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00화 (201/225)

200화 변질

***

내성을 향해 가는 길은 소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입가에 피칠갑을 한 채로 떠밀리듯이 걸어가는 데피너스와 여전히 두려운 기색의 병사들이 3열 횡대로 걸어가고.

그 뒤로는 러셀과 그 일행, 칼리아와 아엘라스, 아샤린과 실리오 바이젠 남매, 렉시와 로셀소가 따라가고 있었다. 로셀소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는 전날 밤 잠들기 전 러셀이 들려주었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북부의 도시들에 혼란을 일으켰다고? 그것도 아버지가 직접 명령을 했단 말인가?’

북부의 도시들이 혼란에 빠질 경우 일어날 일은 명약관화다. 그 도시들은 이빨과 같다. 또는 울타리, 목책, 방파제라고 불러도 될지 모른다.

언급한 것들이 하는 일은 당연히 외부의 침입을 저지하는 것이고 그 외부의 침입이 뭔지는 또한 확실하다. 아직 미지와 오지로 남아있는 아운힐나르 산맥이 바로 그것이다.

대륙의 최북부에서 설원과 눈폭풍으로 많은 여행자들을 좌절시키고 발걸음을 돌리게 하며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석으로 세우는 그 얼음 산맥에는 괴물들이 산다.

세상에는 지맥이라 하여 특정한 마력의 기운이 길을 따라 흐르는 것과 같은 현상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 존재한다. 아운힐나르 산맥과 콜레보른 호수, 망각의 바다 등이 그런 지역들이었다.

지맥이 공유하거나 관통하는 지역의 공통점은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모이는 장소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장소는 필연적으로 마물들을 불러일으켰다.

북부의 대도시들은 그런 마물들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 이빨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 도시들에 괴물들을 풀어 사람들을 학살하고 방어 병력을 줄인다는 것은 그 아래, 중부와 남부 지방의 사람들을 마물의 위협에 노출시킨다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북부의 도시들이 타격을 입게 되면 이빨이 사라진 잇몸, 곧 다른 지방들이 뒤이은 마물들의 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대륙의 중부나 남부까지 마물들이 밀고 내려오진 않겠지만, 지도 제작자들은 북방의 한계선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연히 수만, 많으면 수십 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이주하게 될 것이고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안정되지 못한 지금의 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그런 명령을? 무슨 목적으로 하신 거지?’

로셀소가 잘 알듯이 그의 아버지 제이비르 백작은 공공연히 황자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서며 다스리는 영지들과 도시에서 걷은 돈을 황자에게 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싶어했으면서도 이제까지 그러지 못했던 것은 성격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인 로셀소가 자신의 아버지를 평가한다면 수박을 삼키려 드는 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수완이 좋고 음흉하긴 하지만 입을 벌려 삼키기엔 너무 큰 것을 먹기 위해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뱀. 더군다나 수박을 통째로 감싸서 부숴먹기에는 체급 또한 작기에 계속해서 주위만 맴도는 것을 반복하는 뱀이 떠올랐다.

로셀소는 저 앞에서 걸어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러셀은 확연히 눈에 띄는 덩치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 또한 러셀이 데피너스와 대치하는 것을 여관 안쪽에서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렵고 강력하게 여겨졌던 마법사인 데피너스가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무참하게 쓰러지는 것 또한 지켜봤다.

로셀소에게 그 장면은 충격이었다. 어릴 적부터 항상 똑같은 외견과 옷차림으로 아버지 제이비르를 보필하던 마법사가 러셀의 따귀에 피를 질질 흘리는 모습은.

그들의 곁에서 걸어가는 병사들이 보였다. 막강한 힘들의 격돌에서 아무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자들. 갑옷과 투구의 단단함은 더 이상 공격을 막아줄 방어구로서의 믿음이 상실된 지 오래다.

마법을 직접 가르고 깨부수는 러셀을 바로 앞에서 봤는데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긴장을 억누르지 못한 건 장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호위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기사이고 그렇기에 러셀의 기량을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데피너스가 쏘아낸 충격파 마법을 도끼 한 자루로 가르는 위용은 상식선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마법은 보통 피하거나 시전되기 전에 먼저 마법사를 처치하는 것이지 정면으로 날아드는 것을 깨부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 러셀이라는 남자는 어린아이의 나뭇가지를 빼앗는 것처럼 가볍게 해냈다. 그것이 호승심과 두려움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다.

맨 뒤편에서 로셀소와 호위기사들이 걸어갈 때 그들의 앞에는 아샤린과 아엘라시스가 있었다.

아샤린은 아엘라시스에게 궁금한 것이 많고 묻고 싶은 것 또한 많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녀가 묻는 것 대부분은 현재의 아엘라시스가 대답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가령 용들이 왜 다 사라졌는지나 왜 용족들이 탄생하게 된 것인지 등에 대한 진실은 아엘라시스도 몰랐다. 그녀에게 전승되는 기억과 힘은 그녀의 성장에 따라 일부분씩 주어지고 있었고 거기에 아직 그런 진실들은 들어있지 않았다.

아샤린은 그렇기에 동행을 해도 될지 물었고 그렇기에 지금 러셀 일행과 같이 브라실트의 내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성의 성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차츰 합류하는 병사들의 수가 많아졌다.

실리오와 바이젠은 약간 불안이 담긴 눈빛으로 차츰 수가 늘어나는 병사들을 지켜보았다. 그들 중에는 기사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고 몇몇은 쉽사리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력의 질과 양이 뛰어났다.

대전에서 러셀 일행의 걸음이 멈췄다. 넓은 대전은 홀의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대전의 출입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자 사위는 조용해졌다.

