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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99화 (200/225)

199화 내성

“데피, 데피너스 돌로렌이다! 이 저급한 야만인 자식아!”

데피너스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20센티 정도 떨어져 있는 공중에서 하기에 썩 괜찮은 행동이라 하기 어려웠다.

가까이 했던 얼굴을 뒤로 물린 러셀이 말했다.

“엘프들은 다 그렇게 겁이 없나? 아니면 너가 좀 특이한 놈인가?”

“입 닥쳐라, 무도한 놈! 감히 날 이렇게 대하고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넌 그따위로 말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데피너스가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다. 왼쪽 손등으로 데피너스의 복부를 후려친 러셀은 끙끙거리며 신음을 흘리는 엘프를 보며 말했다.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부류가 두 가지 있지. 아침 식사를 방해하는 놈, 말이 많은 놈. 넌 두 가지 다 해당되는군.”

“이놈!”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던 데피너스가 오른손을 바닥으로 뻗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면서 나동그라져 있던 지팡이가 그의 손에 날아들어 잡혔다. 데피너스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꾹 쥐고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

“흐압!”

기합과 함께 삭풍이 불어 닥쳤다. 한순간에 모여든 마나와 데피너스의 마력이 서로 호환하며 러셀을 중심으로 마법을 구현했다. 바닥에 깔린 돌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불똥이 튀고 잘려 나갔다.

러셀을 위협하는 바람의 장벽을 만든 데피너스는 동시에 그의 몸을 가볍게 띄우는 바람의 손길을 이용, 러셀의 도끼 자루에서 벗어나 뒤로 사뿐 내려섰다.

둥글고 쉼없이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장벽에 갇힌 러셀을 보며 데피너스가 몸을 일으켰다.

“미개하고 야만적인 놈! 네놈의 성질머리를 보아하니 어떻게 살아왔을지 눈에 훤하다! 그 타고난 힘으로 이것저것 부수면서 살았겠지! 그러고선 이 도시에서 난동을 부린 것이고! 네놈이 뭘 원하는지는 모르고 알 바도 아니다만 그 버르장머리는 싹 고쳐주겠다!”

태풍이 바로 옆에서 불어닥치는 듯한 느낌 때문에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러셀은 바람의 장벽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데피너스가 뭐라뭐라 고함지르는 것을 입술 모양으로 읽어낸 러셀이 씩 웃었다.

“배가 아니라 입을 쳤어야 했군.”

그는 왼손을 들어 자신을 가두고 있는 바람의 장벽에 가져다댔다. 약간의 핏방울이 튀며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났다.

마력으로 신체 강화를 하지 않았다지만 러셀의 평상시 몸도 상당한 강도를 자랑한다. 맨주먹으로 돌은 부술 수 있을 정도로. 이 바람이 최소한 암석을 깔끔하게 가를 수 있을 정도의 절삭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데피너스는 엘프다. 귀 끝이 잘려나가 뭉툭해진 귀를 가지고 있지만 종족 특유의 강함이 퇴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조금 더 다른 느낌이 데피너스에게서 느껴졌다.

지금 당장 정확히 뭐라고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그건 마치 기름과 물이 강제로 섞여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불균형한 조화. 조화가 본래 엘프에게 부여된 속성이란 것을 생각하면 특기할 만한 점이다.

엘프라는 종족은 긴 수명과 인간보다 뛰어난 육체, 아름다운 미모로 널리 사랑받는 존재다. 그러나 모든 종족이 그렇듯이 장점만이 넘치는 종족은 아니었다.

긴 수명은 선천적인 나태를, 뛰어난 육체는 단련의 소홀함을, 미모는 타인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엘프들은 많지 않고 대부분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 쇠락한 문명의 잔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데피너스는 인간과 무척이나 닮았다. 비단 외견 뿐만이 아니라 말투와 행동, 고압적인 자세까지. 물론 러셀이 수십, 수백의 엘프들을 만나본 것은 아니기에 선입견은 곤란하겠지만.

짧은 새 상념을 모두 마친 러셀은 손끝에 묻은 핏방울을 털었다. 그리고 앞으로 손을 내질렀다. 세차게 돌아가는 수십, 수백 개의 강철 칼날에 몸을 들이미는 모양새다.

카가가가각!

