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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01화 (202/225)

201화 잃게 만드는 것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러셀은 굽혔던 무릎을 펴며 마력을 통해 주변을 감지했다.

대전은 모든 출입구가 막혔다. 내성의 다른 곳으로 통하게끔 만들어진 통로들 또한 모두 가로막혀 있었다.

그가 앞을 바라보자 갑옷을 입은 제이비르가 천천히 보좌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변화가 일어났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금빛을 띄었고, 길게 늘어져 있던 수염은 짧아지며 피부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붉게 빛나는 동공 속에서는 뱀의 서늘함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을 차갑게 얼렸고 생기를 되찾은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입김은 하얗게 바스러졌다.

젊은 외모와 힘을 되찾은 제이비르 백작이 높은 곳에서 러셀과 일행들, 병사들을 오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불쌍한 병사들은 갑작스레 전환되는 상황에 혼란과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내성만을 지키기 위한 경비 병력에 해당하는 병사들에게 적절한 명령은 침입한 적들을 공격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러셀 일행은 별다른 무장 해제를 하지 않은 채 내성의 홀까지 들어왔다. 그에 대비한 듯 마력 사용자인 기사들이 10명이나 모여 있기는 했지만 통상적인 접대 방식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병사들의 혼란과는 상관 없이 제이비르 백작은 온몸에서 마력과 함께 기세를 일으켰다.

굉음과 함께 그에게서 퍼져 나온 마력이 넓은 홀을 뒤흔들었다.

“때가 되었다.”

제이비르 백작이 한층 젊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음성이 넓은 홀을 꽉 채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웅웅 울리기 시작했고,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자들은 귀를 틀어막은 채 웅크렸다.

“더 이상 변경에 주저앉아 외곽만 바라보는 건 그만둘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 브라실트는 후계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는 전쟁으로 지위를 획득하셨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자식인 나 또한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도리겠지.”

“꿈에 젖은 헛소리는 침실에서나 하는 거다.”

보좌에서 일어선 제이비르는 러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표정을 조금 일그러뜨리고는 손을 들어 러셀과 그의 일행들을 가리켰다.

“저들의 수급을 취해라. 참전의 시작을 알리는 좋은 포고가 되어줄 것이다.”

갑자기 젊어진 군주의 말이었으나 기사들은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충성과 복종은 기사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였고 그를 본인의 가치와 신념으로 대입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기사들의 표정은 유달리 불안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혹은 올 것이 왔다는 감정만을 내비치고 있었다.

로셀소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가 그의 호위 기사의 부축에 겨우 섰다.

“아버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신을 완전히 놓으신 겁니까?”

“난 그 어느 때보다도 정정하다. 로셀소. 지금이 우리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기회라니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게 무슨 기회란 말입니까!”

제이비르 백작은 아들의 호소에 자신의 손을 들어보였다. 주름살 없이 매끈해진 손등과 손바닥이 보였다. 검버섯이 피었던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언제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힘이 그 속에서 맥박치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미증유의 힘을 온전히 느끼며 제이비르 백작이 입을 열었다.

“너도 나와 같아질 수 있다. 로셀소. 이리 와서 충성을 맹세하고 그분의 피를 마셔라. 힘을 얻고 싶지 않으냐? 언제나 내 자리를 원한 것이 아니었느냐? 다 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면.”

“······아버지.”

단말마처럼 들리는 말을 내뱉은 로셀소를 그의 호위기사들이 뒤로 잡아끌었다. 고개를 저은 제이비르가 손짓했다.

“일이 끝나면 다시 부르겠다. 길을 틔워라.”

병사들이 물러선 자리로 로셀소의 모습이 사라졌다. 병사들이 틔웠던 길은 다시 병사들로 채워졌다.

“가라.”

명령이 내려졌다. 전신 갑옷과 무기를 든 채 천천히 기사들이 다가왔다. 기사들은, 평균적으로 인간 백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다.

어디까지나 평균이 그렇다는 것이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기사가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의 숫자는 들쭉날쭉한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평균값이 도출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얼마나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서 인간들을 도륙 냈는지에 대한 사건이 충분할 정도로 모였기 때문이다.

기사 열 명, 도합 인간 천 명 분의 전력이 밀고 들어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러셀은 담담한 표정으로 도끼와 대검을 들었다.

두 무기 모두 한 손은 커녕 양손으로도 다루기 어려울 크기와 외양이었지만 러셀은 나뭇가지를 쥐어 올리는 것만큼이나 가볍게 들었다.

