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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02화 (203/225)

202화 무너지는 성

전성기의 제이비르 백작이 얼마만 한 무력을 쌓아두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최소한 10년에서 20년은 전의 이야기일 테니까.

마력을 통한 육체 노화의 저지에는 한계가 있고 그 이유 또한 다양하다. 정신력의 쇠퇴, 몸의 부상,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한 번 체내에 쌓은 마력은 어지간한 일이 없다면 그 몸속을 혈액처럼 돌며 순환한다. 마력의 양과 질은 후천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지만 재능의 한계 앞에서는 명확하다. 그리고 제이비르는 육체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 지언정, 마력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에 제이비르는 다른 수단을 강구했다. 영약과 마약의 조합, 마약에 중독된 마력 사용자들의 정신과 육체가 서서히 변질되는 과정,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강제적인 정신적 고양을 통해서 이끌어낸 마력의 높은 질 향상까지. 일련의 대대적인 실험을 통해 제이비르는 결과를 얻어냈고 그것이 바로 붉은 액체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체의 단련과 정신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방대한 마력을 흡수하여 그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신체로 탈바꿈된다는 말이 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롭고 강한 육체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왜 전설이라고 불리는지는 명확하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목격한 적 없고,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한 자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제이비르 백작은 그렇게 주장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확신이 들 만큼 그의 몸에는 힘이 넘쳐 흘렀다.

광소를 터트리며 달려든 제이비르 백작의 왼발이 바닥에 내려찍혔다. 그 일대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의 충격파가 터지며 러셀을 덮쳤다.

지반을 통해 들어간 마력이 기묘한 형상으로 변질되며 대지와 합쳐 오는 기묘한 공격에 러셀은 도끼를 드는 것으로 응수했다.

똑바로 세운 도끼의 칼날 앞에 충격파가 반으로 쪼개졌다. 러셀이 처음 한 수에 쓰러질 거라고는 당연히 예상하지 않은 듯 제이비르는 창을 쌍수로 들고는 달려들었다.

“나뒹굴어라-!”

쐐애액!

일체의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일격이 러셀을 향해 쏘아졌다. 창날에 서린 마력이 시뻘건 불길처럼 타오르며 러셀의 몸과 창극 사이에 있는 거리를 좁혔다.

러셀 역시 끌어올린 마력을 그대로 도끼에 밀어넣으며 휘둘렀다. 새하얀 냉기와 새파란 전기가 요란하게 회전하면서 도끼에 서렸다.

츠가가가가가각!

귀를 틀어막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격렬한 소음과 두 초인의 마력이 충돌하며 터져나온 여파가 사방을 덮쳤다.

“으아아악!”

“아악!”

넓은 홀에는 비명과 유혈이 쏟아지는 소리가 찬연했다. 두 초인의 공세는 그 여파만으로도 홀에서 아귀다툼을 하는 병사들을 날려버리기 충분했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제이비르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힘에 취한 듯 동작과 동작 사이에 허점과 빈틈을 많이 노출시켰다.

하지만 그 빈틈과 허점을 그대로 노리고 들어가도 제대로 된 상처를 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거대해진 그의 체구에 맞춰 무구도 성장을 한 것인지 아까보다 갑옷이 더 커졌고, 창대 또한 더 길어졌다. 도끼 창날은 단두대가 떠오를 정도로 커져 있었다.

수십 년 전 제이비르가 얼마나 대단한 창술을 가졌는지에 대한 증거는 러셀과 그의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이뤄졌다.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 수십 번 울리며 사방에 메아리쳤다. 러셀의 대검과 도끼가 빛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도끼창과 맞부딪칠 때마다 원형의 충격파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한순간에 수십 번을 넘게 찔러들어오는 창극과 도끼날, 그 사이사이로 불어닥치는 뜨거운 기운이 대기를 데우며 러셀을 불태우려 했다.

반대로 도끼에서 뿜어지는 한기와 벼락은 치솟는 열기를 억눌러 바닥에 내리꽂고 제이비르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쉴새없이 변환되는 창날의 초식과 도끼의 휘두름. 러셀의 커다란 덩치와 힘에 맞서면서도 제이비르의 창날은 흔들림없이 그 모든 도끼를 튕겨내고 있었다. 창날과 도끼가 서로 엇갈리는 찰나의 순간 제이비르의 앞에 러셀의 오른주먹이 뻗어졌다.

