
무너지던 건물은 붕괴가 멈춰있었다. 러셀이 모아들였다가 터뜨린 냉기의 해일이 균열에 스며들어 꽁꽁 얼린 덕분이었다.
얼어버린 기백의 괴물들 사이로 하얀 숨이 미끄러지다가 부서졌다.
그 자신도 냉기의 범위에서 피하지 못한 듯 러셀도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깨를 털자 하얀 눈 결정이 되어 아래로 사르륵 미끄러져내렸다.
하얀 세계에서 유일하게 검은 코트를 입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하얀 바둑판 위를 흑돌이 미끄러지는 듯한 형국이었다.
“준비한 게 혈액을 매개로 지하 세계의 괴물을 불러내고, 시간을 끌고, 제이비르의 시체로 하여금 뭔가를 소환해내려는 것이었나. 너무 훤히 보여서 지적해주는 것도 창피할 노릇이야. 안 그래?”
퍼엉!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원의 한 곳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가며 기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하얀 데 검은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라, 마치 그림자가 일어난 것만 같았다.
뒤틀린 이목구비를 지녔기에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기라드가 주위를 둘러보다 러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면, 결국 육탄전이 답이겠군.”
그리고 그의 몸이 두 개로 나뉘었다. 다양한 것을 보는 러셀조차도 그런 건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치 인간의 살갗과 뼈가 통째로 분리되는 듯한 괴리가 현실에 나타난 듯하다. 하지만 기라드는 두 개의 몸으로 분리되었으면서도 명확하게 사방을 인지하고 생각의 연속성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너에 대한 이야기 태반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을 뒤엎는군. 그 검은 로브 놈이 널 왜 그리 경계하라고 했는지 알겠어.”
“그놈이랑 아는 사인가?”
“같은 목적을 공유하는 사이지. 왜? 반가운가?”
“그놈은 어딨지?”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있겠지.”
러셀은 기라드의 말이 거짓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그들을 보고 있다면 러셀이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러셀은 더 말하지 않고 무기를 고쳐 잡았다. 기라드 또한 뼈로 된 채찍을 들어올렸다.
“사방을 얼음으로 뒤덮은 건 네 실책이다. 전사인 네가 빙판 위를 평지처럼 뛰어다닐 수는 없겠지. 스스로의 움직임을 제한한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걱정해줘서 고맙군. 일단 그 눈구멍의 입부터 뜯어놓고 시작해보자고.”
그리고 러셀의 도끼가 벼락같은 속도로 날아가며 기라드의 머리통 절반을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