피부 위로 세찬 불똥이 튀었다.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바람의 힘 때문에 몸이 떠밀리려 했다. 발에 마력을 불어넣은 다음 지면과 강하게 밀착시키자 접지력이 생겨나면서 그의 몸을 고정시켰다.

바람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온 그의 손이 단번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피부 이곳저곳이 갈라지며 금세 뼈가 드러나고 근육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러셀은 고통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바람에 신경을 기울였다. 공기의 흐름 속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은 이미 눈에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마법의 시전자가 조종하는 마력과 그 의념마저도 손에 잡힐 듯 보였다. 보인다면, 잡을 수 있었다. 러셀은 손을 조금 더 뻗었고,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마력의 흐름을 틀어잡았다.

동시에 그의 의념과 심상이 마력을 타고 바람의 장벽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미 칠해진 물감 위에 덧칠하는 것처럼 러셀의 마력이 도포되었다.

마법사의 대결은 보통 상대방의 마법을 얼마나 잘 파훼시키고 내 마법은 얼마나 잘 적중시키는가에 따라 달려 있다.

파훼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자신이 가진 마법의 저항력으로 찍어 누르거나, 아니면 술식을 직접 역산해 흩어지게 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파훼의 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데피너스는 자신의 마법 제어권이 통째로 상대방에게 넘어가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솨아아아아!

마치 수천 장의 낙엽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바람의 장벽이 열렸다. 돌을 갈아버릴 기세로 불던 바람의 기세가 확연히 약해지면서 반투명했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하얀 구체가 점점 옅어지고 그 안에서 러셀이 한 손을 살짝 내민 자세로 서 있는 것이 드러났다.

“이, 이런······!”

다급히 마력을 쏟아붓고 지팡이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마법의 통제를 되찾으려 하는 데피너스였지만 한 번 빼앗긴 것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러셀은 이미 완전히 갈라진 바람의 장벽 사이를 손쉽게 빠져나오고는 목을 좌우로 두 번 꺾었다.

“아직 매가 부족했던 모양이야. 딱 대라고. 정신 번쩍 들게 해주지.”

도끼의 옆면을 어느새 회복되기 시작한 오른손으로 팅팅 두드린 러셀이 성큼 다가왔다. 데피너스의 입장에서는 마치 성채가 다가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겁에 질린 엘프가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고 있나! 이 건방진 놈을 죽, 아니 때려 눕혀라!”

간신히 죽이라는 말을 삼킨 것은 데피너스의 주인이 내린 명령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자를 포함해서 그 일행을 산 채로 성까지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이미 러셀의 덩치와 큰 도끼에 겁먹은 병사들은 우물쭈물거릴 뿐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달달 떨리는 다리와 정처없이 흔들리는 동공, 헐렁한 갑옷과 투구 등은 단련되지 못한 육신과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주도의 병사들이라지만 상태가 처참하군. 알면서 데려온 게 아니었나?”

“이익!”

얼굴이 붉게 변한 데피너스가 다시 지팡이를 지휘봉 휘두르듯이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그러자 마력이 다시 재배열되며 밀도 높은 충격파가 되어 러셀에게 쏘아졌다.

표정을 찌푸린 러셀이 도끼를 바로 세운 다음 높이 들었다가 내려쳤다. 강력한 내려찍기에 충격파가 반으로 갈라지며 러셀의 뒤쪽을 강타했다.

이미 바람 때문에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던 판석 조각이 회색의 짙은 먼지 바람이 되어 방사형으로 확 밀려났다.

데피너스가 몸을 공중에 띄우고는 마법으로 목소리를 크게 키운 채 말했다.

“목숨을 빼앗고 싶지는 않다. 범인들은 당장 여관 밖으로 나와서 순순히 체포에 응하라. 그렇지 않다면 사지 한 군데는 자르고 데려가겠다.”

높이 공중에 뜬 것으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데피너스를 올려다보며 러셀이 미소를 지었다.

“누구한테 협박이야?”

그리고 부서진 여관 정문에서 광선이 쏘아졌다. 가느다랗지만 강력한 마력을 내포한 그 광선은 정확하게 데피너스가 꾹 쥐고 있는 지팡이를 부쉈다.

“어, 으아악!”