“전투에서 죽는 건 영예로운 일이겠지.”

그리고 러셀과 그 일행들에게 기사와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난잡한 혼전이 일어났다.

돌아가는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보던 칼리아는 마력을 담은 목소리를 러셀에게 보냈다.

-놈이 마신 액체는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그 액체가 맞다. 사람을 죽이고 정제한 힘을 액체로 녹여낸 것이다. 황자의 후원자에게 저런 것을 선물한 이가 있다면, 그 배후는 흑마법을 사역하는 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황자의 연결고리에 그런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알았어. 아엘라와 같이 움직여. 아샤린이 보조해줄 거다.

그의 전성을 들은 아샤린이 투덜거리는 음성을 바람에 실려 보냈다.

-난 네 부하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아엘라시스의······.

-푸념은 끝나고 듣지.

말을 끊은 러셀이 좌우로 대검과 도끼를 휘둘렀다. 육중한 파공성과 함께 나무로 만들고 테두리에 강철을 두른 단단한 방패가 산산이 부서지며 병사들이 나뒹굴었다.

부러진 팔에 비명과 신음을 지르는 병사들을 건너뛰며 열 명의 기사가 제각기 무기를 휘둘렀다.

네 개의 칼날이 나힐니르의 검신 위를 두드리며 쇳소리를 냈다. 각자 전방과 좌우, 위에서 날아온 검이었다.

나머지 여섯 개는 그보다 조금 더 낮게 들어왔다. 러셀은 이 기사들이 합격술을 연마했음을 알아챘다.

정박자보다 약간 엇박자로 들어오는 후속타는 하루 이틀의 훈련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다.

러셀의 발이 잔상을 일으킬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대검이 네 개의 칼날을 튕겨내고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대검은 그 육중한 외양과 무게가 무색할 정도로 가볍고 빠르게 움직여 기사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선보이려 했다. 물론 내장은 함부로 세상 밖에 선보일 만한 것이 아니다.

그 빠른 움직임에 대경한 기사들이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린 다음 검에 주입했다. 잠시지만 신체에 할당되어 있던 마력까지 한데 끌어모아야 할 정도로 대검의 기세는 매서웠다.

꽈릉, 소리와 함께 벼락이 터졌다. 네 명의 기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전신에서 연기를 일으키며 나가떨어지는 동안 나머지 여섯의 기사들은 곧게 찔러가던 검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성공하진 못했다. 대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벼락을 일으킨 러셀이 뒤로 빙글 몸을 돌렸다.

스치듯 바닥을 가로지른 그의 발놀림과 흔들리는 몸에 여섯 개의 칼날은 모두 목표한 지점을 벗어나 엉뚱한 허공을 베었다. 그런 거구가 그렇게 유려한 발놀림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는 기사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흩어져라!”

나가떨어진 넷 중 가장 윗줄의 놈은 없던 것 같았다. 남은 여섯 명의 기사 중 하나가 그리 외치자 모두가 러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정확히 여섯 개의 꼭지점을 그린 채 그를 포위하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뿜어지는 마력은 러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과 동시에 운신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을 본 러셀은 씩 웃었다. 그리고 정면에 위치한 기사를 향해 나아갔다.

순간이지만 기사들은 러셀의 움직임을 놓쳤다. 마력을 눈에 집중시켜 안력을 돋우고 나서야 그들은 겨우 러셀이 움직인 잔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정면에 섰던 기사는 잠깐의 틈을 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사이 다른 동료 기사들이 그 틈을 향해 검을 찔러줄 것이라고.

하지만 휘둘러져 오는 대검에 자신의 검을 비스듬히 갖다대어 흘리려 했을 때 기사는 알았다. 이 일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흘리고 말 것도 없이 빠르게 짓쳐들어오는 대검의 칼날에 기사의 상반신이 쪼개졌다.

정면의 기사를 처치한 러셀은 곧장 몸을 돌렸다. 동료를 잃었음에도 감정을 분출하지 않은 나머지 기사들이 내지른 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타점을 잃은 검들이 허공을 쳤을 때 러셀의 도끼가 개중 한 명의 기사를 두 동강 냈다.

피는 쏟아지지 않았다. 베인 순간 얼어붙은 기사의 나뉜 단면이 좌우로 쓰러졌다.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쓰러지는 소리는 요란했지만 홀을 울리진 않았다. 이미 150이 넘는 병사들과 러셀의 일행들이 싸우면서 내는 소란 때문이었다.