어깨에서부터 일어난 전격의 나선이 팔꿈치를 넘어 전완을 감싸며 주먹 끝에서 폭발했다. 수십 갈래의 전격이 제이비르의 전신을 관통하고 감전시켰다.

“그그그그그극!”

온몸의 근육이 수축하고 이를 꽉 다문 탓에 끓는 듯한 신음이 이빨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감전 탓에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제이비르를 향해 러셀이 도끼를 내리쳤다.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도끼를 보던 제이비르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지고 동공 속에서 어른거리던 붉은빛이 섬망을 반복했다.

콰득!

이빨이 부서지는 소리. 움직이지 않는 근육을 마력의 힘으로 억지로 움직이며 제이비르는 뒤로 몸을 날렸다. 떨어지는 도끼를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피한다. 그 간발의 차는 이마를 타고 내려온 도끼날이 코를 가르고 인중을 찢은 다음 턱 아래를 쪼갤 정도였다.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다리 근육이 파열되는 듯한 과격한 소리가 몸속에서 천둥처럼 울렸지만 결과적으로 제이비르의 선택은 옳았고 그는 목숨을 구했다.

“이 버러지 놈······!”

찢어진 입술과 쪼개진 턱 때문에 이상한 발음으로 욕설을 내뱉은 제이비르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마력이 기름을 부은 장작불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제이비르의 왼무릎이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올라왔다가 그대로 떨어지며 지반을 내려찍었다.

충격은 반경 100미터 범위의 모든 것을 전율시켰다. 돌멩이가 튀어 오르고 공기가 아우성을 치며 찢겨나갔다. 그리고 바닥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은 그 아우성에 진저리를 치며 부서졌다.

“아아아악!”

“커헉!”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엎드린 자들이나 갑옷이 으스러져 안쪽의 몸이 망가진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누님!”

정강이와 허벅지에 박힌 돌조각에 실리오가 나가 떨어지고, 그런 그녀를 바이젠이 다급하게 달려가 보호했다. 그가 마구 휘두른 칼질에 돌 파편이 부서졌다.

주변에 뿌려진 핏물을 그러모아 방어막을 펼친 칼리아와 그녀의 곁으로 몸을 피한 렉시가 귀를 움켜잡으며 비틀거렸다. 귀 안쪽이 상한 듯 피가 흐르고 있었고 안색마저 창백했다.

기침을 토하는 렉시의 입술에 옅은 핏방울이 비쳤다. 렉시의 부상을 알아챈 칼리아가 그녀를 부축했다.

“윽, 당신······?”

“고막이 상했다, 흑요정이여. 뒤로 물러나 있어라.”

아샤린은 아엘라시스와 함께 방어막을 펼쳐 충격파를 상쇄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된 방어막은 충격파의 영향을 받지 않아 멀쩡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명받은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샤린이 그들을 바라보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순간 그녀의 동공이 길쭉해지며 파충류의 것으로 변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도망쳐라. 저건 너희들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을 포기한 괴물이지. 도망쳐라.”

아샤린의 말을 들은 병사들의 눈앞에 희뿌연 장막 같은 것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병사들은 뭔가 명확해졌다는 표정을 지은 채 검과 방패를 버리고 동료들을 부축했다.

살아 도망친 병사들은 처음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나머지는 모두 죽어 쓰러져 있었다.

러셀의 눈이 바닥을 향했다. 제이비르가 내뿜은 충격파로 인해 죽은 병사들의 피가 그곳에 가득했다. 그리고 제이비르가 한 걸음을 내딛자 근처의 핏물과 살점이 그에게 굴러갔다. 모인 피와 살점은 제이비르의 근처에 다다른 순간 사라졌다.

-칼리아.

-알고 있다. 지금 지배력을 최대한 전개시키고 있는 중이다.

칼리아는 러셀의 말을 듣자마자 대답했다. 제이비르에게 빨려들어가는 핏물을 막으라는 러셀의 의도를 진작 읽고 이미 피에 대한 지배력을 펼쳐놓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이비르를 중심으로 3미터 정도의 반경에 들면 그의 주위로 핏물이 흘러가며 기화해버렸다.