한순간 마법을 도와주던 지팡이가 부서지자 데피너스는 공중에서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러셀은 그가 가진 마력은 인간 마법사보다 방대하지만 운용 능력은 형편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팡이나 수정구슬, 마법서 같은 마법을 보조하는 마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마법사는 드물지만 온전히 맹신하는 마법사 또한 드물다. 하지만 데피너스는 당장 지팡이가 부서지자마자 바로 체공 마법이 흔들리며 균형을 잃었다.

불균형하다. 세상에 나와서 인간 귀족의 아래에서 일한다는 것도 신기하고, 직접 노예 경매장을 운영하며 동족들을 잡아들인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리고 마법의 불균형한 실력 또한 흥미로운 요소였다.

“내, 내 지팡이가······!”

무릎을 꿇은 채 지팡이의 잔해를 보며 망연자실해하는 데피너스. 그런 엘프를 다른 병사들 또한 당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작 엘프 주제에 어디서 큰 소리를 치는 거야. 입 닥치고 있어.”

러셀의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아샤린이 당당한 걸음으로 여관 정문을 나서고 있었다. 햇빛 아래서 비춰지는 짙은 색의 머리카락이 밝게 빛나고 동공이 노랗게 타올랐다.

“내가 언제 한 번 이 도시에 들리기로 한 이유가 바로 그 노예 경매장 때문이었지. 동족들을 잡아넣어서 노예로 만드는 이상한 엘프가 있다고 해서 말이야. 낮짝이나 한 번 볼까 했는데 상상 이상이네. 어쩌다가 형벌을 받은 거지?”

현재 아샤린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느러미 모양의 귀나 용의 뿔, 길쭉한 도마뱀 꼬리 같은 것은 눈에 확 띄는 외모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쳐놓고서라도 아샤린의 겉에는 용족 특유의 오만함과 위압감이 넘쳐 흘렀다.

“엘그노어의 형벌. 큰 죄를 저지른 엘프의 귀를 자른 후 추방시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낙인을 찍는 형벌이지. 마력을 보니 성인식은 넘긴 지 한참은 된 엘프 같은데.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그리 된 거지? 유년기의 아이들이라도 죽인 건가?”

“······인간 주제에 꽤 많은 걸 알고 있구나. 하지만 네년이 알 바가 아니다, 계집.”

데피너스의 포악한 말에 아샤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는 그녀의 앞을 러셀이 도끼로 막아 세웠다.

당장이라도 마력을 일으켜 화염을 날리려던 아샤린이 화를 누그러뜨리고는 러셀을 바라보았다.

“왜?”

“시가지다. 저놈이야 정신이 맛이 간 놈이라 그렇다치더라도 너까지 그러진 마라.”

안 그래도 그들 주위에는 인파가 가득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을 온 사람들이 병사들의 바깥에서 목을 길게 빼놓고 서 있던 것이다.

“······엄살은. 저번 때처럼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퍽이나.”

아샤린과 한번 맞붙어본 입장에서 러셀은 그녀의 불꽃이 얼마나 강하고 넓은 범위를 장악하는지 알고 있었다.

말로는 위력을 줄인 화염을 쓰려고 했다지만 그녀의 체내에서 파괴적인 기세로 오르던 마력과 의념을 눈치챈 러셀은 당장 수십 명의 인명 피해가 날 수 있었음을 예상했다. 용족이 마력을 내뿜는 최소 한계치가 웬만한 인간 고위 마법사의 최대치와 비슷하니 그런 것이다.

혀를 찬 아샤린이 마력을 완전히 잠재울 때 러셀이 데피너스의 옷깃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꼼짝없이 뒷목 잡힌 새끼 고양이처럼 붙들린 데피너스가 두려움과 울분이 가득한 눈으로 러셀을 노려보았다.

러셀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그래, 따라가도록 하지.”

“······뭐?”

“안내하라고. 성으로. 나도 네 주인에게 볼 일이 있던 건 마찬가지니.”

“그게 무슨, 컥!”

데피너스의 고개가 획 돌아가며 피가 팍 튀었다. 벌어진 입에서끈적이는 피와 부서진 이빨 조각이 하얗게 빛나며 뚝뚝 떨어졌다.

“입 닥치고 안내나 해라. 다음에는 팔이나 다리를 뽑아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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