러셀은 홀의 곳곳, 기둥 뒤와 벽면에 서 있는 병사들과 그들 앞에 나서 있는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앞, 홀의 끝에는 보좌가 있었다. 백작의 이름값을 고려해보아도 성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컸던 내성답게 그 보좌 또한 화려했다. 금붙이와 보석이 장식되어있는 보좌에 제이비르 백작이 앉아있었다.

그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브라실트와 그의 영지가 위치한 곳이 군사가 거병하기 좋은 곳이 아니고 변경을 지키기 위한 거점으로도 좋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이다.

하지만 그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팔걸이에 얹어놓은 채 앉아 있었다.

예순에 필적한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육체가 돋보인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을 가지런하게 정리하고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수염 또한 위엄을 돋보였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그 눈이다. 마치 뱀처럼 번뜩이는 그 눈은 40년 넘게 대도시의 영주 자리를 지킬 수 있던 것이 그저 운 덕분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이비르는 데피너스가 데려온 러셀 일행을 죽 둘러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복잡한 구성이 보이는 무리였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남자나 그 곁에 선 여자, 드문 머리카락 색깔을 지닌 소녀와 키가 무척 큰 여자, 남매로 보이는 닮은 남녀, 그리고 흑요정까지.

그가 입을 열었다.

“데피너스, 그게 무슨 꼴인가?”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데피너스는 뭐라 변명도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런 데피너스를 일별한 제이비르가 사람들을 훑던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입을 열기 전 러셀이 먼저 말했다.

“자하드 영지를 헤집어놓으라고 명령한 게 늙은이 맞아?”

“이놈이!”

“어디 안전이라고!”

러셀의 말에 분기탱천한 기사들이 한꺼번에 무기를 뽑아들었다. 잠깐 쇳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10명의 병사와 150명이 넘는 병사들의 시선 속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던 러셀이 목을 좌우로 툭툭 꺾었다.

“오래 걸렸다. 여기서 밀린 일을 해치우도록 하지.”

“이유를 묻지는 않나? 왜 그런 일들을 벌였는지?”

“하잘 것 없는 이유겠지.”

“하잘 것 없는 이유라고.”

러셀과 제이비르의 눈이 마주쳤다. 제이비르가 미소를 지었다. 눈과 마찬가지로 뱀을 연상하게 만드는 차가운 미소였다.

“네가 내 도시에 들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행적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았지. 최근 1년간 여러 굵직한 일에 발을 걸쳐 놓았더군.”

러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비르 또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신기한 일이지. 아무도 내게 왜 그렇게 제국의 중심에 다가가려 하는지 묻지 않더군. 그저 날 방해하거나, 아니면 은근히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지 물을 뿐이야.”

제이비르가 손을 내밀자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시종이 걸어와 잔을 건넸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붉은 액체를 유심히 바라보며 제이비르가 말했다.

“왜냐면 그들 또한 알기 때문이지. 권력과 힘에 대한 묘한 매력을. 그건 모든 걸 더 낫게 만들어주지. 보다 좋은 여자, 보다 좋은 친구, 보다 좋은 지도자, 보다······ 나은 인간.”

“아버지.”

그때 로셀소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병사들은 그제야 로셀소가 홀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로셀소. 왜 거기 있느냐?”

“물을 것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황자가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로셀소의 물음에 제이비르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서른이 넘은 아들은 영주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불평불만 없이 조용히 곁을 지키며 가신 노릇을 해왔다.

이따금씩 제국의 수도에 갈 때마다 관리자의 역할을 맡겨놓아도 로셀소에게서 제이비르를 거꾸러뜨릴 힘을 기르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제이비르는 그것이 기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만족스러웠다.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건 알고 있으나 그랬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육체는 예전만 못하다.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증진시키려 노력했던 마력은 그의 제어를 벗어난 채 흩어지고 기력은 쇠하고 있었다.

“과거를 되돌려준다고 했다.”

“과거요?”

“잃어버린 시간. 젊음. 무엇이라 해도 좋겠지.”

제이비르는 유리잔을 그대로 들며 제이비르가 러셀을 바라보았다. 한쪽 입가가 미묘하게 비틀어진 얼굴이었다.

“난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유리잔을 입에 가져가며 그것을 마시려 했다. 러셀이 벼락같이 움직여 도끼와 대검을 꺼내 그에게 날린 것은 동시였다.

아무도 러셀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제이비르와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들조차 눈동자를 굴리며 다리에 힘을 주는 것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시간을 길게 잡아 당겨 늘린 것 같은 공간 속에서 러셀은 무언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마력과 기운이었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쩡-!

병사들이 귀를 막은 채 나뒹굴었다. 기사들은 재빨리 마력을 일으켜 신체를 보호했기에 타격을 입지 않았다.

공중에서 일어난 격돌로 밀려난 러셀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는 달리 홀의 벽에 틀어박혀 있던 자가 마주 고개를 들며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미친 건가?”

한눈에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러셀은 그의 몸속에서 폭발적으로 텨져 나오는 마력의 기세를 보며 눈가를 좁혔다.

“폭주 중이군.”

“카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리벤부스가 재차 러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전에 지녔던 기량과 몸놀림이 사라진 채로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목과 허리를 갈라버린 러셀이 고개를 돌려 제이비르가 앉아있는 보좌를 바라보았다.

기사와 병사들은 혼란에 빠진 채 웅성거리고 있다. 누가 보아도 괴물처럼 생긴 것이 갑작스레 백작의 뒤에서 나타나 러셀을 덮치고 공격한 것이다.

“백작님?”

누군가 제이비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보좌에 앉아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유리잔이 떨어졌다.

파삭 소리를 내며 유리잔은 가볍게 깨져나갔다. 그리고 제이비르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붉은 빛이 일렁이며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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