도끼를 왼손에 든 러셀이 입을 열었다.

“그 권력은 어느 정도까지 이르러야 만족 되겠나? 이제 와서 제국의 중심에 이르고 싶다는 게 지금의 목적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내가 원하는 건 투쟁이다! 한없이 싸우고 싸워서 서로의 심장을 파헤치고 피를 마시는 것! 그게 지금 내가 원하는 일이야!”

제이비르가 홀을 가득 메우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길쭉한 미소를 짓고 있는 표정 아래에는 붉은 액체를 마시고 난 후부터 극적으로 젊어진 얼굴과 숨길 수 없는 광기가 엿보였다.

동시에 그의 온몸에서부터 붉은 기운과 함께 마력이 약동하면서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크흑, 크흐으으······!”

주변을 붉은 기운의 오오라로 물들이며 심호흡하던 제이비르가 아까보다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평생을 노력했음에도 닿을 수 없는 목표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선사하지. 언젠가는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그럼에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의심이 교차하는. 마력만으로는 늦출 수 없는 노화는 결심을 너무 빠르게 풍화시킨다.”

우우우우우······.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귀곡성이다. 제이비르 백작의 주변으로 사악한 기운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막 시체가 된 병사들의 혼이 이끌리고 있었다.

“인간을 벗어나야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든지 벗어나 주겠다. 조금만 더, 잘할 수만 있다면.”

“네 병사들과 도시의 사람들을 모두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제이비르 백작이 러셀을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와 자청색의 눈동자가 얽히며 허공에서 불티를 만들었다. 정확히는 러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마력과 기세가 제이비르의 마력과 부딪히며 생겨난 불티였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도덕과 규범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사람이 정한 규칙이니.”

무엇이 옳고 그런지 설전을 벌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할 수 있는가와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고찰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거지의 욕망과 부자의 욕망은 다르고, 시각장애인과 앉은뱅이의 욕망은 서로 다를 것이다.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완전히 늙어버려 더 이상 창을 쥘 힘도, 몸을 가눌 여력도 없어진 늙은이가 젊은 나날을 되찾고 이루지 못하리라 여겼던 목표에 대해 다시 불꽃을 되살리려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희생기키려 한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부질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내 권리지. 네 헛짓거리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거다. 내가 네 앞에 있으니까.”

더 이상의 문답은 없었다.

“아아아아-!”

제이비르 백작이 도끼창을 휘둘렀다. 러셀이 마주 도끼를 갖다 대었다. 굉음과 함께 원형의 충격파가 일어나며 섬광이 번쩍였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바닥의 대리석이 순간 바깥 방향으로 깨져나가며 눕혀지고 돌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홀 뿐만이 아니라 내성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천장을 떠받친 기둥이 쩍쩍 갈라지며 불길한 비명을 토했고 천장에서는 오래 묵은 먼지가 떨어졌다.

쫘자자자자작!

러셀의 왼팔에서 일어난 전류가 그대로 도끼에 스며들더니 냉기를 머금은 벼락이 일어났다. 그가 도끼를 허공에 대고 횡으로 긋자 반월형의 냉기벼락이 날아갔다.

콰아앙!

한 번의 휘두름으로 그 냉기벼락을 도끼창으로 깨부순 제이비르 백작이 시뻘건 마력을 일으켰다. 도끼창날을 붉게 달아오르며 일어난 마력의 해일이 허공을 물들이며 러셀을 덮쳤다.

선이 아니라 면으로 쏘아져 오는 마력의 해일에 러셀은 오른손으로 들었던 대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마력 해일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뛰어든 러셀이 다리를 바닥에 박고 온힘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양팔이 허리를 따라 움직이면서 커다란 원호를 그렸다.

꽈아아앙!

양손으로 창대를 쥔 제이비르 백작이 그 공격을 견뎌냈다. 하지만 완전히 충격을 상쇄시키진 못하고 속절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의 다리가 단단한 대리석을 진흙처럼 뭉개며 박혀 들었다.

모종의 물질로 환골탈태한 듯이 바뀐 육체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있음에도 완전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제이비르로 하여금 전율시키게 했다.