피로 이뤄진 갑주와 투구를 쓴 칼리아와 똑같이 갑주를 소환한 아샤린이 병사들을 치우고 있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치우는 것이었다.

칼리아의 혈창이 병사들 사이를 헤집어 곧게 찔러나갔을 때, 혈창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붉은 핏방울을 뿌렸다. 핏방울에 닿은 병사들은 몽롱한 표정을 짓더니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샤린은 그보다 조금 더 과격했다. 톱날 대검을 들지 않은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창이나 방패를 휘두르며 정확히 병사들의 뒤통수를 때려댔다. 용족의 근력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 병사는 없었고, 모두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다.

순식간에 홀을 훑은 러셀이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일행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전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의 눈이 가진 능력 덕분이다.

러셀의 눈이 잠깐 빛을 발하며 반짝였다. 마치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의 경로가 그려지듯 펼쳐졌다.

그는 거기에 맞춰 도끼를 갖다대어 흘리거나, 비끄러매거나, 튕겨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 모든 동작은 찰나에 수행되었고, 합격술을 날린 기사들은 동시에 중심과 균형을 잃은 채 나동그라지는 자신과 동료들의 모습에 경악을 참지 못했다.

“어, 어떻게?”

마무리는 얼음의 도끼였다. 한순간 시야를 하얗게 가로막는 섬광과 한기에 균형을 잃고 넘어진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바닥에 내려선 러셀은 얼음 동상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감싼 기사들은 모두 다른 자세를 취한 채 굳어 있었다.

검으로 앞을 막거나 방패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거나 위로 뛰어오르려고 한 듯 무릎을 굽히거나 옆으로 틀기 위해서 허리를 비튼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냉기의 파동 속에서 굳어버려 완성되지 못한 미완의 결과물만을 낳았다.

순식간에, 굳이 시간을 재자면 1분도 되지 않는 순간에 기사 열 명이 무력화되었다. 러셀 혼자서 인간 천 명 분의 무력을 손쉽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자못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 인간 천 명을 압도할 수 있는 무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어떤 인간 마법사나 검사도 1분안에 인간 천 명을 죽일 수는 없다. 전설에 기록되어 있는 숱한 영웅들을 데려와야 겨우 그 위치가 비등해질 것이다.

대검과 도끼를 한 차례 턴 러셀이 얼음 동상 사이를 빠져나와 보좌가 있는 단상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하려 했든, 제이비르가 어떤 순간을 놓친 것은 분명했다.

그는 약간 주춤한 채 아래를 보다가 러셀을 마주 보았다. 자청색의 시선과 붉은 시선이 교차하고 마주 엉키다가 매듭처럼 단단히 묶였다.

그 매듭을 잘라낸 것은 벽면에 박힌 자신의 몸뚱이를 빼기 위해 용쓰던 리벤부스의 성난 외침이었다.

“너 때문에! 내 얼굴, 내 얼굴이!”

뒤의 외침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노와 증오가 섞인 채 내뱉어지는 고함은 곧 마력이 담긴 공격 자체가 되어 넓은 홀을 울리기 시작했다.

쾅!

그리고 그 머리에 대검 한 자루가 깊숙이 박혀들었다.

“시끄럽다.”

머리에 나힐니르가 꽂힌 리벤부스가 사지를 늘어뜨린 자세로 축 늘어졌다. 그 아래의 제이비르 백작이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단상을 내려왔다.

그의 손에는 창이 들려 있었는데, 창날에 해당되는 날붙이의 길이와 크기가 통상적인 것보다 훨씬 크고 길었다.

기형적인 창을 양손으로 쥐어 올린 제이비르가 그것을 러셀에게 겨누었다.

대화는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

단상의 계단을 박차고 뛰어오른 제이비르가 길쭉한 자루를 휘둘렀다. 그 끝에 달린 커다란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뒤로 물러서며 내려치는 창날을 피한 러셀이 마지막 서리를 휘둘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원호를 그렸다.

창을 회수한 제이비르 백작은 오른손과 왼손을 자리바꿈하며 창대를 휘저었다.

크게 엑스 자를 그린 창날이 도끼를 튕겨내며 바닥을 긁었다. 단단한 대리석으로 지은 바닥이 깊게 파이며 돌가루를 흘렸다.

젊어진 제이비르 백작은 전신에서 웅혼한 기세를 터트리고 있었다. 노화와 세월의 힘이 벗겨내기 전의 전성기를 완전히 되찾은 제이비르가 러셀에게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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