“60년을 살아왔음에도 이제야 겨우 너 같은 전사가 내 앞에 서다니. 그것도 내 숙원이 풀릴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운명의 장난이 바로 이런 것인가?”

허탈한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제이비르 백작이 바닥에 박힌 다리를 뽑았다. 그리고 마력을 일으켰다.

화르르르르!

마치 불꽃처럼 그의 전신에서 새빨간 마력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고절한 수준의 무예를 습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북방의 것이겠지. 네 검에서는 북부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냉기나 한기와 같은 마력의 성질 변화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상대를 철저히 죽이겠다는 차가운 살의.”

제이비르 백작이 표정을 굳힌 채 러셀을 바라보았다.

“자하드 영지에 대한 핏값을 받아내겠다는 것도 그렇고, 그 얼굴이나 눈도 그렇고. 오래 전 스치듯이 들었던 공작가의 자식이 떠오르는군.”

러셀은 대꾸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어렵다는 것을 안 제이비르 백작이 창을 똑바로 세웠다.

다시 푸르고 붉은 두 갈래의 섬광이 번뜩였다. 사방에 매아리 치는 것은 오직 마력이 훑고 지나간 잔향 뿐. 화려하고 웅장했던 홀은 점차 무너지고 비틀리며 터져 나가고 박살났다.

와르르르르릉!

급기에 기둥들이 하나 둘씩 균열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막대한 하중을 균등하게 나눠 받치고 있던 기둥들이 부서지자 천장 또한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막대한 굉음이 요동치는 공간 속에서 러셀이 전성을 날렸다.

-칼리아, 아엘라. 밖으로 나가. 여긴 무너질 거다.

칼리아는 두 번 묻지 않았지만 아엘라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무너지는 건물에 러셀을 두고 가는 게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을 전하려 했지만, 그보다 쪼개진 천장이 떨어지는 게 더 빨랐다.

전성을 날린 러셀은 이제 앞에 집중했다. 다섯 개의 참격이 그의 몸을 조이며 날아들고 있었다. 참격에 서린 마력의 파동이 심상치 않았다.

‘벤다’라는 개념에 집중되어 있는 참격에는 날아드는 것만으로 그 주위의 공간을 베고 있었다. 그 베는 것에 마나의 작은 입자마저 갈라졌다.

강제로 각성한 제이비르의 의지가 그만큼 세밀하게 집중되었다는 뜻이었다. 참격이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찰나의 순간 속에서 러셀은 눈에서 안광을 빛내었다.

찬연하게 비치는 안광의 꼬리를 주욱 남기며 러셀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 잔상이 마치 길게 잡아 늘인 것 같이 시야에 남는 것을 보며 제이비르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1초를 더욱 세분화시킨 것만 같은 무수한 시간의 틈새 속에서 러셀은 도끼를 휘둘러 참격을 얼렸다. 허공에 고정되어 멈춘 참격.

유령처럼 움직이며 참격의 범위에서 벗어나 걸어오는 러셀을 보며 제이비르는 한 손으로 창을 치켜들었다. 마력이 창대를 중심으로 휘몰아쳤고, 창날이 붉게 빛나며 번쩍였다.

제이비르가 그 창을 던지는 것과 러셀이 빈 손을 들어 허공을 잡아챈 것은 동시였다.

창대가 손아귀를 떠난 순간, 뭔가가 제이비르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칼이 가슴을 꿰뚫고 앞으로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경험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일생에 한 번이면 충분할 그 경험을 손으로 느끼기 위해 제이비르는 그것을 더듬었다.

매끈해진 피부 위로 생채기가 생기며 피가 흘렀다. 눈앞이 흐려지고 몸이 무거워졌다. 동시에 뱃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뭔가가 식도를 넘어오려는 감각이 전해졌다. 쓰린 위액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제이비르의 무릎이 천천히 꿇려지면서 고개가 숙여지려 했다. 등에 튀어나와 있는 칼 손잡이의 폼멜이 붉은빛을 흘렸다.

제이비르는 남은 힘을 쥐어짜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던진 창이 어떻게 되었나 보기 위해서였다.

창은 허공에 꼿꼿이 고정되어 있었다. 피가 뚝, 뚝 떨어졌다. 코앞에 들이민 창날을 오른손으로 움켜쥔 러셀이 그것을 아래로 내렸다.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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